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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린의 전통공예 이야기] 12. 왕실의 도장을 지키는 자물쇠(鎖鑰匙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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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는 여러 용도의 함에는 물건을 담은 후 분실을 막기 위해 함을 단단하게 잠그는 자물쇠가 활용되었다. 자물쇠는 유동, 철, 백동 등으로 나누어 제작,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 함마다 정해진 제작재료와 규범을 철저하게 적용된 것이었다.
자물쇠의 표면에 문양을 음각하고 음각부분에 금이나 은을 넣어 장식한 입사장식 자물쇠는 주로 철로 제작된 자물쇠에서 확인된다. 철제입사장식자물쇠는 왕이나 왕비, 왕의 어머니인 대비,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와 아내인 세자빈의 인장인 금보(金寶)나 옥보(玉寶)를 담는 함(보록[寶盝], 인록[印盝])의 잠금장치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의궤와 유물들을 분석해보면 자물쇠는 왕실의 가장 높은 이들의 신분을 상징하고 중요 문서를 인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도장을 지키는 중요 구성물 중 하나였기 때문에, 최대한 규범에 맞춰 제작되었다.
또 최대한 견고하게 제작하기 위해 각 원료별로 불순물이 거의 함유되지 않고 품질의 등급이 높은 국내산 철(正鐵)과 금(金; 十品金), 은(純銀; 十品銀)을 자물쇠와 장식 재료로 사용했다. 왕실의 일상기물이나 민간 기물의 경우 전쟁 등 국내외 현안으로 인한 재료 수급상황에 따라 수급이 불가능할 경우 최대한 비슷한 것을 구해 유동적으로 사용했는데, 이 보인록의 자물쇠를 포함한 의례용품의 경우 이전부터 저장한 비축분을 포함한 원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려 애썼다. 실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2009년 박물관 소장 왕실 보인록함 자물쇠 222건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분조사에 따르면, 철, 금, 은 등 재료 모두 탄소와 같은 불순물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재료들을 사용했음이 파악되어 의궤 기록과 일치함이 확인되었다(국립고궁박물관, 『어보2: 보통, 보록』, 2009. pp. 735-792).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肅宗仁顯王后嘉禮都監儀軌)』의 보록의 형태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肅宗仁顯王后嘉禮都監儀軌)』의 호갑의 형태

보록과 인록은 백동이나 황동으로 만들어 그 안에 인장을 넣는 보통(寶筒), 인통(印筒), 그리고 보통과 인통을 담는 목제 함인 보록(寶盝)과 인록(印盝), 보록과 인록을 다시 한번 담는 호갑(護匣)으로 구성돼 겹겹이 함을 넣어 보호할 수 있게끔 고안되었다. 보록과 인록, 호갑은 나무로 제작한 후 그 위에 철갑상어와 같은 가죽을 감싼 후 칠을 해 내구성을 높였다. 철제입사자물쇠는 이 중 보록과 인록, 호갑의 잠금장치로 활용되었다.


<철종 금보 보록>,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입사장식은 자물쇠의 아래통과 위통, 측면의 속목창, 열쇠 끈목 위의 손잡이부분에 이뤄졌다. 의궤에는 입사를 한 자물쇠라는 의미로 금은교입사쇄약(金銀交入絲鎖鑰), 은금교입사쇄약(銀金交入絲鎖鑰), 은입사쇄약(銀入絲鎖鑰) 등으로 기록되어 다른 장식 기법을 사용한 자물쇠와 구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순도가 높고 입사에 용이하게 가공된 금과 은을 사용했으며, 의궤에 따라 자물쇠나 입사장식에 사용된 금과 은을 입사황금(入絲黃金), 입사천은(入絲天銀), 입사은자(入絲銀子)라고 재료명을 붙이기도 했다.
철로 제작이 된 까닭인지 대다수가 쪼음입사로 시문되었으며, 공역의 규모에 따라 최소 2개에서 존숭도감과 같이 3-4인의 왕실 웃어른이 존호를 받을 시에는 16개까지 제작되었다. 자물쇠의 위통과 밑면, 열쇠는 귀갑문이나 선문, 기하학문, 삿자리문으로 장식했고, 자물쇠 아랫통은 화당초문으로 장식했다. 의궤 중 국화문으로 장식했다는 기록이 간간히 보여 현재 연화당초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국당초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속목창은 선문, 기하학문, 운문, 연기문, 삿자리문 등으로 장식했다. 전반적으로 화당초문 이외에는 자물쇠마다 문양의 차이가 있어 당시 공역을 주도한 이들과 당대의 시대경향이 문양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인조 계비 장렬왕후 옥보 보록 자물쇠>, 17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숙종 계비 인현왕후 옥보 보록 자물쇠>, 17세기, 국립고궁박물관

하지만 18세기 이후에는 화당초문이 생략되고 파상선문이 반복적으로 시문되거나 당초문이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검약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던 영조대에는 자물쇠 대부분을 삿자리, 화당초문 등으로 화려하게 입사장식을 했던 것과 함께 정성왕후, 정순왕후 옥보의 보록 자물쇠, 열쇠 등 일부 자물쇠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선으로 자물쇠와 열쇠의 형태만 구획해 다른 유물들과 차이가 있다.


<영조 계비 정순왕후 옥보 보록 자물쇠>, 18세기 후반-19세기 초, 국립고궁박물관

또 의궤를 통해 보면 정조대(재위 1776-1800)에는 자물쇠의 제작을 도감 내 장인에게 맡기지 않고 별공작(別工作)에서 제작하게 하고, 도감에서는 입사시문만을 담당하게 해 작업을 분업화했다. 또, 자물쇠의 위계를 금속을 사람이 일일이 두들겨 형태를 만드는 타조(打造)와 거푸집을 이용해 주물 작업을 통해 뽑아내는 주성(鑄成)으로 제작 방법에 따라 구분하기도 했다. 화당초문이 생략되고 파상선문을 전면에 시문한 자물쇠도 이 때 본격적으로 등장하다가 순조대부터 도로 기존의 화당초문과 문양구조가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문양의 경향 변화 역시 정조대 시행했던 여러 제도 및 예제의 개편 및 정리 등과 같은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순조 금보 보록 자물쇠>, 19세기, 국립고궁박물관

이 외에도 의궤와 현전하는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 보록의물에 사용된 자물쇠와 열쇠의 다양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자물쇠와 열쇠를 포함한 이러한 국가 및 왕실의 의물은 국가의 기본 예제를 바탕으로 재료수급, 전란, 인력, 조형적 경향 등 다양한 당시의 시대상이 반영되어 제작되었다. 따라서 가장 변화에 경직된 공예품이지만 당시의 기본 이데올로기와 예제, 그리고 시대상에 따른 변화를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공예품이기도 하다. 의물의 구성으로 사용된 자물쇠와 열쇠 역시 마찬가지이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9.12.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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