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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12. 옛 그림의 새 식구가 된 초상화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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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상화
1979년10월25일-12월16일

사람의 기억은 몇 살 때부터 시작되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집안의 기억은 대략 고조부까지가 한계인 듯하다. 그래서 고조부까지는 각자 집안에서 제사를 모시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종중(宗中)에서 시제(時祭)라고 해서 시조에서 5대조 이상의 제사를 일년에 한번에 지내게 되는 데 이를 보아도 한 개인의 집안에 전해지는 기억이란 대개 고조부까지라고 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나라나 민족이 가지고 있는 집단기억의 상한은 어디까지인가. 역사 쪽에서는 대개 이를 2백 년 전후 정도라고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조선 시대라고 말하면서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제도가 되든 풍습이 되든 대개 2백 년 전의 일을 연상하면서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2백 년 전 조선 사람의 모습은 어땠는가’라고도 물어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답하기가 쉽지 않다. 1979년 10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의 최순우 관장은 매우 맛깔스러운 말로 2백 년 전 조상의 모습을 글로 그려 보인 적이 있다. 그는 ‘도량 있고 깔끔하고 슬기롭고 또 염치와 지조를 분명히 가리던 분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했다.
이런 말로 한국인의 조상을 묘사하게 된 것은 그해 10월25일에 ‘한국의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시대 초상화특별전’이 개막된 때문이다. 한국은 일찍부터 초상화의 나라로 불렸다. 유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일찍부터 조상숭배의 정신이 자리 잡았고 또 사회 제도의 하나로 집안마다 사당을 세우고 그 사당에 조상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초상화의 수는 과장해서 집안 숫자만큼 많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초상화의 수요에 응하기 위해 수많은 화가들이 초상화 제작에 종사했으며 후기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직업 화가뿐만 아니라 문인 화가도 초상화를 그리는 데에 이르렀다.

따라서 조선 그림 전체를 놓고 보면 초상화는 적잖은 비중과 분량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왕에 대한 경모와 조상 숭배의 정신에서 그려졌다는 이유로 좀처럼 미술사의 연구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는 서양 초상화가 일찍부터 미술의 주요 장르의 하나로 여겨진 것에 비하면 동양과 서양과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동양에서 그림은 감상화 위주로 논의가 되어온 전통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미술 자료(?)가 전해지고 있음에도 초상화는 본격적인 논의 대상에서 밀려나 있었는데 비로소 1979년 들어 사정에 대해 이의(異義)를 제기하면서 초상화도 조선시대의 귀중한 그림 유산이며 근대적 방법론을 통한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반에 알린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에 ‘초상화에 보다 정식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싹튼 것은 의아해하겠지만 1970년 초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영향도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근현대화를 위해 시작된 일종의 지역사회개발운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농촌사회에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오래된 관습이나 전통의 일부는 근현대화를 위해 한번쯤 극복해야 할 대상처럼 여겨지게 됐다. 그래서 우선 눈에 보이는 대로 대대로 내려오면서 계속 쓰고 사용하고 있던 집기, 가구, 도구들이 폐기처분되고 또 대체되면서 고물상에 팔려나갔다. 1970년대 서울 인사동의 고미술, 골동 시장이 역사적인 활황을 보인 것은 다분히 이런 배경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53 이채(1745-1820) 초상, 1807년 견본채색 58x99.2cm 
61 이재관 필 강이오(1788-1857) 초상, 19세기 견본채색 40.3x63.9cm 

이때 초상화도 문제가 됐다. 가정의례의 간소화 정책에 따라 번거로운 제사가 축소되면서 덩달아 모시고 있는 초상화의 처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제 아무리 새마을운동의 구호가 사회를 휩쓴다고 해도 조상님의 초상화인 만큼 쉽게 처분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당시 한가지 대안으로 일부 집안에서 박물관에의 기증과 기탁을 생각해냈다. 그래서 이 무렵 실제로 박물관에는 계속해서 초상화 기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시가 기획될 무렵에 박물관에 소장된 초상화는 200폭에 이르렀다. 또 이렇게 사회적으로 각 집안의 초상화의 노출이 늘어나면서 학계에서도 초상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나고 있었다. 

