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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6.‘시민사회와 함께’라는 새 전통 만든 첫 대규모 기증 - 박병래수집 이조백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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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래수집 이조백자전
1974년 5월28일-6월30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나와 튀르리 공원을 걷다가 오른쪽으로 센 강에 걸쳐있는 철제아치식 도보교인 솔페리노 다리를 건너면 또 나오는 곳이 오르세 미술관이다. 오르세는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인상파 미술의 성지이다. 이곳은 80년대 후반 파리 시내 여러 국공립 미술관, 박물관에 흩어져 있던 인상파 컬렉션이 한데 모이면서 탄생했다. 이때 루브르에 있던 인상파 걸작도 오르세에 이관됐는데 그 핵심을 이룬 것이 이삭 드 카몽드(1851-1911)의 컬렉션이었다. 은행가 출신으로 문화, 예술을 사랑했던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친구들회’의 설립을 주도했고 초대회장을 지냈다. 평생 독신이었던 그는 죽기 전 자신이 모은 회화, 조각, 미술공예품 750점을 루브르에 전부 기증했는데 거기에 인상파 그림이 다수 들어있었다.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드가의 <압상트>, 르노와르의 <빗질 하는 여인>,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 그의 컬렉션에 들어있던 159점의 인상파 작품은 개관 이후 오르세가 자랑하는 보물이 됐다.  

파리의 유명미술관 컬렉션은 이렇게 개인의 기증으로 이뤄진 것이 많다. 동양미술로 유명한 기메 미술관의 자랑인 6천여 점에 달하는 중국도자기 컬렉션 역시 에르네스트 그랑디디에(1833-1912)의 기증을 통해 이뤄졌다. 민간의 기증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은 프랑스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대개 어느 나라든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는 곳이라면 늘 있는 일이다. 근대 이전의 왕가 컬렉션과 무관하게 순전히 시민들의 발의로 설립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역시 1870년 개관 이후 수많은 기증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트로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컬렉션이랄 수 있다. 전세계 35점 밖에 없다는 베르메르 그림은 메트로에 5점이나 있다. 그의 고국 네덜란드의 국립박물관에도 4점밖에 없다. 이들은 헨리 마퀸드, 콜리스 헌팅턴, 벤자민 알트만, 찰스 라이트먼(2점)과 같은 사업가, 은행가들이 차례로 기증한 것들이다. 그 외에도 메트로를 메트로답게 만든 기증자에는 존 록펠러 가문, 설탕왕 헨리 헤브마이어, JP모건의 설립자와 리먼 브러더스 설립자의 각각 아들인 존 피어폰트 모건, 로버트 리먼 등 쟁쟁한 인물들이 줄을 잇는다.

이처럼 세계 어디든지 소위 ‘문화, 예술, 학문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조)’으로 하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이라면 그 책임을 官에만 의존하지 않고 민간이 함께 공유하면서 나란히 이를 이끌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한국은 왜곡된 근대사 속에서 근대사회 자체가 외부에서 이식됨으로써 스스로 필요에 따라 박물관을 가꾸는 일이 한참 늦었다.

그렇기는 해도 시작이 있었고 그 출발은 스마트했다고 할 수 있다. 1974년 5월28일 국립박물관에서 <박병래수집 이조백자>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 제목만 보면 박병래라는 분이 수집한 조선백자(당시까지는 조선보다는 이조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를 소개하는 전시로 들리겠지만 이는 단순 소개전시가 아니라 기증한 컬렉션을 일반에 공개하는 이른바 기증 보고전(報告展)이라고 할 수 있다.


