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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의 옹기를 이야기하다 <오늘의 옹기: 이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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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함께 한 전통 옹기의 오늘

전시명 : 오늘의 옹기: 이현배
장 소 :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기 간 : 2016.12.13-2017.02.26

글/ 김진녕
 


1990년부터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 옹기쟁이 이현배의 개인전 <오늘의 옹기:이현배>전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는 한국인의 단계별 삶에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옹기가 모두 전시됐다.

그는 전시회 소개 소책자에 “옹기는 세상에 태어날 때 태항아리, 밥을 담는 오모가리, 똥을 담는 합수독아지, 죽어서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이 나고 죽는 그야말로 처음과 마지막을 담는 모든 것”이라는 말을 적어놨다. 전시장에는 그의 말대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대형 옹관을 복원한 옹관부터 요강, 대형 장독, 항아리, 단지, 전통 상차림용 그릇, 퓨전 한식용 그릇, 조선 초기 분청 자라병에서 모티브를 얻은 자라물병과 곤쟁이 젓독을 모티브로 한 오브제 등 다양한 작품이 전시됐다.
 



우리가 흔히 도자기라고 부르는 그릇은 도기와 자기로 나뉜다. 자기는 청자나 백자처럼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 유리질화된 가볍고 반짝거리는 그릇이고 도기는 옹기라고도 부르는 그릇으로 방수가 되지만 공기가 통하는, 그래서 발효 과정이 필수적인 장이나 김치 같은 우리 전통 식문화 발달과 동행한 그릇이다. 즉 자기에 장을 담글 수 없다는 얘기고 장독이나 항아리, 단지, 뚝배기 같은 그릇이 모두 옹기다.
이현배 작가에게 ‘오늘의 옹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대형 옹관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자기의 조상도 질그릇이고, 도기의 조상도 질그릇이다. 유약을 입히지 않은 그릇인 질그릇은 신석기 시대부터 썼다, 잿물을 오짓물이라고도 하는데 오지그릇은 조선 중후기에 발명된 것이다.
대형토기 중 가장 큰 게 옹관이고 옹기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와 함께 영산강 유역의 고대옹관제작기술을 복원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그때 그가 만든 복원한 대형옹관이 이번 전시에도 출품됐다.)

옹기는 어떤 그릇인가.
-옹기는 충분히 자격있는 그릇이다. 전통적으로는 옹기는 자기보다 널리 쓰였다. 우린 도자기란 말이 없었고 도기 따로, 자기 따로 발전했다. 일제시대 때 그런 개념이 없던 일본인이 도자기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그걸 따라한 것이다. 우리 식생활이 발효음식 중심인데. 도기가 발효문화에 맞아 떨어진다. 자기는 고온으로 굽는 과정에서 유리질로 변해 발효 작용이 못일어나는 그릇이다,
조선 중후기에 완성된 오지그릇은 기술적으로 보면 가장 늦게 완성된 첨단 기술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고어텍스 기능이다. 물은 새지 않으면서 숨은 쉬는 그릇. 발효가 이뤄지려면 그릇이 숨을 쉬어야 한다.
전통 사회에서는 옹기의 수요가 더 많았고 비싸기도 했다. 쌀이 한가마니 들어가면 한가마니 값, 두가마니 들어가면 두가마니 값을 받았다. 전통 사회에서 최고의 기능을 가진 사람의 일당이 쌀 한되였고, 장 담그는 독은 쌀 4가마니가 들어가는 크기이니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요즘 사극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한몫하고 있다. 옹기야말로 궁중에서부터 서민까지 모두 사용하는 절대적인 그릇이자 신분적 계층이 없는 그릇이었다.
 
옹기와 자기의 차이가 있다면.
-다 다르다. 태토를 쓰는 사기쟁이와 흙을 쓰는 옹기쟁이가 기질이 다르다. 옹기쟁이는 모으는 습관이 있고, 사기쟁이는 나누는 습관이 있다. 물레가 돌아가는 방향도 다르다. 옹기와 사기는 태생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밑에서 위로 만들어가고 사기쟁이는 위에서 아래로 만들어간다. 물레도 사기쟁이는 발로차서 시계방향으로 돌리고, 우리는 당겨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린다. 거의 한약과 양약의 차이다.(웃음)
 
독과 항아리의 차이가 무엇인가.
-메주 한말로 장을 담을 수 있는 크기 이상을 독이라고 한다. 그보다 작은 것을 항아리, 가장 작은 게 단지다. 내용물이 담겼을 때 옮길 수 없는 게 독이고 움직일 수 있는 게 항아리다. 전통 사회에서 이사를 갈 때는 밥솥과 항아리를 짊어지고 갔다. 한국전쟁 뒤 남한에 이북식 항아리가 꽤 남아있는 것도 피난민들이 이고 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옹기쟁이가 일을 배울 때 가장 작은 독을 만드는 것으로 훈련을 받는다. 작업할 때도 항아리와 독은 다르다. 항아리는 설계없이 물레에서 바로 밑-중간-위를 만들어 나간다. 독은 머릿속 설계도 작업을 통해 건축적으로 설계를 하고 계획에 의해 작업한다.

