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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항아리에서 김환기로 이어지는 그 무엇 <한국 미술사의 절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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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조선미’의 고갱이

전시명 : 한국 미술사의 절정
장 소 : 서울 노화랑
기 간 : 2017.2.15-2017.2.28
글/ 김진녕

1.
‘한국 미술사의 절정’.
장엄하기까지 한 이 제목은 서울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의 제목이기도 하다. 18세기의 기물 백자달항아리와 18세기에 활동했던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부터 현대의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 다섯명의 작가의 대표작 14점과 백자달항아리 두 점 등 16점으로 꾸민 전시에 미술사학자이자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왜 ‘한국 미술의 절정’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을까.
그는 “백자달항아리부터 김환기의 추상작업까지, 이 300년은 한국미술사에서 그야말로 ‘절정’을 창출한 시기였다. 한국 미술사의 전체 흐름 중에서 가장 조선적인 것, 혹은 한국적인 것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현재 최고의 값을 형성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우리나라 문화사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의 유산으로 최대의 재부를 이룬 시기임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2.
백자달항아리나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의 작품은 최근 국내외 경매시장에서 한국 작가의 작품 경매가를 번갈아 갈아치우는 형국이다. 이태호 교수는 이번 전시의 시작과 끝을 18세기 백자달항아리에서 시작해 현대의 김환기로 이어지는 300년의 성과와 축적, 변화임을 강조했다. 그는 도록에서 “조선 후기 18세기 문화는 중국의 감화를 벗고 조선풍의 조선문예, 곧 조선미를 자랑했다. 이어 20세기에는 근대화된 서구의 영향 아래 조선적인 것을 토대로 한국미가 정립되었다. 달항아리 시대부터 수화시대까지 양자를 아울러보니 우리나라 문화예술이 근본적으로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바로 ‘조선미’였다. 대내외적인 혼란과 상처로 정체성을 잃을뻔 했던 근대기의 ‘한국미’마저도 ‘조선적인 것의 계승’으로 완성한 것이었다. 김환기가 그토록 조선백자를 사랑하여 자기 예술의 멘토로 삼았던 사실은 곧 조선미와 한국미의 동질성을 긍정케하며, ‘한국미’의 정체성을 ‘조선미’에서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고 적었다.

3.
전시장 들머리에는 달항아리 두 점이 놓여있다.
1층에는 기획자의 의도대로 백자달항아리와 김환기의 그림 5점 만으로 꾸며졌다.
제일 먼저 보이는 달항아리는 높이 48.2cm, 지름 50cm로 아랫쪽과 윗쪽의 기울기가 비교적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균형이 잡혀있다.
이 달항아리는 지난 2007년 3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등장한 것을 서울 청담동 프리마호텔 이상준 회장이 127만2000달러(약 12억원)를 주고 낙찰받았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경매를 통해 고향에 돌아온 셈이다. 전시장에서 마주친 이상준 회장은 “이 작품을 위해 호텔에 상설 전시장을 만들어 달항아리와 어울리는 작품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상준 소장 달항아리


또 다른 한점은 높이 46cm, 지름 48cm으로 굽받침을 보완해서 세울 정도로 모양이 이지러져있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감상 재미가 있다. 김환기가 1960년에 그린 <산월>이란 작품과 이웃하고 있다. 수화가 그린 두툼한 질감의 둥그런 푸른 달은 18세기 도공이 만든 백자달항아리는 같은 정서를 다른 매체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태호 교수는 <산월>과 짝을 맞춘 달항아리에 대해 “고온의 가마 안에서 그리 되었겠지만 항아리 주름에 옛 도공의 손맛이 크고 뚜렷하며 ‘비대칭의 대칭’ 미학의 진면목으로 삼을 만하다. 흠 없이 완전히 보존되어 좋으며, 푸른 기운이 비교적 세게 감도는 표면 질감과 백색의 색감이 시원스럽다. 조선 후기 회화를 비롯한 문화 예술이 표출하는 신명과 흥겨움을 전달해준다. 김환기가 얘기했듯이 그야말로 ‘조형의 전위’에 버금가는 백자 달항아리”라는 찬사를 보냈다.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곡선이 프리마호텔 소장품이 완만한 팔각형에 가까운 대칭형이라면 이 작품은 비대칭에 가깝다. 위는 완만하고 아래는 상대적으로 가파르다. 여기에 방향에 따라 곡률이 다르다. 완벽한 비대칭. 그래서 다양한 풍취를 뿜어내고 있다. 표면도 프리마호텔 소장품이 반짝거린다면 이 작품은 매트한 느낌이다. 굽조차 보는 방향에 따라 높이가 다르다. 유약이 한꺼번에 발라지지 않은 듯 상층부 어깨 부위에 또렷하게 유약 차이가 보이는 선이 보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도공이 의도했을까?
아닐 것이다. 흔히들 ‘불의 장난’이라고 하는 우연, ‘진인사 대천명’ 또는 불과 도공이 합작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이상준 회장에게 두 작품의 비교를 부탁하자 “보는 맛이 두 작품 모두 다르다”는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4.
달항아리는 예외없이 좌우 비대칭이고 상하 비대칭이다.
비대칭의 투박함, 자연스러움이 그 매력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백자 달항아리 중에는 정확하게 좌우대칭과 상하대칭을 맞춘 작품도 등장하지만 이런 대칭은 집착으로 보이지 무심할만큼 단순한 달항아리의 매력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태호는 이 전시회 도록에 “조형미에서 비대칭의 균형미를 강조한 영국의 미술사가 허버트 리드(Herbert Read, 1893~1968)는 ‘비대칭의 균형’의 모범 사례로 일본 도자기를 꼽았다. 하지만 물레질한 형상을 찌그러뜨린 일본 모모야마나 에도 시대의 인위적인 그릇 기형에 비하면 자연스레 둥그런 조선 후기 백자달항아리가 분명 한수 위”라고 썼다.
달항아리마다 다른 모양의 비대칭성이 도공의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홍근 기증 달항아리(동원 288)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백자 달항아리는 대개 높이가 40cm 이상이다.
이 정도의 크기가 1300도의 불을 견디기 위해 당대의 도공은 오목한 큰 접시 두 개를 아래 위로 이어붙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달항아리의 배 부분에서 흔히 관찰되는 요철 자국은 두 개를 이어붙이기 위해 백토 띠를 덧댄 자국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기증관에 전시되고 있는 백자 달항아리(동원 288)는 매끈하고 유려한 외관에 색감마저 맑은 달항아리지만 내부의 이음매 부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경우 ‘불의 마음’이 표면은 매끈하게 유리화를 진행시켰지만 내부에 예상치못한 균열을 남긴 것이다. 아마도 이 그릇은 가마에서 꺼낸 직후부터 흠잡을데 없는 외관임에도 음식을 담는 용도로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달항아리는 구름 무늬(얼룩)가 없다.

