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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8. 서비스 정신 충만했던 미공개 회화의 특별소개 - 한국회화: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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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회화: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
1977년 4월20일-5월29일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 도록 『한국회화』


새삼 ‘나라의 격이 어떻다저떻다’를 따지는 시국이 됐지만 한편으로는 ‘나라의 틀이 갖춰진 게 언제부터인데’라는 감회도 없지 않다.
이런 얘기를 하면 당연히 ‘라테 같은 소리’라는 말을 듣겠지만 구청이나 동사무소에 가서 서류 하나 떼는 데에도 으레 급행료를 주어야 했고 또 싸이카를 타는 교통순경이 잠시 쉬면서 긴 가죽 장화를 벗을 때면 장화 틈 사이로 세 번 접힌 지폐가 우수수 떨어지던 일을 70년대 후반, 아니 80년대 초까지 무시로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모두 없는 돈에 살기에 바빠서 발버둥쳐야 했기 시절이기에 그런 일은 동사무소나 싸이카 경찰에게만이 아니라 사회 도처에 비일비재했다. 나라 전체가 틀이 갖춰지기 이전으로 어디를 보아도 정상 이전 내지는 미정리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 무렵인 1977년 새봄, 대학에 새로 들어간 한 신입생이 ‘자, 이제 사회의 예비 지성이 되었으니 다방면의 책을 읽어 교양과 지식을 쌓아보자’라는 기특한 마음을 먹고 혹시 한국미술에 관한 책을 읽자고 했다면 주변에서 그가 구해 볼 수 있는 책으로 무엇이 있었을까.
1995년에 한국미술연구소(소장 홍선표)에서는 일제가 우리 문화에 관심을 보인 1890년부터 책을 내기 직전인 1994년까지 한국미술에 관해 공식적으로 간행된 모든 서적, 도록, 논문들을 한데 정리한 『한국미술사 논저목록』을 펴냈다. 여기를 보면 77학번의 대학 신입생이 당시 서점에 가서 마주쳤을 법한 책 의 제목이 다 나와 있다.
전후 베이이붐 세대인 그에게 60년 이전 기억이 희박할 것이므로 제외한다 하더라도 넉넉잡아 61년부터 치자고 해도 그가 찾아볼 수 있는 한국미술 책은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경성 『한국미술사』(문고판, 교육문화사 1962), 김원룡 『한국미술사』(범우사 1968), 황호근 『한국의 미』(문고판, 을유문화사 1970), 조자룡 『한얼의 미술』(에밀레미술관 1971), 김원룡 『한국미술소사』(문고판, 삼성문화재단 1973), 김재원 외 『한국미술』(탐구당 1973), 박용숙 『한국미술론』(일지사 1975). 여기에 ‘등등’이란 말을 더 쓸 수 없는 까닭은 『한국미술사 논저목록』에 나온 목록이 이 7권이 전부인 때문이다.
혹시 그가 ‘한국미술은 범위가 너무 넓어서 곤란하니 회화, 즉 그림에 관한 책만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면 선택지는 더욱 줄어든다. 1977년 이전까지 나온 한국회화에 관한 책은 이동주가 70년대 들어 차례로 쓴 『한국회화 소사』(서문문고 1972), 『일본 속의 한화(韓畵)』(서문당 1974), 『우리나라의 옛그림』(박영사 1975)의 3권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그림이 큼직하게 실려 있는 한국미술에 관한 도록은 어떤가. 당시 볼 수 있는 도록은 딱 한 종류였다. 동화출판공사가 1973년부터 75년까지 전15권에 걸쳐 펴낸 『한국미술전집』이 있다. 이 전집은 원시미술에서 근대회화까지 모두 다뤘는데 한국의 전통회화는 제12권 한 권에서 다뤘다.
근래까지 인기가 높았던 중앙일보사에서 펴낸 『한국의 미』 시리즈(전24권)는 1977년 11월이 되서야 첫 권으로 『겸재 정선』편이 나왔다. 그리고 『한국의 미』 시리즈만큼 많이 팔렸던 예경출판사의 『국보』 시리즈(전16권)은 그보다 한 참 뒤인 1983년에 비로소 출판되기 시작됐다. 그 외에 조선시대 그림에 관한 도록을 더 찾아본다고 해도 국립박물관에서 70년대 들어 전시하면서 펴낸 전시 도록이 한두 권 있을 정도이다.
이런 사정을 알고서 그 기특한 마음의 77학번 신입생이 그 후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여기서 논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 학생이 마주쳤던 현실처럼 1977년 봄 당시 한국미술이나 한국회화에 대한 자료와 책은 극히 미미했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계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처럼 미술에 관해 관련 책과 전시를 나란히 놓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는 그처럼 책도 없었고 또 전시 역시 드문드문 별로 볼 것이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박물관에서 미술애호가와 연구자(70년대 들어 서울대와 홍대에서 미술사 전공의 석박사 연구과정이 개설됐다)들을 위해 대폭 서비스 정신을 발휘해 개최한 전시가 1977년 4월20일부터 50일간 열린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특별전』이라고 했지만 원래 타이틀은 『한국회화』이고 부제가 ‘국립중앙박물관소장 미공개회화 특별전’이다. 부제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 전시는 그동안 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하지 못했던 그리고 안 했던 그림들을 대거 꺼내 소개한 전시였다.
당시 최순우 관장은 초대의 글에서 전시의 의의를 이렇게 썼다. “박물관이 소장하는 한국회화는 총수가 근 5,000점이나 된다. 그중에서 평소에 전시하고 있는 수는 전시실의 제약 때문에 불과 100점을 넘지 못한다. 때때로 그림을 바꾸어 걸어 왔지만 그 수는 미미해서 회화사의 연구자나 이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의 새로운 자료에 대한 희구(希求)를 좀처럼 채워주지는 못했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 도록을 살펴봐도 거의 같은 그림들이 다루어져 왔으며 좋은 한국 그림은 그저 이 정도인가 하는 착각을 갖게도 했다.”
그의 말 대로라면 이 전시는, 80년대 민주화 시대식 용어이기는 하지만 이른바 ‘시각 교정용’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 그림의 캐퍼나 다이버시티가 몇 안 되는 책에 반복되어 실리는 흑백 도판의 수준 정도가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것은 본의가 아니고 실은 그보다 훨씬 많고 다양한 그림들이 있으므로 기존의 생각이나 선입견을 바꾸어 보십시오’라고 하면서 만든 전시인 것이다.
그래서 수장고 깊숙이 들어있던 소장품을 대거 꺼내 보여주게 됐는데 이렇게 해서 평소 100점 안팎이 걸리던 전시실에 각 장르를 망라한 그림 232점이 내걸리게 됐다.

