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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體)를 내려놓고 격(格)을 얻은 거장 치바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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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 치바이스, 木匠에서 巨匠까지
전시 기간: 2017.7.31 - 10.08
전시 장소: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정치가 문화로 포장되는 일은 흔히 있다. 정상들의 만찬에 상대방 나라의 역사나 전통이 담겨있는 메뉴나 식재료를 내놓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 공연이나 전시로 포장해 변죽으로 울리거나 상대방의 의중을 떠보는 일도 많다.


<비파나무와 잠자리> 1948년 지본담채 103x34cm 호남성박물관 

근래 미국이 이란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자마자 이란은 팔레비 왕비가 수집한 서양의 근현대 미술품 컬렉션의 유럽 순회전을 기획했다. 피카소, 로드코 등 유명화가의 그림이 들어있는 이 컬렉션은 이슬람 혁명이후 꽁꽁 싸매져 서양에 일체 소개되지 않았는데 그것을 풀어놓는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피로국(披露國)은 이란과 동정적인 유럽 여론을 주도하는 독일이 꼽혔다. 이쯤 되면 삼척동자라도 의중이 뭐라는 것쯤은 짐작하게 마련이다. 

각설하고, 오는 24일 국교정상화 25주년을 맞는 한국과 중국 정부는 기념행사를 따로 갖기로 했다고 한다. 또 8월중으로 예정됐던 한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도 중국측이 거절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째서 인가는 자명할 뿐만 아니라 여기는 논할 자리도 아니므로 생략한다.


<병아리와 풀벌레> 약1940년 지본담채 78x33cm 호남성박물관 

그런 가운데 지난달 31일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중국의 자랑하는 국민화가 치바이스(齊白石) 전시가 개막됐다. 전시는 치바이스의 고향인 후난성(湖南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의 작품이 50여점 이상 소개되는 자리였다. 꽁꽁 얼었다고 할 만한 한중 관계 치고는 특별한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왜 특별한가는 치바이스는 단순한 일개 근대화가가 아니라 중국이,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아껴마지 않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치바이스에 다소 생소한 분들을 위해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는 중국근대서화가 가운데 미술시장에서 최고가의 그림 값을 기록한 화가이다. 2011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자더 경매에서 그가 그린 대작(266x100cm)이 무려 4억2550만 위안(당시 환율로 710억원 정도)에 낙찰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나팔꽃과 잠자리> 1947년 지본담채 94x56cm 호남성 박물관

좀 더 소개하면 늙은 소나무에 헌걸찬 매 한 마리가 올라앉은 이 그림의 양 옆에는 큰 글씨로 ‘인생장수 천하태평(人生長壽 天下太平)이라고 적혀있다. 치가 이를 그린 것은 1946년이다. 그때 그의 나이 86살이었다. 인생을 오래 사니 다시 천하가 태평해지는 것을 보게 돼 이 얼마나 기쁜가 하는 뜻이다.(그림의 동기에는 항일전쟁 승리 외에 장개석의 환갑 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 이름은 일찍부터 일본에도 유명했다. 그래서 베이징 점령시절 일본인들이 중국 사람을 앞세워 그림을 구하려 수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때 그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도적 되기는 싫고, 장안의 굶어죽은 귀신 추하지 않다네’라는 시를 읊으며 대문에는 ‘그림 팔지 않음’이라고 써 붙여놓았다고 한다. 그는 그림 이전에 국민의 화가, 중국의 화가로 대접받을 만한 행동을 충분히 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초대를 받았고 또 다음해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초대를 받아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치바이스는 중국에서 그런 화가이다.   


<인물> 중기 지본담채 129x45cm 호남성박물관

다시 전시 개막일로 돌아가면 그 자리에는 당연히 호남성문화청 청장이 주빈으로 초대됐다. 또한 주한 중국대사도 참석했다. 한마디 더 덧붙이면 호남성은 면적이 21만㎢에 이른다. 반면 한국은 9만8천㎢이다. 땅 크기의 비교 같은 조잔한 얘기는 별개로 하더라도 ‘정치가 문화고 문화가 정치’인 시대이고 더불어 한중관계가 땅땅 얼어붙은 시절임에도 한국의 문화부장관은 이 개막식에 끝내 참가하지 않았다. 아는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개막식 얘기는 이쯤 해두고 본격적으로 치바이스론으로 돌아가면 그는 호남성의 깡촌 출신이다. 가난한 살림을 도우려 그는 일찍부터 목 조각으로 입에 풀칠을 하게 됐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른바 노농(勞農) 출신으로 프롤레타리아 중의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할 수 있다.


