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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건의 한국 청자의 흐름] 간지명(干支銘) 상감청자의 제작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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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간지가 새겨진 청자에는 ‘기사(己巳, 1269년 또는 1329년)’부터 을미‘(乙未, 1295년 또는 1355년)’까지 26년간 8종류의 간지가 확인된다. 60년의 시차가 있는 간지의 절대연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간지명 청자의 앞뒤 시기에 출토된 유물자료를 비교함으로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표] 비교 가능한 청자군


비교 가능한 청자에는 우선 13세기 전반의  지릉, 석릉, 곤릉에서 출토된 약 삼십 여점의 청자가 있다. 그리고 13세기 후반(또는 14세기전반)에 제작된 간지명이 든 100점 이상의 청자 또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지정(至正)11년명(1351) 청자>(그림 1)와 대체로 그와 유사한 도리포 해역에서 인양된 청자 600여점을 꼽을 수 있다. 


그림1. <상감화접문 ‘기사’명 발象嵌花蝶文‘己巳’銘鉢>
고려시대 후기, 1269년, H. 8.3, M. 19.1cm, 국립중앙박물관


모두 비교대상의 조건에 부합하는 이들 청자는 기종과 형태가 대부분 유사하며 거의가  음식용기이다. 특별한 자료로는 기사(己巳)명이 새겨진 인면(人面)돌기 장식의 <고족소호(高足小壺)>(해강도자미술관, 그림2) 한 점이 있다.


그림2. <상감‘기사’명 사이소호象嵌‘己巳’銘四耳小壺>
고려시대 후기, 1269년, H. 9.6cm
『간지명상감청자干支銘象嵌靑磁』 (해강도자미술관, 1991), 도16.


지릉출토 청자를 비롯해 강화도 시대(1232-1270)인 석릉과 곤릉 출토의 편년유물들은 모두 상감보다 음양각 비중이 높다는 점이 무엇보다 눈에 띤다. 그런데 간지명 청자의 경우는 몇 배의 공력이 더 필요한 상감문양 일색이어서 양자 사이의 어느 시점에 상감 문양으로 변화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간지명 청자의 문제를 고찰할 때 양인각 화형(花形)접시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13세기 전기에 조영된 석릉과 곤릉에는 양인각 장식의 화형접시는 확인되지만 12세기 후기로 추정하는 진도 명랑대첩로 해저에서 인양된 같은 형태의 화형접시에는 양인각 문양 이외에 일부 상감을 한 문양도 공존한다. 기사명이 있는 양인각 화형접시에 상감으로 국화문을 새긴 진도해저 인양의 화형접시도 이를 계승한 동일 형태일 가능성 높다. 

나중에 도리포에서 발굴된 6백여 점의 청자에는 양인각 기법을 쓴 화형접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기사(1269)명 접시가 80년 늦은 도리포 청자(1350년대)보다 30년 앞선 석릉(1237)이나 곤릉(1239) 청자에 더 가깝다는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어 <상감 기사명 접시>와 규모, 문양, 유태(釉胎)가 유사한 유물이 강화도 중성 석벽기단 판축부 아래서 출토됐고 또 해강도자미술관의 <상감 기사명 고족소호>에 선행하는 유물이 강화도 남산리에서 발견되어 간지명 청자가 강화도 시대와 관계가 깊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굽받침의 재료변화도 주목된다. 기사(己巳), 경오(庚午), 임신(壬申), 계유(癸酉), 갑술(甲戌)의 명이 든 청자는 대부분 차돌받침의 갑번으로 제작됐다. 일부 작은 접시들만 모래받침이다. 그러나 갑술 이후 8년이 지난 임오, 정해(丁亥), 을미(乙未) 명이 새겨진 음식그릇들은 거의 대부분 모래받침의 열번(例燔)이다. 따라서 앞서 기사명 청자 등이 갑번인 것과 달리 품질이 한 단계 낮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절대연대인 <지정11년명 대접>(그림3)과 도리포 인양의 청자들은 모래받침과 흑색점토 비짐으로 상번(常燔)했다. 이들은 이전과 달리 유층도 얇고 미세한 망상 균열이 가득해 간지명 청자에 비하면 전반적으로 품질이 하락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3. <상감‘지정11년’명대접象嵌‘至正11年’銘大楪>
고려시대 후기, 1351년,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이러한 자료를 종합하면 흑색점토 비짐이 발견되지 않는 간지명 청자는 흑색점토 비짐의 도리포 쪽을 포함하는 간지 ②안이 아니라 명종 지릉쪽에 가까운 간지 ①안, 즉 1269년~1295년에 제작된 청자를 가리키는 근거가 된다고 판단된다. 정해(1287년 또는 1347)명 청자와 ‘을미(1295년 또는 1355)명 청자의 경우에도 1350년을 전후한 도리포 청자의 받침과 유태보다 오히려 강화도시대의 희종석릉에서의 출토품과 더 가까운 연관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주]
청자에 간지를 새긴 목적은 생산과 공급을 통제하기 위한 것인데 이러한 조치는 150년 후 조선 태종17년(1417)에 공물로 바치는 사목기(砂木器)에 해당관청의 이름을 넣으라는 ‘각각 사호(各刻司號)’ 정책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된다. 이 정책은 공물의 수급과 통제 그리고 각양각색의 15세기초반 청자를 국가가 요구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전면 개편하여 ‘관사명(官司銘) 인화문 분청사기’을 탄생시켰던 것처럼 간지를 넣는 ‘각각 간지(各刻干支)’의 목적도 대몽항쟁 이후 국가 재건과 사회 안정의 일환으로 상감청자 수급과 제작체계 전반을 혁신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9.12.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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