‘한국의 초상화’ 특별전은 이런 가운데 열리면서 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180여 점이 일거에 공개됐다. 이는 소장 유물 가운데 보수, 수리가 필요한 것 정도만 제외하고 거의 총출동하다시피 한 것이데 80점이 족자로 된 전신상 내지는 반신상이었고 나머지 100여 점은 화첩 등에 들어있는 흉상이었다.


주세붕(1495-1554) 초상, 16세기 견본채색 149x82.2cm 


傳조말생(1370-1447) 초상, 15세기 견본채색 104.3x178.8cm


무학대사(1327-1405) 초상, 조선후기 이모 견본채색 79x112cm 


초상화의 주인공에 따른 분류로 보면 1900년경에 새로 그려진 영조의 상을 비롯해 문신, 학자, 선비의 초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그 외에 3점의 무인 초상, 4점의 승려 초상 그리고 2점의 여인 초상이 포함됐다. 그리고 외국 화가가 조선의 인물을 그린 그림으로 원나라 화가인 진감여가 그린 이제현 초상과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 막부 어용화사인 가노 나오노부(狩野尙信)가 그린 조태억 초상도 소개됐다.


진감여 필 이제현(1287-1367) 초상, 14세기 견본채색 93x177.3cm 


가노 쓰네노부 필 조태억(1675-1728) 초상, 1709경 종이에 채색 49x97.5cm 


이렇게 소개된 초상화들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초상화의 나라라고 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의 초상이 극도로 적은 점이다. 또 여인 초상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선 왕의 초상을 보면 고려 때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조선은 태조 때부터 어진을 그린 것으로 전한다. 하나만 그린 것이 아니라 전신상, 반신상, 기마상 등 20여 종에 이르도록 다양하게 그렸다. 뿐만 아니라 부본(副本)도 여러 개를 만들어 각 지방에 보내 모시게 했다. 오늘날 지방 관공서에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는 것과 같은 용도인데 이렇게 많이 그려진 조선 왕의 초상은 두 번의 재난으로 다 소실되고 말았다. 첫 번째는 임진왜란 때로 이때 한양에 어진을 모신 준원전, 문소전 등의 전각이 불타면서 조선전기, 중기의 어진이 모두 불타 버렸다. 두 번째는 한국전쟁 때로 이때 궤멸적인 피해를 당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소실된 어진을 다시 그린 것도 포함해 이 당시만 해도 많은 어진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전쟁 중에 준원전이 피난 가 있던 부산 용두산 창고에 화재가 일어나 몽땅 불타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있던 태조 어진과 영조 어진 그리고 반쯤 불탄 정조의 세자시절 초상에 불과하게 됐다.


영조(1694-1776) 어진. 1900년 이모 견본채색 68x110cm    


조선이 초상화의 나라가 된 데에는 이런 어진 제작 외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즉 나라에 공을 세운 이른바 공신(功臣) 초상화를 대거 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공신 초상화를 사대부 집안에서 앞다투어 본받으면서 초상화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진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태조 어진을 그리면서 신의(神懿)왕후의 진영(眞影)을 함께 그렸다고 했다. 이는 태조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역대 왕비 그리고 비빈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하는데 이들 궁중 여인의 초상은 따로 문소전 등에 모셨다. 그래서 당시 사대부들 역시 초상화를 그릴 때 부인상도 함께 그리는 것이 관례였다. 전시에 나온 조반(趙胖 1341-1401) 부인상은 조반 초상과 함께 그려진 것이다. 이렇게 사대부 집안에서 부인상을 함께 그리는 관례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가 재건되는 과정에서 남성 중심의 친족제도가 새로 도입되면서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남녀 동등하게 배분되던 재산 상속이 장자 중심으로 바뀌었고 또 족보를 비롯한 모든 제도가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여성 초상은 매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려지지 않게 됐다.