도록 표지


사무적으로 ‘박병래 수집’이란 말을 썼으나 그는 그 무렵 고미술계에서 ‘수정 선생’으로 통하던 구로토(玄人) 컬렉터의 한 사람이었다.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 1903-1974) 선생의 본래 직업은 의사.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 양정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전에 들어가 제1회로 졸업한 내과의사이다. 그후 1936년에 가톨릭 재단에서 성모병원을 설립하면서 초대원장의 책임이 맡겨졌는데 그는 모태 신앙자이기도 했다. 컬렉션은 그가 학교를 졸업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20대 후반에 시작됐다. 당시 조선에는 각 방면에 일본인에 나와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고위 관료나 사회 지도적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두 가지의 컬렉션 취미를 가지고 있던 때였다. 경성의전 주변에서도 그런 취향을 지닌 의사, 교수들이 많이 있어 자연히 그 영향을 받으면서 수집을 시작했다.


아무튼 이렇게 기증 보고전이 열렸는데 잘 알다시피 국립박물관은 그 전신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왕가박물관 그리고 총독부박물관에 이른다. 이 두 박물관이 설립될 때 앞서 소개한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조와 같은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고미술 수집 경향과 감상 취향으로 보면 오늘날과 같은 컬렉션 구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서화는 별도로 치더라도 도자기를 보면 그 당시는 청자를 중시하는 이른바 청자 전성시대였다. 분청사기라고 해도 기껏해야 일본 다도에서 중시하는 미시마(三島)라고 불리는 인화문(印花文) 대접과 잔이 중심이었다. 그래서 두 박물관의 컬렉션을 이어받은 국립박물관의 도자기는 ‘청다백소(靑多白少)’ 즉 청자는 많고 백자는 수가 적은 이상 현상이 있었다. 그런 마당에 백자에 중점을 두어 평생 수집한 백자 컬렉션을 몽땅 기증한 것이니 박물관으로서는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수정 선생은 자신이 모은 것 중 집안에서 두고 볼 것 불과 몇 점을 제외하고 362점 모두를 기증했다. 이들은 분청사기 48점과 단 한 점의 청자를 제외하고 모두 백자로 그 숫자는 313점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중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고 224점을 추려 전시하게 된 것이다. 한 점 있는 청자는 당연히 제외됐는데 이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가장 귀하다는 화금(畵金)청자 잔이었다. 

어쨌든 전시를 통해 진면목이 소개된 수정 선생의 백자 컬렉션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우선 의사라고 해도 개업의가 아니라 병원 소속이었기 때문에 금전적 한계가 컬렉션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또 호를 수정(水晶)이라고 지어 쓴 것처럼 화려하고 거창하고 과장된 것보다는 어딘가 조선의 공예 정신과도 닿아있을 법한 담박하고 수수하면서 참하고 깨끗한 것들이 많았다. 그런 사정 겸 특징으로 인해 소개된 224점 중에 항아리나 주전자는 소수이고 대신 다양한 버라이어티를 자랑한 것은 연적, 접시, 병이었다. 연적은 가장 많아 56점이나 됐고 접시가 41점 그리고 병도 36점이 들어있었다.

연적 하이라이트는 재료 자체가 금보다 비쌌다는 진사(辰砂, 요즘 용어로는 산화동(酸化銅)이라고 한다)을 전체에 바르고 마주 보는 두 마리 학(鶴)만 살짝 여백으로 남겨 절묘한 적, 백(청백에 가깝다)의 콘트라스트를 이룬 <백자양각 쌍학문진사 사각연적>이다.


백자 진사양각 쌍학문 방형연적, 높이 5.4cm 길이 7.1cm 


수정 선생은 근대 수집가 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컬렉션 일화를 글로 적어 남긴 분이기도 한데 그는 당시 중앙일보에 ‘골동 40년’이란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은 나중에 ‘백자에의 향수’(심설당 간행)라는 타이틀로 단행본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여기에 보면 해방되기 여러 해 전인데 이 물건은 당초 골동에 욕심이 많았지만 값을 잘 깎는 장택상에게 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격의 일부를 물건으로 가져가라고 하자 부아가 난 일본인 상인이 도로 가지고 나와 자신에게 팔은 것이라고 했다. 당시 구입가격 4백원은 만만치 않았는데 백원 차이로 이를 놓친 장택상 씨는 해방후 외무장관이 되어서도 볼 때마다 ‘양도하시요’라고 졸랐다는 일화가 있는 물건이다. 


