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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 조선통신사의 파란만장 생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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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간 조선의 선비들』
김경숙 지음 | 이순 | 2012.10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살던 세상. 그리 먼 거 같지 않아도 사는 모습은 상상해내기 어렵다. 지금이야 일본에 다녀오는 일이 1박2일에도 충분하지만, 조선시대에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던 듯 하다.

조선통신사의 사행, 즉 사신단의 일본 파견은 1607~1811년 모두 열두 번 있었고, 각각의 규모는 470명 내외였다. 6척의 사행선에 나눠타고 갔으며, 다녀오는 데 걸린 기간은 약 1년이나 된다.

이들은 죽을 고비를 넘겨 바다를 건너고 수많은 일행을 거느린 행장에 별별 사고를 겪으면서 사행의 임무를 해냈다. 이 책은 이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그들의 사행길을 시각화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성린, <부산>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은 ‘솥산’이라는 뜻이다. 솥을 엎어놓은 듯한 부산과 항구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조선통신사는 이곳에서 모든 준비를 갖춘 뒤 사행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작자미상, <조선선 입진지도(朝鮮船入津之圖)>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 도서관 소장.
조선통신사의 배가 쓰시마 후추 항구로 들어가는 모습니다. 당시 사행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까지의 뱃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려주는 한 대목을 보자. 1763년의 사행에서 10월6일 오전 2시경 부산에서 출발한 배는 오후 2시경 쓰시마의 서북쪽 사스나에 도착했는데, 지금은 쾌속선을 타고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를, 풍랑이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12시간에 걸쳐 고생하며 갔다.

 

“사람마다 모두 만 번 죽다 한 번 살아났다고들 했다....아주 심한 사람은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검어지고 입으로는 누런 물을 토했다....나는 치목(키를 지탱하는 나무)이 두 번째 부러지는 소리에 너무 놀랐으나 현기증으로 메스꺼워 토할 것 같아 저녁 내내 본방에 앉아 있었다....”(원중거, 『승사록』 67면)

 

풍랑이 심했던 날의 기록은 더욱 가관이다. 요강을 비롯한 모든 기구가 굴러다니고 서로 부딪친 내용을 눈에 보듯 기록을 남겼다.

 

가까스로 도착은 했으나 배에 불이 나버리기도 한다.

 

“...배 안의 불은 이미 구제할 수 없었다. 기계며 집물이며 어느 것이나 다 불길을 돕는 물건이어서 맹렬한 불꽃이 공중으로 오르니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었다....왜인이 앞으로 달려와  외치며 불타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 급한 일을 알리려는 모습이었으나 곁에 통역이 없어 알 수가 없으니... 배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몹시 데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있고,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도 있고... 차마 볼 수 없이 참혹하였다...부사 일행 관원의 돈주머니, 예물단자의 인삼과 나눠 실었던 그밖의 물건들을 하나도 건지지 못하였다...”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30-31면)

 

사행단이 쓰시마에서 오사카를 거쳐 에도로 가는 여정은 강을 따라 금루선이라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1763년 사행 때 동원된 금루선은 11척. 그러나 금루선 한 척 당 앞에서 끌어당기는 가람선 6척, 배의 좌우에도 작은 배들이 따르고, 뒷간으로 쓰는 작은 배와 다구를 실은 지응선이 그 뒤를 이었다. 이런저런 배들이 필요하여 총 140척 정도의 배가 강을 올라가는데, 강바닥이 얕아 강의 양쪽에서 사람들이 배에 연결된 닻줄을 잡고 끌며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에 이 사행단의 행차가 얼마나 큰 구경거리였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와타나베 젠우에몬 슈교(渡邊善右衛門守業), <통신사방정성도(通信使訪淀城圖)>, 교토대학 문학부 도서실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영인본.
1748년 통신사행이 요도조(淀城)에 도착하는 모습이다. 강물 안에 금루선과 예선들이 있고 물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통신사가 경유하게 되는 지역은 60곳이 넘는데, 저자는 이들이 머물렀던 지역과 관소에 따라 갈 때와 올 때 머물렀는지, 어떤 곳이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하여 보여주어 흥미를 더한다. 관소는 대개 그 지역의 큰 사찰이거나 새로 건물을 지어주기도 하였고 민가를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교토에 가면 볼 수 있는 혼간지는 예전에는 거대한 규모의 사찰이었는데 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된 적이 많다. 아사쿠사 히가시혼간지의 모습은 호쿠사이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호쿠사이(北斎), <도토(東道) 아사쿠사 혼간지>. 그림 앞면의 큰 지붕이 히가시혼간지 건물이다.

 

조선통신사는 조선 국왕의 명의로 된 국서를 받들고 에도로 가서 일본 간파쿠에게 전했다. 이를 전명(傳命)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들의 회답서를 받아 돌아왔다. 국서 전달은 조선통신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는데, 1763년 조엄은 폭우로 배가 난파될 지경에 이르자 국서를 품에 안고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다 한다.


국서를 전달하는 모습

 


 니야마 다이호(新山退甫), <정사 조엄>,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畵)』 중, 1764년.
1763년 계미사행의 정사 조엄의 모습이다.

 

조선통신사에 문사가 많이 포함되다보니, 일본 지식인들과 모여 시문을 지어 주고받은 것도 많이 남아 있고, 사행원들끼리 혹은 혼자서 소회를 남기기도 하였다.

 


 1764년 3월 29일, 조선통신사의 문사들이 나고야의 쇼코인에서 일본 문사들과 시문창화하는 모습이다.
왼쪽의 네 명이 조선 문사(남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이고 오른쪽이 일본 문사들이다.
그림에 글을 남긴 이는 나고야의 유학자인 마쓰다이라 군산(松平君山)으로,
그는 이 순간을 불후의 영광이었다고 남기고 있다.

 

1년이나 걸리는 여정이다보니 별의별 일들을 다 겪었을 것이다. 사행단의 생일, 이국에서 맞는 명절, 따라갔던 사람들의 뜻하지 않은 죽음 등등. 일상적인 것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삶이 드라마처럼 재현된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면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만약 가능하다면, 국서를 품에 안고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조선 선비들의 비장함을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글/ 관리자
업데이트 2019.04.22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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