조반 부인 초상, 조선후기 이모 견본채색 91x71.4cm  


이 전시는 집안으로 보면 새 가족이 생겨 주민등록에 새로 이름을 올린 것에 비유될 정도로 뜻깊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미술 애호가나 세상에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박물관 측에서는 섭섭할 수 있었으나 세상의 관심이 더 큰 일에 온통 쏠려 있었다. 
전시가 오픈하고 난 다음 날 밤, 박물관 당직자는 한밤중에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탕탕탕’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가 들은 총소리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고 청와대 경호원들이 살해되는 총소리였다. 이날 공교롭게 박물관 직원 한 사람이 신혼 집들이를 했는데 그 자리에는 공무원 어학연수를 통해 알게 된 청와대 경호원 한 사람도 초대됐다. 당초 그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으나 다행히 근무를 조정하게 돼 집들이에 왔는데 대신 근무를 했던 사람이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이게 말할 것도 없이 10.26 사건이고 그리고 전시 폐막을 며칠 앞둔 12월12일에도 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을 체포한 12.12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의 총소리는 한남동 쪽에서 들렸으나 어쨌든 이런 일이 연거푸 일어나면서 전시는 그야말로 세간 사람 아무도 신경을 쓸지 못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전시는 어수선한 시기에 불운한 성적을 낸 채 끝이 났는데 관내에서는 당시 ‘사당에 모셔 있던 초상화를 전시에 내걸은 때문이 아닌가’하는 말까지 있었다.

그런 말을 했어도 죽은 대통령은 실상 박물관으로 보면 이후의 어느 대통령보다 박물관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됐다. 덕수궁 시절이지만 1971년 봄에 있었던 호암 이병철 회장 수집 한국미술품전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에도 그는 여러 번 박물관에 찾았다. 우선 경복궁 새 박물관의 경우는 개관 테이프를 직접 끊었고 1977년의 신안해저 문화재의 특별공개 때도 박물관을 찾았다.

그리고 지방에 국립박물관을 짓는 결정도 여러 번 내렸다. 1971년 무녕왕릉 발굴이후 유물의 보존과 전시를 위해 공주 분관을 공주박물관으로 격상시켰고 1975년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신관을 새로 지었으며 1978년에는 국립광주박물관을 새로 개관했다. 그리고 이런 지방박물관의 개관 행사 때에도 꼭 참가해 치사를 하기도 했다.

그와 박물관의 인연 중에 박물관 학예원들이 특별히 잊지 못할 일은 초상화전이 열리던 바로 그해에 실시된 특별조치로 학예원들의 봉급을 인상시켜준 일이다. 78년의 일인데 어느 자리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안 해저유물발굴 등으로 격무에 쫓기는 ‘박물관 학예원들 월급이 초등학교 교사만도 못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가 바로 월급을 인상해주라고 조치한 것인데 이는 박물관 학예실에만 전해오는 그와 관련된 에피스드 중 하나이다.
초상화 전시는 이렇게 일반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이 특별전을 계기로 초상화 연구가 착실히 결실을 맺었다. 전시 다음 해인 1980년에 조선미 前성균관대 교수가 ‘조선왕조 시대의 초상화 연구’란 타이틀로 해당 분야의 국내 첫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또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도 심화되면서 조선 시대의 초상화 기법을 현대에 적용시켜 자신의 회화 세계를 일군 화가들도 잇달아 나오게 됐다.   


이장오(1714-?) 초본, 18세기 종이에 먹 50x32.9cm 


그리고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양적으로 많기도 하지만 이른바 정신세계까지 그리려 했다는 문인 사대부들의 초상은 이후 조선시대 미술이 가진 정신성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자료서 이후 전시는 물론 책에서도 단골로 소개되기에 이르렀다.(y)     
 
이원복, 윤철규 관리자
업데이트 2020.04.06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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