『백자에의 향수』 표지 


이 책에는 그가 수집을 시작한 계기도 나오는데 경성의전에 있을 때 일본인 교수 한 사람이 내지에 갔다 오면서(경성의전에는 실험용으로 죽은 동물들을 위해 일 년에 한번 절에 가서 제사를 올렸는데 이때는 오사카 남부 고야산에서 지냈다고 했다) 조선 도자기를 하나 사와 보여준 것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그게 어느 나라 것인지 몰라 망신스러운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분한 마음에 길 건너 창경궁의 이왕가박물관을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또 골동상인들도 찾아다녔는데 당시 아마이케(天池)라는 유명한 일본인 골동상을 만난 것이 자신의 골동 방향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뭐하러 골동을 모으냐’라고 하면서 골동을 모으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며 ‘하나는 연구를 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미를 위한 것이 있는데 어느 쪽이냐’라고 물었다고 했다. 그의 이 말은 나중까지 잊혀지지 않으면서 평생 마음을 즐겁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으로 골동을 수집하게 됐다고 한 것이다.

오늘날 취미라고 하면 간단히 들리겠지만 조선의 양반문화나 유교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던 그 무렵에는 여전히 취미는 사치이자 무용(無用)한 낭비로 여겨지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30원에 산 물건도 부친이 물어보면 3원에 샀다고 말하면서 자신만의 취미, 취향의 세계에 조심스럽게 들어갔는데 이런 초창기에 우연히 손에 넣어 평생을 가장 아낀 것이 전시 도록에서도 첫 번째로 실린 <청화백자 난초문 표형병>이다.


청화백자 난초문 표형병, 높이 21.1cm 보물 1058호


이는 전체가 호리병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아래쪽은 색다르게 육각으로 만들었는데 문양은 아래는 추초문(秋草文)을 그렸고 위는 상서로운 팔보문을 넣었다. 태토의 색도 밝고 깨끗하며 그 위에 유려한 필치로 문양을 그려 넣어 한눈에 수준급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다분히 주머니에 돈을 넣고 시장부터 나간 것이 아니라 박물관 발걸음에 자주하고 또 골동상의 어드바이스를 경청하는 등 침착하고 사려 깊게 수집을 시작한 데서 나온 작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이 병은 나중에 보물1058호로 지정됐다)

접시는 산수문 접시가 일품으로 손꼽힌다. 그는 유난히 접시를 좋아해 다양한 문양을 여러 가지 수집했고 워낙 귀한 산수문 외에도 바탕 하나 가득 수초와 물고기가 그려진 어문(魚文) 접시 역시 일품급으로 봐도 손색이 없는 물건이다. 산수문은 접시에 당연히 귀하지만 항아리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양은 아니다.


청화백자 어문 접시, 지름 14.8cm,  청화백자 연어문 접시, 지름 13.9cm  


그의 수집품 중에 산수문 항아리를 대표하는 것이 <청화백자 산수매조죽문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아래에 연꽃잎을 추상화한 연판문을 돌렸고 주둥이 아래에는 청백 대비를 살린 여의두문을 둘렀다. 그리고 그 사이 몸체에 큰 꽃무늬로 된 창 두 개를 그리고 그 속에 각각 동정추월(洞庭秋月)과 강변송객(江邊送客) 같은 산수 이미지를 크게 그려 넣었다. 꽃무늬 창 사이에는 한쪽은 새가 앉은 매화, 다른 한쪽은 키가 큰 대나무를 그렸다. 말로 설명을 하더라도 이렇게 장황하게 될 만큼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 이 항아리는 당시부터 산수문 항아리로 장안에서 첫째 둘째를 손꼽히는 명작이었다.


