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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강산]- 금강산을 사랑한 사람들, 사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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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上, 下
임병목 엮음 | 열화당학인총서 | 2012.5

상 – 금강산의 역사, 그리고 이 산을 사랑한 사람들
하 – 옛 시와 함께보는 금강산 사진첩

길을 가다 어디서 많이 본 친숙한 얼굴을 만난다. 누군지 언뜻 생각나지 않아 반갑게 아는 척을 하고 나서 생각하면 그는 TV에서 본 연예인이다... 너무 많이 이야기를 듣고 보아서 아는 것 같은, 그러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그런 관계 같은 느낌의 산이 나에게는 금강산이다. 실제로는 너무나 먼데, 가깝게 느껴지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알 길이 없는.

지금은 다시 또 가기 어렵게 되어 더 멀어졌다. 말하자면 스타급의 산이라고 해야 할까? 신비감도 스타성의 일부여서인지 책을 들여다볼수록 금강산에 대한 부질없는 선망이 늘어난다.

금강산은 곳곳에 부분적으로도 많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지만 산 전체에 대한 흥미로운 전설도 꽤 많은 편이다. 한 신선이 하늘나라의 둘도 없는 보물인 석가산을 옥황상제께 졸라서 가지고 내려온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석가모니를 모시던 여덟 금강신이 하나씩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산 금강산을 바쳐 동해에 가져다 놓다가 7개는 바다 속에 넣고 한 개의 금강산만 육지에 놓은 것이라는, 7개의 바다 속 금강산은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할 때 육지로 나온다는 등등, 어쨌든 신성한 보물과 같은 산이라는 얘기들이다.



총석정(叢石亭), 『조선금강산백경朝鮮金剛山百景』,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 1923
총석정은 주상절리, 즉 화산 폭발시 용암의 응고 속도에 따라 생긴 육각형 현무암 기둥들이
멋지게 펼쳐져 있는 지형에 있는 정자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그 지형 자체를 이른다.
미륵불이 출현하면 법당을 지을 돌기둥들이라고도 한다.
왼쪽에 보이는 정자가 총석정이며, 김규진이 쓴 편액 글씨가 있다.


해강 김규진의 총석정 글씨
 

금강산 이름 자체는 불교적이지만, 금강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사기(史記)』. 진시황이 (기원전 219년에) 사람을 삼신산으로 보내 불로초를 구하는데, 이 삼신산 중 봉래산이 금강산이라고 되어 있다.


유점사 오십삼불

금강산에는 수많은 절과 암자가 있다. 그 중 유점사 능인보전에는 오십삼불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오십삼불은 우리나라 불교전래 전설에서 중요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일제강점기 조사 당시에는 유점사 능인보전 안에 총 50구의 불상이 있었고, 1916년 일본인에 의해 17점이 강탈당했다가 개성에서 9점을 찾아가지고 돌아왔지만 그 중 여섯 점은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 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보스턴미술관에 유점사 오십삼불 중 한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다고도 한다.

책에서 놀라운 것은 일제시대 금강산의 모습을 담은 방대한 사진자료들이다. 일제시대의 사진이나 엽서를 꼼꼼히 모아 엮은 저자의 정성에 감탄하게 된다. 일반인들이 금강산의 유명 경치로 알고 있는 포스트 중에 만물상이 있는데, 저자는 이것의 원래 이름은 만물초(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옥황상제가 만들었던 모델링이라는 의미)였으나 일제시대 이후 만물상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에 대해 의구심을 표한다.
각종 동물들의 기기묘묘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바위 만물초는 현재 창덕궁 희정당에 걸려 있는 해강 김규진의 그림에도 등장한다.


해강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창덕궁 희정당에 걸려 있음.

금강산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은 것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것은 고려태조 왕건의 금강산 행차와 관련된 기록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담무갈지장보살현신도 曇無竭 地藏菩薩 現身圖>

그림의 중앙에 있는 것이 담무갈보살, 상단이 지장보살이다. 화엄경에 따르면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은 금강산에 거주하는데, 일만 이천 봉우리마다 있는 보살의 우두머리이다. 실제로 금강산에는 법기봉이 있어 이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을 지칭한 것이라 생각된다. 전체 그림 가운데 좌측에 아주 작게 절하는 사람이 보이는데 그 위에 태조라고 씌어 있다. 이 사람이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이 때 금강산을 방문하여 여러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아들이었던 마의태자를 만나고 갔다고 전하기도 한다.


용마석(龍馬石), 1938
신라의 마의태자가 죽자 그의 말이 따라 죽어 바위로 변한 것이 용마석이라고 한다.
비로봉 아래 2km지점에 위치하며, 높이는 약 50m, 아래 보이는 것은 비로봉여관이며
근처에는 마의태자 묘가 있다.

서글픈 운명의 마의태자에 관해서는 춘원 이광수도 시조로 그 감흥을 전한다.