만일 일부 삐딱한 호사가가 있어 ‘그렇다면 그동안 박물관은 무엇을 했냐’고 하며 박물관의 어떤 고의성이나 혹은 나태(懶怠)를 윽박지를 여지가 생길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최 관장은 사전에 예상이라도 한 듯 다음과 같은 취지의 변명 아닌 사과의 말을 곁들였다. 즉 소장품 중에는 옛 족자가 헐어서 내놓기가 어려운 작품들이 있으며 그리고 족자조차 되어있지 않는 작품들도 적지 않고 또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당한 보수 없이는 전시할 수 없는 작품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박물관 내부에서는 이 전시에 관한 첫 번째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이래 거의 3년이 걸려 문제성 그림 중에서 출품 가능작 그리고 수리 가능작을 선정한 뒤에 선을 보이게 됐다. 이들은 말 그대로 미공개작이었고 개중에는 개별 작품에 관한 연구가 미흡한 것도 포함돼 있으나 사계의 연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가급적 장르별로 묶고 또 같은 장르 속에서도 비슷한 작품끼리 묶어 일반에게는 비교 감상이 가능하고 연구자들에게는 연구자료가 될 작품들을 출품했다. 당시 정리된 출품작의 장르 구분은 다음과 같다.

- 수렵 3점
- 산수 116점
- 산수풍속 12점
- 사군자 17점
- 영모 22점
- 어해초충 11점
- 동물 10점
- 도석인물 14점
- 서상(瑞祥) 장식 3점
- 연례(宴禮) 행렬 8점
- 초상 6점

이 전시의 도록은 새로 보고 또 내용이 풍부한 그림이어서 인기가 높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조선중기의 화원화가 한시각이 그린 <북새선은도>가 쓰였다. <북새선은도>는 병자호란 이후에 북방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길주에서 문무과의 과거시험을 치르고 함흥에서 합격 발표회를 가진 내용을 그린 것으로 길이 6미터가 훨씬 넘는 대작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그린 그림으로 유일할 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세부 묘사로도 유명한데 당시만 해도 이 그림이 어떤 연유로 제작됐는가는 다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80년 후반에 이태호 교수가 정식으로 논문으로 다루면서 사실적인 묘사 내용은 물론 당시 과거를 주관한 시험관 그리고 그를 통해 현장에 가지는 않았지만 실력 있는 화원 한시각에게 그림을 주문하게 됐다는 내용 등이 새롭게 밝혀졌다.

