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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의 조선 여행]-남장 소녀까지 등장하는 조선후기 여행붐 이야기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 2012. 7

심사정보다 10살 연상인 이탈리아 화가 카날레토는 베니스의 운하와 리알토 다리 일대를 그린 풍경화로 유명하다. 18세기, 그는 적어도 베니스에서 가장 유명한 베스트셀러 화가였다. 이유는 당시 유럽을 휩쓸듯이 유행한 그랜드 투어에서 가장 인기 높은 여행지의 풍경화를 그가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에서 그가 그린 베니스 풍경화를 볼 수 있는 것도 이런 까닭이랄 수 있다.



전 이형록(이형록) <나룻배(渡船圖)> 지본담채 28.2x38.8cm 국립중앙박물관

‘여행하면 카메라가 연상되지만 이전에는 단연 엽서였다. 또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이처럼 그림이었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매한 논리로 무장된 산수화의 세계 역시 그 한 쪽을 지탱해주는 이론에는 여행이 들어 있다. ’누워서 즐긴다‘는 유명한 와유(臥遊) 사상이 그것이다.


이방운(李昉運) <망천도(輞川圖)> 지본담채 105.2x56cm 서울대박물관
당나라 시인 왕유가 망천에 지은 별장은 명승으로 이름나 일찍부터 조선 문인들의 시와 글에 등장했다. 

이 책은 동서양할 것 없이 18세기가 되면 불어 닥친 여행 붐에 대해서 규장각에 남겨진 기록을 가지고 조선시대 후기에 등장하는 여행문화의 실상을 재구성해보인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치료 목적의 왕세자의 온천 여행에서부터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과거 길에 오른 시골 양반의 한양기, 헐렁한 감시에 유배인지 유람인지 분간키 어려운 유배 여행길, 여자 몸으로 남편을 따라 혹은 호기심을 못 이겨 남장을 하고 여행길에 나선 조선 시대의 씩씩한 여성들의 여행기까지 다양한 여행 체험기가 소개돼 있다.


백은배(白殷培) <구경대도(龜景臺圖)> 지본담채 110.5x52.2cm 서울역사박물관

의유당 남씨(意幽堂 南氏)sms 남편 신대손(申大孫)이 함흥 판관으로 부임하자 동행하면서 여행기록(『의유당 일기』)을 남겼는데 동해 일출을 보면서 ‘이윽고 날이 밝으며 붉은 기운이 동편 길게 뻗쳤으니, 진홍 대단 여러 필을 물 우희 펼친 듯, 만경창파 일시에 붉어 하늘에 자옥하고, 노하는 물결 소래 더욱 壯하며, 홍전같은 물빛이 황홀하여 수색이 조요하니, 차마 끔찍하더라’라는 명문장을 남겼다. 구경대는 함흥 십경중 하나로 동해안으로 돌출된 전망대 같은 곳이다.

이런 읽을거리 외에 그림에 관계되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와유 사상과 당시 금강산 여행 열풍도 소개돼 눈길을 끈다. 와유(臥遊)라는 말은 4세기 무렵에 중국의 종병이란 사람이 처음 썼으나 조선의 유학자 이익(李瀷)도 한마디로 ‘와유란 몸은 누워 있으나 정신은 노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방운(李昉運) <사인암(舍人巖)> 지본담채 26.0x32.5cm 국민대박물관

원주에 살던 14살 소녀 김금원은 부모 허락하에 남장을 하고 여행길에 올라 단양, 청풍, 금강 내외산 등을 둘러 보고  『호동서낙기(湖東西洛記)』(1851)을 남겼다. 사인암도 그녀가 들른 명승지 중 하나다.

조선에서 와유와 그림이 본격적으로 짝이 되기 시작한 것은 남아있는 자료로 보면 1682년 김수항이 조세걸을 시켜서 그리게 한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라고 할 수 있다. 김수항이 강원도 화천에 들어가 살기로 작정한 뒤에 중국의 주자가 살던 무이구곡을 본떠 곡운구곡을 그리게 한 것이다. 


이방운(李昉運)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지본담채 31x41.5cm 건국대박물관

중국의 명승지는 조선시대 주사위 게임의 내용으로도 등장했다. 무이구곡 그림은 주자가 살던 복건성 무이산의 경치를 그린 것으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마음속에 꿈꾸던 산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내가 이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내 두 다리에 종종 산을 벗어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구곡은 늘 눈 안에 있지 않으므로 때때로 이것을 가지고서 보고자 한 것이다‘라고 서문을 써서 그림을 가지고 와유할 뜻을 분명히 했다.

 
조세걸(曺世杰)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의 제6곡 와룡담(臥龍潭) 제7곡 명월계(明月溪)

이런 김수항의 아들 중 한 사람이 김창흡이고 그가 바로 금강산 진경산수를 그려낸 겸제 정선의 스승이다. 이렇게 보면 겸재 그림이란 조선시대에 본격적으로 사실적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 와유의 재산으로 삼고자 한 전통을 이어 받아 탄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의 명산을 유람한 기행문과 그림을 함께 실은 <명산승개기(名山勝槩記)>.
17,18세기 조선의 산수기행 문학과 실경그림 발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청대 26.5x17.3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이 책에는 당시 유행했던 금강산 유행 붐과 금강산 그림의 유행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금강산그림의 박사인 박은순 교수는 여행 붐은 18세기이지만 금강산이 유명해진 것은 13세기말에서 14세기초라고 했다.


노영(魯英) <담무갈·지장보살 현신도(曇無竭·地藏菩薩 現身圖)>의 앞면과 뒷면(22.5x13.0cm 국립중앙박물관)

지금까지 그려진 금강산 그림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려 태조가 금강산에 가자 담무갈 보살과 그 권속들이 나타나므로 그를 예배 드리는 장면을 그렸다. 

이 때 고려 사람들은 화엄경 속에 담무갈 보살이 금강산에 만이천 권속을 데리고 거처하고 있다는 구절에 착안해 이 산을 금강산으로 부르고 기기묘묘한 여러 봉우리도 일만이천 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만 해도 불교 국가라 이 산을 한번 보고 죽으면 지옥에 빠지지 않는다는 신앙이 있었으나 차츰 성리학의 조선에 들면서 많은 선비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고 마음을 닦기 위해 금강산을 찾았다고 한다.


금강산 여행길의 첫 번째 명승인 내금강 장안사를 그린
정선(鄭敾) <장안사(長安寺)> 견본담채 37.5x36.6cm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 18세기 후반에는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당시 상투적인 금강산 여행길은 한양을 출발해 경기도 영평과 철원을 거쳐 강원도에 들어서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고 김화와 회양을 거쳐 금강 내산(內山)으로 들어가 유명한 장안사, 정양사 등의 명승을 살펴본 뒤 동해가로 나아가 관동 팔경의 일부를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외산(外山)으로 들어가 구룡폭포와 만물초를 본 뒤에 한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 일정이 당시 평균 20일에서 30일이 걸렸다고 한다.


작자미상 <주유청강선유도(舟遊淸江船遊圖) 46.2x31.2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책에 삽도로 소개된 그림 중에는 근래까지 거의 소개되지 않은 그림도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만 소개하면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의 그림을 그대로 본 뜬 그림이 평양남도 암행어사 길을 소개하는 글 속의 기생 잔치의 삽도로 쓰이고 있다. 왜 이제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은 이런 그림을 일반에 알리지 않았던 것일까?(*)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19.11.14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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