  만승(萬乘)의 보위를 그 누구에게 내어주고
  구오(九五)의 나는 용이 황천강에 드단 말가
  천년에 지나는 유신(遺臣) 눈물겨워 하노라
     -춘원 이광수

그림과 관련된 금강산에 대해 조금 더 주목하자면, 이정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시대 화가로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41-1622)도 유명하지만 나옹 이정(懶翁 李楨, 1578-1607)이라는 이도 그리는 재주로 유명했다는데, 그가 금강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나옹 이정은 8살에 소년화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한 살에 금강산에 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계속 거기서 살았다고 한다. 장안사를 고쳐 지으면서 어떤 그림을 벽에 그릴지 설왕설래하던 중에 금강산에 온 소년 이정이 스님들에게 벽에 금강산 경치를 그리자고 주장하여 장안사에 금강산 벽화를 그렸다고 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그린 그림이 얼마나 실감이 있었던지 장안사의 보물이 되었다고. 이 때가 기록으로 1589년이니 우리 나이로 열 두 살이다.

금강산이 현재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라 아쉬움이 있지만 기록으로만 보아도 많은 명필들이 작품을 남겨 놓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본 책에서 글씨를 볼 수는 없지만 신라시대의 명필 김생(金生)도 ‘금강산유점사 金剛山楡岾寺’라는 현판글씨를 남겼으며 최치원은 외금강 옥류동에 ‘崔孤雲’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고, 구룡연에는 ‘千丈白練 萬斛眞珠’ 등의 글귀를 새기기도 해서 유명하다.

금강산을 찾아갔던 사람, 특히 역사에 남을 만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수없이 많다. 이성계, 일본사신 관희, 세조와 효령대군, 왕과 군신들이 보낸 화원들, 조운흘, 김시습(만폭동 백룡담 근처 바위에 요산요수로 시작되는 시를 남김), 성현, 남효온, 이이, 양대박, 양사언  제주 기녀 김만덕(제주도민을 구휼해 유명한 이로 이후 금강산 구경을 소원하여 그것을 들어주었다고) 등등.

추사 김정희도 금강산에 오래 머물며 유람하고 시를 남기기도 했다. 금강산 장안사에 華嶽, 유점사에 芙蓉秋水樓, 내금강 마하연에 栗師示寂偈 글씨를 남겼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만폭동도>, <정양사도>, <금강대도>, 『관동명승첩』, 『해악전신첩』, 심사정(1707-1769)의 <장안사도>, <명경대도>, 이인상(1710-1760)의 <구룡폭도>, <은선대도>, 김윤겸(1711-1775), 『금강산화첩』, 『봉래도권』, 강세황(1712-1791)의 『풍악장유첩』, 금강산 구룡연에 투신했다가 구조되었다는 최북(1720-?)의 <표훈사도>, <금강전도> 등 유명한 금강산 그림들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책에 실려 있지는 않다.


만폭동 바위에 새겨진 양사언의 ‘봉래풍악 원화동천’

양사언은 자신의 호마저 금강산의 여름 이름인 ‘봉래’로 지었으며, 아예 금강산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많은 글씨를 바위에 남겼다.(왜 바위에 글씨들을 남기는지 개인적으로는 반대지만, 훗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명필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만폭동 바위 글씨 '봉래풍악 원화동천'은 “봉래 풍악 금강산은 조화로 이루어진 별세계” 라는 뜻이며 여기서 동천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골짜기를 이르는 말이다.

많은 문인들이 이 만폭동에 새겨진 글씨에 찬사를 보냈으며,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하는 <만폭동>에는 글씨도 표현되어 있다. 배열이 실제와 다른 것은 기억이 왜곡된 탓일 듯.


김홍도의 <만폭동>(1788)

금강산이 대단한 경관이다 보니 금강산에 대해 각각의 경치에 대해 한 두마디씩 하신 탓에 수많은 시가 전해 내려온다. 그중 임헌 이하곤(1677-1724)은 「외룡구연」 이라는 7자씩 70구절, 총 490자의 장시를 남기기도 했다. 너무 길어서 인용은 생략. 보통 맨 앞과 맨 뒤만 인용된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낸 사진첩이 없었다면 금강산의 원래 모습에 대해 이만큼 알 수 없었을 것임은 씁쓸한 사실이다. 1913년 대륙답사회에서 『조선금강산대관』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1923년 일본 아사히신문사에서 『조선 금강산 백경』, 1924년 만철경성철도국에서 『만이천봉 조선 금강산대관』, 『금강산』, 1926년 덕전사진관 등등이 잘 알려져 있다.


금강산 전철 내부.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20년사』,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 1939
1913년 금강산 전기철도 전 구간(철원-내금강)이 개통, 금강산 탐방이 쉬워졌다.
기차 요금은 쌀 한가마니와 맞먹는 가격이었다고. 1931년 7월 개통.

책을 덮으면서 천하명산인 금강산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 수많은 아름다운 광경을 눈으로 담고도 왠지 모르게 소화불량이 된 것 같은 느낌은, 직접 보고 즐기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19.04.2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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