도록의 표지그림부터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전시에 나온 그림 대부분은 처음 소개된 것들이어서 그림 애호가나 연구자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그중에서 나중에까지 화제가 됐던 하이라이트 그림을 몇몇을 소개하면 우선 거론할 것이 <염소 그림>이다. 이는 고려의 그림 잘 그렸던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양 그림>과 필치가 닮은 데가 있어 시대가 매우 올라가는 것으로 손꼽힌다. 박물관에는 이 그림 외에도 염소를 그린 그림이 더 있어 내부에서는 원래는 긴 두루마리 그림이 잘라진 채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이때 처음 소개했다. 그리고 이 그림과 관련해 이왕가박물관 때부터 공민왕 그림으로 전하는 <수렵도> 단편이 2점도 소개했다. 이들 그림은 응당 보수를 거쳤지만 원래 훼손이 심해 흑백도판의 사진만 봐서는 내용이 확인조차 힘들 지경이다.


작자미상 <염소> 16-16세기 견본채색 33.4x23.5cm 


아무튼 이 전시는 공민왕과 관련이 있는 그림부터 시작된 셈이어서 기획을 한 박물관 측에서는 고려말 내지는 조선 초부터 안중식이 나오는 근대까지의 한국회화의 주요 시기 전부를 커버하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그림은 그림 속에 낙관, 인장이 거의 없고 또 전해 내려오는 정보도 없으며 그 위에 대부분 소품이어서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 한눈에 보아도 조선 후기의 눈에 익은 필치와는 어딘가 달라 보이는 고풍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산수 인물화 두 점도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 그림에 대해 박물관에서는 조심스럽게 17세기라고 표시를 했는데 아마도 그보다는 시기가 더 올라갈 수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 근래의 해석이다.


작자미상 <산수> 견본채색 28.3x20.2cm 


정선 <직절당> 견본수묵 23.6x18.2cm


미공개 회화라고는 했어도 유명화가의 그림이 모두 제외된 것은 아니다. 그중에 겸재 정선을 보면 그의 그림은 당시에도 인기가 매우 높아 전시가 있을 때마다 대작을 중심으로 자주 소개가 됐었다. 그래서 이 전시에는 그야말로 박물관 사람들만 보았던 그림 중심으로 몇 점이 소개됐다. 그 중 하나인 소품 <직절당(直節堂)>은 어느 행궁 건물을 그린 듯한데 지금까지 어느 곳의 실경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겸재의 진경 화풍이 물씬한 그림이다. 또 동진의 시인 도연명의 유명 시구 ‘동리채국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를 소재로 한 부채 그림 3점이 소개됐고 그 외에 겸재 그림으로는 이색적이랄 수 있게, 물 한 가운데에 거룻배 한 척만 깔끔하게 그린 <행선도(行船圖)>가 나와 겸재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정선 <행선> 선면 지본담채 길이 63.9cm 


겸재 시대에 그와 라이벌 격인 공재 윤두서의 그림도 여러 점이 소개됐는데 요즘 그가 그린 그림으로 완전히 굳어진 <진단타려>는 당시만 해도 아직 연구 미비로 ‘전(傳) 윤두서 그림’으로 소개됐다. 윤두서와 관련해서는 그의 그림을 후대 화가가 판박이처럼 똑같이 그린 그림이 소개돼 관람객의 탄성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영조시대의 관상감 하급관리이자 그림이 일가견이 있었던 강희언이 그린 <석공>으로 이 그림은 18세기 후반의 대수장가 김광국이 남긴 수집 화첩 중 하나인 《화원별집》에 들었던 것으로 이때 처음 공개됐다.


조영석 <淸遊> 선면 지본수묵 21.8x60cm  갑인춘사 


또 겸재와 관련 있는 화가로 그의 후배인 문인 화가 조영석의 그림은 요즘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이 아닌데 그가 만년인 1744년에 그린 작은 부채 그림 하나가 나와 눈길을 끌었다. 그림 내용은 문인 화가다운 소재로 동자 하나를 데리고 개울 건너 산길을 소요하는 고사 한 사람을 그린 것이다. 