청화백자 산수매조죽문 항아리, 높이 37.5cm 


수정 선생은 골동 수집을 회고하는 글에서 조선백자는 만지면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는데 보고 있어도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또다른 항아리가 <청화백자 화충매조죽문 항아리>이다. 이 항아리는 백토 속에 공기가 남아 구울 때 혹처럼 붉어진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하자에도 불구하고 이 항아리의 그림은 심상치 않은데 그림을 보면 아래쪽에 난초를 살짝 두르고 위에는 대나무, 매화, 새를 그렸다. 그런데 웬걸 난 잎위에 여치가 앉아있다. 조선 그림에 곤충을 그린 장르가 따로 있어 도자기에도 벌, 나비, 잠자리 등이 간혹 그려졌지만 여치를 그린 것은 이 항아리가 유일하다. 전시에 나온 항아리는 구연부가 두 군데나 크게 깨져 당시의 관행대로 은박으로 수리를 했다. 박물관에서 기증받은 이 수리 자국은 몸통 색과 같은 석고로 다시 보수를 했다. 


청화백자 매죽난조충문 항아리, 높이 27.8cm `


수집을 하다 보면 한때의 기분이나 감흥에 휩쓸려 자신이 주력하는 메인 장르 이외의 다른 것도 손에 가게 마련이다. 박물관에 준 청자도 그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는데 서화도 간혹 구해 즐겼다. 처음 수집을 할 때 당시 경성에는 중국 서화에 손을 대 한 재산을 모두 날린 윤 모씨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부친에게 애초부터 서화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도자기 파는 가게에 서화도 있기 마련이고 또 종종 곁에서 구경도 하게 돼 자연히 서화도 수집하게 됐다. 이 서화는 6.25때 피난 가면서 도자기와 함께 항아리에 넣고 땅속에 파묻고 갔는데 갔다 와 보니 습기로 모두 삭아버려 그 뒤로는 다시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도 집안에 걸어두고 볼만한 것들은 한둘 있었는데 그중 대표작이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이다. 이는 혹시 단원이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단원의 평소 이미지와 겹치는 걸작의 하나다. 이 그림은 수정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오랫동안 자택 벽에 걸려 있었는데 미망인이 나이가 많아지며 집안의 작은 볼거리를 정리할 때 몇 점 남은 도자기 소품과 함께 이우복 씨에게 전해졌다.


김홍도 <포의풍류> 1798년, 종이에 수묵담채, 27.9×37.0㎝, 개인


수정 선생이 박물관에 물건을 기증할 생각을 한 것은 전시가 열리기 훨씬 이전으로 71년 겨울 무렵이었다. 이때 기증 의사를 최순우 당시 미술과장에게 밝히며 그중에서 볼만한 것은 도록으로 만들어 도록과 함께 기증하겠다고 했다. 컬렉션이 박물관에 기증되고 전시 준비도 착착 진행되는 과정에 전시를 열흘 앞두고 도록이 나왔는데 불행히도 다음날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성대하게 오픈한 기증 전시를 정작 본인은 지켜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박물관이란 사회의 공적 기관에 개인 소장품을 기증해 관과 민의 두 바퀴가 협심해 굴러가는 곳이라는 유지를 세상에 전한 것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동원 이홍근 선생의 서화와 도자기 기증, 의사 이양선 박사의 토기, 금속공예품 기증, 김종학 화백의 조선목가구 기증, 유창종 전검사장의 와당(瓦當) 기증 등이 계속되면서 오늘날의 박물관 모습을 갖추게 됐다. 따라서 박병래 선생의 이조백자 전시는 시민사회가 박물관을 함께 가꾸는 주역이라는 점을 최초로 보여준 사건이며 동시에 새로운 전통을 만든 뜻깊은 전시라고 할 수 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0.02.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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