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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터로서의 미술관, 김홍식의 디지털 세계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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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Dialogue_in Museum_김홍식 기획초대전
장 소 : 갤러리 마노(서울 강남구)
기 간 : 2017. 6. 1. - 6. 23.
글/ 조은정(미술사, 미술비평)

  20세기 초반, 일단의 이태리 미래주의 화가들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파괴하자고 외쳤다. 위대한 전통, 모든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그 동경의 공간을 그들은 저주했다. 왜? 인류의 문화유산을 저장하고 관리해야 하는 임무 덕에 주어진 관광수입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얻어진 부와 비교할 수 없었고, 그들의 시간을 500년 전 그때로 고정시켰기 때문이다. 과거의 영화로운 역사와 위대한 작품을 대단히 많이 가진 결과 설립된 미술관과 박물관이 그들로 하여금 발전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네오나르도 다빈치의 번듯한 작품을 소장하지 못한 곳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국토가 박물관이요 건물마다 미술관인 나라의 숙명은 그렇게 질주하는 시간과 고정된 기억과의 쟁투이다.


Flâneur in Museum_Catalunya, Embossed work, Urethane, Ink & Silkscreen on Stainless steel, 130x85cm, 2016-7


  오늘날 미술관 혹은 박물관에 대한 평가는 물론 미래주의자들이 거주하던 20세기 초반의 공간에서와는 확연히 다르다. 문화가 산업이 된 시대, 가시적인 가장 좋은 콘텐츠는 단연 미술작품이다. 거기에는 감상 대상으로서 미적 위치의 작품이 있고 삶을 반영하는 주제가 있고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과 사건이 그리고 그 물질화된 사건들이 고정된 미술작품의 모습으로 시간을 관통하며 지나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관광의 가장 대표적 장소인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체득한다. 그리고 눈과 맘에 담던 작품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루브루, 에르미타주, 모마를 비롯한 세계적인 이름의 미술공간은 이제 사람들의 페이스북에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올려지고 저장된다. 저장, 그것은 지금을 지나 나중, 미래를 대비하는 적극적인 생존의 행위이다. 그런데 SNS에 올려지는 미술관의 벽에 걸린 그림들은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저장한 것일까? 물론 이는 저장이 아니라 공유이며, 그 공유는 기억의 공유이자 그곳을 방문한 사진을 올린 이의 존재에 대한 확인임을 누구나 안다. 확인의 행위는 지적 과시 혹은 문화적 존재라는 주변의 인정에 대한 욕구이다. 

  미술관에서 누구나 사진기를 꺼내들고, 핸드폰의 사진 기능을 연다. 물론 그것은 저작권이 소멸된 작품 앞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박물관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관객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확인을 은연중에 경험한다. 이미지화한 역사가 그렇게 공유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정지된 시간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담은 김홍식의 화면은 인류역사를 성찰하게 하고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시간에 대한 상념에 빠지게 한다. 


Dialogue in Museum_The Cradle, Embossed work, Urethane, Ink & Silkscreen on Stainless steel, 40x40cm, 2017
  


Flâneur in Museum_Orsay, Embossed work, Urethane, Ink & Silkscreen on Stainless steel, 117x78cm, 2017


Flâneur in Museum_Orsay, Embossed work, Urethane, Ink & Silkscreen on Stainless steel, 117x78cm, 2016-7


  베르트 모리조의 요람에서 아기를 재우는 100년 전 여인의 그림 앞에서 유모차를 세운 오늘날 여인의 뒷모습을 보는 자신을 확인하는 현대여성은 만감이 교차한다. 아이를 키워본 여인들의 공통적인 감정은 작가가 포착한 일상성이자 정체성이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여성의 육아가 숭고의 이름으로 자리매김되어지고 있을지라도 여성들에게는 힘겨운 시간들인 것임을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작가의 시선에 동조하고 그의 카메라를 따라간다. 호크니의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은 속도감있는 배경의 흐름과 함께 질주하는 지금의 시간을 보게 한다. 인상주의 작품들이 늘어선 공간에 선 드가의 어린 무희는 지금도 여전히 고달프지만 희망에 찬 몸짓을,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린 그림의 주인이 된 지도 모른 채 100년이 지나도 같은 나이로 또래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로드 무비같은 전시장에서 발견하는 장면들은 루브르의 꽃, 모나리자 앞에서 절정에 이른다. 



Flâneur in Museum_Louvre, Embossed work, Urethane, Ink & Silkscreen on Stainless steel, 40x40cm, 2016-7

  그곳에서 모나리자라는 여성 그것을 그리는 과정이나 작가는 사라지고 없다. 거기에는 오직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명화라는 이미지가 있을 뿐이며 그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이 한 장의 그림을 보려고, 정확히는 사진기에 담으려고 왔다는 사실을 확인라도 하려는듯 카메라와 핸드폰에 담고 그리고 가상 공간에 뿌릴 준비를 한다. 조금이라도 좋은 각도에서 한 장이라도 더 찍으려는 관람객의 몸짓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미지의 채집을 넘어서 움직이는 대상을 손에 넣기 위한 적극적인 획득의 과정, 사냥의 이미지이다. 피 질질 흘리는 고기를 레스토랑에서 맛볼 수 있는 지금 사냥터는 미술관이 되었다. 도처에 널린 이미지들 속에서도 미술관 속 작품을 탐닉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교회에서보다 미술관에서 더 숭고하게 느끼는 이콘 앞에서의 행위를 통해 새로운 사냥꾼의 탄생을 예고한다. 증강과 가상의 시대, 생존을 위한 게임은 그렇게 작가의 시선에 포착되고 고정되었다. (*)                

글/ 조은정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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