이인상 <검선> 지본담채 96.7x61.8cm


그리고 또 그 무렵의 문인화가로 이인상이 그린 <검선도>도 나왔다. 이 그림에는 ‘중국 사람이 그린 검선도를 본떠 그렸다’고 한 그가 쓴 화제가 있지만 그와 무관하게 선만 사용한 것 같은 간결한 필치에 옅은 채색이 곁들여진 이 그림은 조선후기 프라이드 센 문인 화가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큰 주목을 끌었다. 이인상은 20세기 말부터 인기가 급부상하는데 그의 그림 세계를 말할 때마다 이 그림은 마치 내면의 초상처럼 거론되면서 대표작으로 손꼽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풍속화는 일반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를 반영한 듯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 그림이 여럿 소개됐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일반적인 풍속화가 아니라 그가 중년의 나이 때 황해도 재령인가 평안도 안주인가에 목민관으로 부임하는 양반의 행차를 6m 넘는 두루마리에 그린 <안릉신영(安陵新迎)>이 나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그의 솜씨에 탄복하게끔 했다. 이 그림에는 수십 명의 기수와 복장을 갖춘 군교 그리고 악대, 아전, 집사 그리고 기생 등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이는 힘들게 그린 것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보고 슬렁슬렁 베낀 것처럼도 보여 서양음악의 위대한 천재 모차르트는 머릿속에 악보가 다 들어있어서 생각나면 그것을 그대로 오선지에 옮겨 베꼈다는 식의 비유를 해볼만 할 정도이다.

풍속화가로는 김홍도보다 한세대 아래인 신윤복의 그림도 나왔는데 그가 그린 여속(女俗) 풍속화는 대표작은 모두 간송미술관에 있어 대신 산수인물화이면서 풍속적 내용이 든 그림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기려도교(騎驢渡橋)>와 소나무 그늘 아래서의 연회를 그린 <야연(野宴)>이 소개됐다. 이 두 그림의 산의 능선과 나무 표현에는 김홍도 필치가 물신해 새삼 그가 김홍도 제자임을 확인케 해주었다.


김홍도 <안릉신영> 지본담채 25.5x53cm 


이 전시에는 풍속화로서 작가 미상의 <화성능행도> 한 폭(병풍 중 일부)과 19세기 들어 많이 그려진 진찬의궤도 병풍 한 폭도 선을 보였다. 이런 행사 풍속화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주로 병풍으로 그리던 평생도를 화첩 형식으로 그린 <회혼례도>가 나와 새로운 자료로서 큰 주목을 끌었다. 특히 이 그림은 자세히 보면 대청에 둘러친 병풍 속에 수묵 산수화가 또 그려져 있어 이른바 ‘그림 속 그림’이 들어있어 일반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작자미상 <회혼례> 견본채색 33.5x45.5cm 


이렇게 흥미로운 작품들이 대거 출품된 이 전시는 큰 인기 속에 5월 29일 막을 내렸는데 당시 박물관 신문을 보면 총관람객으로 10만 여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의 하루에 2만 명이 다녀간 것이 되는데 이는 당시의 박물관 전시의 호응도나 관심도로 볼 때는 ‘대박’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다고 당시만 해도 미술사 연구가 일천해 지금으로 보면 다소 성급한 판단에 의한 출품도 몇몇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면 16세기 중엽의 그림으로 소개된 고오(古吳)라는 호의 허구서(許九敍)가 그린 산수화 한 점을 꼽을 수 있다. 허구서는 조선시대 화가로서는 매우 낯선데 그림 산과 계곡이 S자로 꺾이면서 그림 안쪽으로 물러나면서 깊이감을 주면서 경물과 소재가 복잡하게 연결된 이른바 중국풍 그림이다. 그림에는 ‘가정31년(1552)에 원나라 화가 황공망의 그림을 본떠 그렸다’라는 화제가 써 있어 이를 염두에 두고 16세기 중엽 그림이라고 했지만 나중에 이 그림은 조선 그림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 중기의 그림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훗날 제9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했던 미술사학자 김홍남 교수가 정식 논문을 써서 밝혀냈다. 


허구서의 <산수>로 명제된 그림. 견본채색 107x31.8cm 


이런 작은 흠이 있었기는 해도 전시는 애초부터 애호가와 연구자들에게 더 풍부한 작품과 자료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열렸기에 당시까지의 전시 도록에도 신경을 써서 박물관 전시도록 사상 처음으로 각 작품의 화제를 별도로 실었고 또 권말에는 주요 화가의 그림에 보이는 인장과 낙관 부분을 확대한 사실을 별도로 실었다.


이런 서비스 정신으로 인해 이 전시는 1977년 봄에 애호가, 연구자 외에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기울이며 하루에 2만 명씩 전시장을 찾는 대히트 전시가 되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0.06.04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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