<죽통> 약1880년 대나무 상담시제백석기념관

그림은 목 조각하다가 얻어걸린 낡은 화보집(청나라 초에 나온 『개자원화전』이다)을 몇 달을 걸쳐 베끼고 그 내용을 모조리 머리 속에 넣으면서 시작됐다. 그 무렵 해서 시도 당시(唐詩) 삼백수를 몽땅 외움으로서 자기 생각을 시로도 읊어낼 수 있게 됐다.

그 뒤에 그가 그린 것은 간략한 필치에 생활 주변에 널려있는 소재들이다. 말하자면 새우, 개구리, 병아리, 잠자리, 사마귀, 나팔꽃, 오이, 배추 같은 것들인데 이것만 그린 것이 아니라 이것에 관한 자기 생각, 기억 등을 자기식의 시로 읊어 함께 적었다.
 


<고주도해(孤舟渡海)> 중기 지본수묵 67.8x42.1cm 호남성박물관

이에 대해서는 문인화의 재해석이요, 재탄생이라며 신문인화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새 시대(20세기)에도 문인화 그리고 문인화가가 살아남길 바라는 사람들, 화가들의 바람이 반영된 바가 크다.(한국에서도 냉전 시대에 남몰래 그를 추종해 신문인화를 그린 사람들이 여러 대학에 다수 있다.) 

물론 그가 많이 그린 것 중에 매화와 연꽃 같은 문인화적 소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매화건 연꽃이건 대개 새우, 개구리, 잠자리와 함께 그렸다. 이런 미물, 하찮은 것들은 역사상 유명 문인화가들이 거의 쳐다보지 않았던 소재들이다.


<산수와 인물> 초기 지본수묵 124x60cm 호남성박물관

그보다는 그가 그린 것은 중국의 보통 사람, 흔히 말하는 민중들이 생활에서 느끼는 소박한 미적인 감각과 생각 그리고 마음을 그린 민중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동양화는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민중을 위해서 그리고 민중이 보고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을 느낄 만한 그림을 그려진 적이 없다. 치바이스는 붓과 먹으로 그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 개척한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 중에 ‘가난한 집 아이가 어른이 돼 세상에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이 프롤레타리아성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 위에 노력을 거듭했다. 


<새우> 1948년 지본수묵 99x34cm 호남성박물관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새우가 특히 유명하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 개울에서 새우에 찔리던 가난한 기억이 겹쳐있다. 그는 이런 새우를 수십 년 그린 뒤에 드디어 마음에 드는 새우가 그려졌다고 할 정도로 천착을 보였다. 그의 붓이 물 흐르듯이 흐르고 생각과 팔이 함께 움직이는 것같이 여겨지는 것은 이런 무진장한 시간의 퇴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는 여느 문인화가들처럼 산수화를 자주 그리지 않았다. 화훼화, 초충도에 비하면 손꼽을 정도이다. 몇 안 되는 그의 산수화임에도 그 곳에는 명나라 오파 화가들이 그림에 담고자 하는 맑고 담백한 기운이 흘러넘친다.


화책 ≪서락도(鼠樂圖)≫ 중에서 1948년 지본수묵 각 27x35.8cm 호남성박물관

어떻게 그리는가는 이제 실력의 평준화로 크게 문제 삼을 바 없는 시대가 됐다. 무엇을 그리는냐, 무엇을 그려야 하는가 하는 시대에 치바이스의 새우, 오이를 바라보면서 왜 그의 가슴 속에 오이와 새우가 떠올랐을까 하는 생각을 진정 더듬어 가보는 일이야말로 치바이스 전시가 오늘날 한국의 미술계에 던지는 한 가지 화두라도 생각되는 바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18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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