 
요즘 한국인의 생활 방식에 장독이 들어갈 틈이 없지 않나.
-옹기는 큰 그릇을 만드는데 더 적합하고 공법도 그에 맞게 발달한 그릇이다. 장독 중심이다. 구울 때 가마 구성도 장독을 중심으로 놓고 나머지를 채운다. 대형 독이 메인이고 그 나머지는 파생 구성이다. 장독이나 항아리를 다시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의지의 문제라고 본다. 식생활이 건강하게 돌아오려면 장문화가 살아나야한다. 옹기에 랩을 씌워보면 랩이 밀착이 안된다. 이는 기름기가 겉돈다는 얘기로 미지근한 물을 쓰면 세척이 쉽게 된다. 예전과는 달리 조리대와 식탁이 요즘은 붙어있다. 무거워서 못쓴다는 말도 이유가 안된다. 아파트에서도 장을 담글 수도 있다. 우리식 발효의 특징은 환경만 만들어놓으면 자기가 알아서 발효가 된다는 것이다. 간섭하는 것 싫어한다. 물론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외환위기 이후 전업주부가 사라지고 있고 장 담그는 풍습도 사라지고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기능이라는 건 보존해가야 한다. 이번 전시회에 연표를 만들 때 사회적 관계 항목을 넣은 것도 이게 개인의 의지만 갖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라물병을 꾸준히 만들고 있다.
-전통 자라물병에 모티브를 얻은 자라물병을 처음 만든 것은 1994년께였다. 내가 옹기를 시작할 때 3년을 버텨보자고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고 다시 10년을 준비하는데 작업실에 불이 났다. 많이 힘들었다. 그때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가 마음 속에 들어와 앉았다. 나중에 직접 킬리만자까지 갔다. 4000미터 고지의 킬리만자로는 화산재 덩어리가 뭉쳐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 덩어리를 보면서 자라물병의 목을 단순화시키는 아이디어를 얻어 2012년 목이 없는 자라물병을 발표했다.


옹기일은 어떻게 시작했나.
-농대에 가고 싶었지만 시험에서 떨어진 뒤 경희호텔전문대에서 식품조리학과에 진학했다(1982). 농사일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간 것이었는데 서비스분야를 가르치는 게 이해가 안됐다. 휴학하고 고향(전북 장수)에 내려가 고물장수를 했다. 그때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사서 다 읽으며 문화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물 수거를 위해 집집마다 다니다 보니 장독대의 위치가 눈에 들어왔다. 대접받는 자리도 아니고, 소외받는 자리도 아니고. 해를 적당히 받으면서도 대문에서 멀어야 하고, 부엌에서는 가까운 절묘한 위치에 있다.


나도 이 사회에서 저렇게 적당히 필요하고, 적당히 눈에 안띄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이번 전시회도 관람객이 전시회장의 작품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게 소소하게 구성을 하자고 제의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힐튼호텔에 입사했다. 일본인 전문가가 슈가파우더로 만든 성 모양의 케익이 망가져서 내가 고쳤더니 손재주가 있다고 초콜렛 제조 부서에 배치됐다. 쇼콜라티에가 된 것. 그때 힐튼호텔에는 헨리 무어의 조각품이 있었다. 그게 2억원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그 돈이면 내가 시골가서 살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보니 그게 흙으로 빚어서 브론즈로 뜬 것이다. ‘흙일이라면 내가 할만하지’란 생각에 조소학원에 3년 정도를 다니기도 했지만 미대 입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다 1990년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민중자서전 ‘옹기쟁이’ 박나섭의 <나 죽으면 이걸로 끄쳐버리지>를 읽었다. 그 길로 박나섭을 찾아갔다. 1991년 호텔을 퇴사하고 전남 벌교 징광으로 내려가 옹기쟁이의 길을 걷게 됐다.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는 이유가 있나.
-그 문제로 아내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회화를 전공한 아내는 손님도 원하니까 서명을 넣자고 한다, 그 부분에서 나는 더 큰 욕심을 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뭘 만들던지 ‘하는 짓 보면 꼭 저같이 한다’는 말이 있지 않나? 내가 충실하면 나는 내 작품이 나를 닮게 된다고 생각한다. 불가에서는 이전(윤회, 업)이 있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이후(영생)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이렇게 (옹기쟁이로)살겠다고 작정할 때, ‘몸만큼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고, 이 육신에 담긴 정신만큼 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싶고, 지금에 충실하자는 생각이다. 혹 학문적으로 훗날에 누가 내 작품에 접근하겠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일이고, 내 일이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어떤 얘기를 전하고 싶은가.
-서울은 너무 크고 우리의 삶은 너무 작다. 도시가 지나치게 크면, 필요에 의해서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시스템이 도리어 개인을 압박한다. 삶과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밥에서 똥까지는 자유의지다. 밥을 ‘한끼 때우는’ 대상이 아닌, 또는 에너지원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몸이 갖는 감각이 삶의 질을 높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단출하지만 정서적으로는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다. 구조적으로 사회를 개인이 어쩌지는 못하더라도 그 가운데서도 자유의지를 발현해 보자, 자유롭게 재미있게 살자, 고열량에 비싼 것을 먹어야 잘 사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풍부한 게 잘먹고 잘사는 것이다.
 
그는 94세의 나이에 아직도 부산에서 농사를 지어 자식에게 나락을 보내주는 부친을 위하여 옹관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다. 그 옹관도 이번 전시에 설치됐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에 동반하는 것이 ‘오늘의 옹기’이기 때문이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7.06.2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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