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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년의 <피금정도>: 강세황의 실경산수화에 관한 모색과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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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화, 「1789년의 <피금정도>: 강세황의 실경산수화에 관한 모색과 귀결」,『미술사논단』, 한국미술연구소, Vol.45, 2017.12.

조선시대 많은 다른 화가들처럼 강세황(姜世晃, 1713-1791)도 금강산을 유람했으나 강원도에 머무는 동안 남긴 그림은 많지 않으며 금강산에서 그린 그림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현재 그 지역을 그린 <피금정도>와 회양 및 동해안을 사행한 《풍악장유첩》이라는 화첩이 전해질 뿐이다. 금강산 입구에 위치하는 피금정은 금강산도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는데, 강세황의 피금정도는 두 점으로 각각 1788년, 1789년에 제작되었다. 이 논문은 그중 1789년에 제작된 큰 규모(147.2x51.2cm)의 작품에 주목한 연구이다. 
  <피금정도> 그림 자체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으며 이는 그림 제작의 구체적 배경이나 목적에 대한 기록이 없는 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연구자는 강세황의 회화가 전개되는 맥락 속에서 실경산수로서의 <피금정도>의 면모를 분석하고 문인화의 전통에서 이 회화가 가지는 의미를 찾고자 했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피금정披襟亭>, 비단에 수묵담채, 126.7x69.4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은 1788년 회양부사에 부임한 아들을 따라 그곳으로 향하다 피금정을 지나게 되고, 이해 화원 김홍도,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한다. 이 화원들은 백여 폭을 그려 서울로 돌아갔고 김홍도의 그림은 훗날 70폭의 화첩이 되어 국왕에게 진상되었다. 『표암유고』속의 「유금강산기」에는 당시 유행하던 금강산 유람과 그림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포함되었는데, 겸재와 현재의 금강산도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는 등, 그가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금강산도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저자는 겸재 정선이 지형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그리지 않은 데 대한 지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금강산도 분야에서 정선의 권위를 인식하면서도 그의 금강산도가 제모습을 표현하는 것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현재에 전하지는 않지만 「유금강산기」에는 강세황이 정양사, 만폭동 등의 풍경을 그린 바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임금(정조)이 보고 싶어 하니 손자가 가져간 금강산 초본 그림들을 서둘러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고, 이에 대한 아들의 답신에 ‘지본 그림 15장, 대포 4장을 진상’했다며 ‘이 아들이 보기에 대폭 그림이 매우 좋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여기서 말한 ‘대폭 그림’이 1789년의 피금정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한다. 

  정선의 금강산도를 비판했던 그가 그리고자 했던 금강산은 어떤 것이었을까. 「유금강산기」의 마무리에 스스로 금강산을 그리고자 했던 뜻을 표현했던 강세황은 결국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저자는 다른 만년의 작품과 기록을 통해 실경산수화에서 그의 실천적 규범과 추구했던 바를 찾고자 했다. 
  주목해야 할 이전의 작품으로 도산서원이 있는 청량산 부근을 그린 <도산도>(1751)와 개성의 명승지를 그린 《송도기행첩》(1757)을 꼽았다. 화첩 내 시문 등을 통해 그가 새로운 회화 형태를 창출하였음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강렬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1763년부터 20년간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기간이 있어 그의 회화적 성취나 탐색에 대한 논의가 어렵다는 점, 이전에 그의 그림에서 산수화가 중심을 차지했던 반면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는 점 등을 들어 <피금정도>는 <도산도> 이래 40년의 세월에서의 결론과 같은 작품이 되었다고 말한다. 강세황은 동시대 예술가에게 창의력의 각축장과도 같았던 금강산을 돌아보면서 앞 세대의 금강산도를 넘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의지를 <피금정도>에 담았다는 것. 

  피금정의 위치는 강원도 북부의 금화와 회양 사이에 자리한 금성현의 남대천 계곡. 저자는 북한의 영토로 사진자료조차 찾기 어려운 해당 장소의 풍경을 어림하기 위해 위성사진이나 과거 지도를 참조하기도 하고, 피금정에 대한 기록들, 정선과 그 이후 피금정을 그렸던 다양한 화가들의 등을 비교하기도 했다. 이중 김홍도 전칭의 그림이 사실과 가장 유사한 형태임을 통해 강세황의 <피금정도>가 상상에 가까울 정도로 산수를 재구성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대상에 핍진한 표현을 실경산수화의 덕목으로 강조했던 강세황의 지론과 어긋나는데, 그의 피금정도에서 보이는 비사실적인 묘사 방법이 그가 시도했던 새로운 차원의 회화적 목표와 일치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정선(鄭敾, 1676-1759) 피금정, 《신묘년 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비단에 수묵담채, 35.7x33.6cm,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 <피금정도> 《금강사군첩》, 비단에 담채, 30.4x43.7cm, 개인


강세황 <피금정도> 1788, 종이에 수묵, 101.0x71cm, 국립중앙박물관


1789년 강세황 <피금정도> 부분


  1789년의 이 <피금정도>보다 앞서 1788년에 그려진 작은 규모의 <피금정도>에서는 남대천과 피금정을 집중하여 그렸고, 이 부분은 1789년의 대형 <피금정도> 내 우측 상단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는 동일 장소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형태적으로 정서적으로 다른 그림이지만 이 부분의 묘사만큼은 유사하다. 1788년의 그림에서는 피금정, 정자가 주인공이나 1789년의 그림에서는 산맥이 주인공이다. 저자는 회양 지역의 위성사진에서 보이는 남대천과 산의 기세를 1789년의 <피금정도>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그 지역의 독특한 지형적 특색을 전통적인 산수화에서의 기본 구도 ‘용맥’으로 연결, 산수에 내재한 기세를 시각적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중국 고사풍의 점경인물도 그려넣어 조선의 실경산수지만 그가 선택한 회화 형식을 완성했다. 


1789년 강세황 <피금정도> 부분

  강세황의 <피금정도>는 결국 동기창을 추종하는 청대 화가들과 같은 시각적 원리하여 구축된 그림이고, 거기에 실경산수로서의 면모를 추가한 것이다. 이는 강세황이 풍경의 정확한 재현만으로는 금강산의 감동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강세황의 문인화에 대한 추구, 실경산수화의 방법적 모색. 이 두 가지 지향점에 경험이 더해져 1789년의 <피금정도>와 같은 결과물이 얻어진 것임을 이끌어내고 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18.04.19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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