이태호는 “이음새에 붙인 띠의 두께에 따라 굽는 과정에서 백자의 일그러짐 정도가 살짝 달라지는데, 도공이 주무른 대칭의 항아리를 가마불이 일그러뜨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 손을 떠난 이후 하늘에 맡긴 ‘진인사 대천명’의 그대로 실현되어 있다”고 평했다.


리움미술관 소장 달항아리(국보 제 30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박병래 기증 달항아리(수정 22)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국보 제309호 백자대호는 표면에 갈색의 ‘구름 무늬’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박병래 선생 기증실에 있는 달항아리(수정22)도 표면에 운치있는 ‘구름 무늬’를 띠고 있다.
실상 이 무늬는 이 백자 항아리에 담았던 음식물이 유약이 갈라진 틈(빙열)에 스며들어 나타난 얼룩으로 추정된다. 사용자가 달항아리를 쓰면서 또다른 달항아리의 미감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렇게 21세기에 사랑받는 백자달항아리는 경기도 광주군 금사리 가마(1726년~1752년)에서 고작 30여년 동안 생산됐고 남아있는 것도 수십 점 수준이다. 이중 국보로 지정된 것이 석 점, 보물은 넉 점이 있다. 일반인이 관람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국립중앙박물관 방문이다. 1층 조선실과 3층 백자실, 2층 동원 기증실과 박병래 기증실에 각기 한 점씩, 모두 넉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5.
전시장 2층은 18세기 화가인 겸재 정선의 <박연폭도>와 단원 김홍도의 <죽하맹호도>, 20세기 화가인 이중섭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와 은지화 두 점, <독서하는 소녀>를 포함해 박수근의 그림 넉 점이 전시되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말년인 1750년대에 그린 <박연폭도(朴淵瀑圖)>는 이른바 ‘정선의 3대 명작(금강전도·인왕제색도·박연폭도)’으로 꼽는 이도 있다. <박연폭도>를 빼고는 모두 리움 소장품이지만 <박연폭도>는 개인소장품이라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국내 전시장에 나온 것도 이번이 7년 만이다. <박연폭도>는 1m가 넘는 세로로 긴 그림으로 폭포 낙수처 부근에 작은 크기의 사람과 정자를 배치해 폭포의 장대함과 속도감을 강조하고 있다.


겸재 정선 <박연폭포>종이에 수묵, 119.7 x 52.2 cm


<박연폭도>는 요즘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에 전시되고 있는 겸재의 또다른 폭포 그림인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덕수5597)와 비교해 보면 더욱 좋을 듯 하다. <여산폭포도> 역시 겸재가 60대 이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박연폭도>는 폭포의 장대함을 강조하는 비교점인 정자를 그림 하단에 배치했지만 <여산폭포도>에선 정자를 폭포의 시작점인 산 위에 올려놨다. 겸재는 관념 산수(여산폭포)를 수없이 그린 뒤에 실경을 담은 진경산수화(박연폭포)를 완성한 것이 아닐까.


겸재 정선 <여산폭포도> 비단에 수묵담채, 100.3×64.2cm, 국립중앙박물관

 
이외에도 2층 전시실에는 ‘요즘의 한국인’이라면 대개는 좋아하는 이중섭의 유화 한 점과 은지화 두 점, 박수근의 <산동네> <독서하는 소녀> <여인> <초가집> 넉 점이 관람객을 반긴다. 특히 지난해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서 관람객 투표에서 1위를 한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가 출품돼 알맹이만 전시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중섭 <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 종이에 유채, 54.5 x 37 cm


이 전시에 출품된 모든 작품은 개인 소장품이고 유명한 작품들이다.
전시를 주최한 노화랑의 노승진 대표는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작품을 내 준 소장자의 협조와 신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물론 400억 원대의 보험도 들었다고 한다.
 
글/ 김진녕 관리자
업데이트 2017.11.19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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