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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관 초상의 흉배는 얼마나 다양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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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산,「조선시대 무관초상화와 흉배에 관한 연구」, 『미술사연구』(제26호), 2012년 12월

흉배(胸背)는 왕과 관리들의 품계를 구별하기 위해 상복(常服)에 부착하던 표식으로 대개 문관은 조류(鳥類), 무관은 금수류(禽獸類)를 부착하였다. 흉배의 착용이 시작된 것은 당대(唐代)부터이고,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454년(단종 2)에 종친들에게 처음 흉배가 부착된 단령을 입게 하였고 곧 문무 당상관은 모두 흉배를 부착하게 하였다.


흉배제도가 법전으로 기록된 것은 1484년(성종 15년) 12월에 편찬된『경국대전(經國大典)』이고 『경국대전』 이후의 법전으로는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을 들 수 있다. 1-2품은 호표흉배, 3-9품은 웅비흉배를 사용하도록 하였고, 이후 편찬된 1785년(정조 9)의 『대전통편(大典通編)』과 1865년(고종 2)에 편찬된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조선의 흉배제도는 『경국대전』의 내용에서 웅비흉배의 품계만 다소 확대되었을 뿐 큰 변화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 표현된 복식과 흉배는 작품의 진위를 결정하거나 품계를 짐작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묘사할 때도 표제와 함께 어떤 의복과 관대(冠帶)를 착용했는지부터 묘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서술방법이다. 그러나『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을 통해 법전과 실제 제도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있다.

무관초상화의 흉배는 시기와 품계가 같더라도 다른 흉배로 묘사되는 사례가 종종 있으며, 실물흉배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본 논문은 무관흉배와 관련된 내용을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과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의 각종 사료와 기록에서 찾아보고, 조선 중기를 중심으로 무관초상화의 흉배와 실물흉배를 시기별, 종류별로 살펴본 후 17세기 무관초상화의 흉배가 다양하게 변형되어 혼재되는 원인과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조선시대 무관초상화를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오사모에 단령을 입은 정장관복본이 차지하고 있는데 무관초상화가 다양한 형식으로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이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궁중화원에 의해 그려졌고, 이러한 형식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전 오자치 초상의 흉배부분〉, 15세기, 비단에 채색,    흉배                     의인박씨 묘 출토, 16세기, 37.5×36.2cm,
국립고궁박물관                                                                              경기도박물관    
                          

지금까지 초상화와 실물흉배를 통해서 알려진 조선시대의 무관흉배는 호표흉배, 호랑이 흉배, 해치흉배, 사자흉배, 쌍·단호흉배가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 중에서 흉배가 처음 나타나는 무관초상화로는〈傳 오자치 초상〉이 가장 이른데, 이 작품 속의 흉배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는 의인 박씨 묘에서 출토된 실물흉배와 호랑이와 표범의 자세, 표현방법 등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다만 의인 박씨가 4품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이미 흉배제도가 문란했거나, 厚葬의 풍습에 의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는 호표문(虎豹文)이 그대로 잘 나타나 있어 조선 초기의 무관흉배는 법전과 초상화, 실물흉배의 도상이 일치함을 알 수있다.

        
                                     〈권응수 초상〉의 흉배부분                           〈 송호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86×85cm, 국립중앙박물관

17세기의 무관초상화에서는 호랑이, 해치, 사자와 같은 동물들이 등장 하는데, 호랑이흉배가 묘사된 무관초상화로는〈권응수 초상〉, 〈조경 초상〉,〈이운룡 초상>, 〈고희 초상〉,〈박유명 초상> 등이 있다.  이들 초상화 주인공의 품계는 正二品에서 從五品까지 다양하고 흉배모양도 호랑이를 묘사하고 있지만 자세, 방향, 배경무늬 등이 모두 제각각이다. 이와 함께 초상화의 도상, 화법이 모두 달라 모두 다른 시기에 그려진 후대본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있다.  

       
                조경(1541~1609) 묘 출토 해치흉배                                           〈조경 초상〉의 흉배부분
             〈조경 초상〉의 주인공인 조경의 무덤에서 호랑이흉배가 아닌해치흉배가 출토되었는데 흉배의 호랑이가
                     조선 후기의〈작호도>와 비교해 볼 만 하여 후대에 그려졌을 가능성을 염두해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그려진 무관초상화 흉배의 호랑이들은 조선 후기 민화호랑이의 시원(始原)처럼 여겨져왔으나  초상화 속의 호랑이흉배와는 다른 실물흉배, 같은 도상을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흉배 등 조선 후기 또는 말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염두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들 무관초상화는 민화호랑이가 유행한 이후에 이를 참조했거나,민화를 그리던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중로 초상> 흉배 부분                                                     <신경유 초상> 흉배 부분            


해치흉배는〈이중로 초상> ,〈전 구인후 초상〉,〈정충신 초상〉,〈유효걸 초상〉등 조선중기 무관의 흉배로 종종 묘사되었고,〈이수일 초상〉,〈남이흥 초상〉,〈신경유 초상〉 등 해치의 변형 또는 사자의 변형으로 볼 수 있는 흉배들도 있다. 이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출토복식과 함께 발견되는 실제 흉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한데 해치흉배, 사자흉배 또는 변형된 흉배가 그려진 초상화는 모두 정사공신과 진무공신에 녹훈된 공신화상이다.



〈 이주국 초상〉, 18세기, 비단에 채색, 개인소장


쌍호흉배(雙虎胸背)와 단호흉배(單虎胸背)는 조선 말기의 제도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무관의 흉배로  호랑이의 줄무늬가 아니라 표범의 점박이무늬로 묘사되어 있다. 고종대에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로 규정되었지만 1784년에 그려진 〈이주국 초상〉, 19세기 초의 〈신홍주 초상〉, 1870년의〈신헌 초상〉, 19세기 말의〈신정희 초상〉 등을 볼 때, 적어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는 이 제도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관의 흉배는 대체로 호흉배(虎胸背)라고 부르고, 표범의 무늬를 묘사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처럼 같은 시기에 같은 품계의 무관초상화에서 흉배가 통일되지 않고 다양한 변형이 혼재할 수밖에 없는 배경으로는 조선 후기가 되면 무관의 역할이나 비중이 줄어들고 18세기 이후로 새로운 무관초상화가 제작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과거의 공신화상이 모사되거나 새롭게 제작된 것을 들 수있다. 이모본을 제작할 때 원본을 그대로 그리는 경우도 있으나, 살아생전에 가장 높은 품계나 문관의 관직, 추증(追贈)된 품계에 맞추어 이모본을 제작했을 것으로 보이며 다양한 시기에 여러 화가들이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화법이나 기법뿐만 아니라 도상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흉배제도는 혼란스러웠고, 특히 무관은 유행이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보이기에 무관초상화의 원본, 이모본, 후대본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흉배뿐만 아니라 작품의 양식, 도상, 화풍 등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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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3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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