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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회화사 9] 조희룡의 《호산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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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외사壺山外史』는 매화 그림으로 유명한 조선 후기~말기의 여항문인이자 서화가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정조13)-1866년(고종3))이 쓴 책입니다. 호산은 그의 호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41장 정도 되는 인물 전기집으로, 중인·화가·승려·몰락양반 가운데 특이한 행적을 남긴 마흔 두 명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떠도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간의 인물전에서 보듯 본관이나 집안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고 바로 그 인물의 행적에 대해 서술하여 참신합니다. 인물들도 대개 그의 활동 범위에 있었던 여항인(중인계급)들에 대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많은데, 그중 김억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을 옮겨보겠습니다.

...김억은 영조 때 사람이다. 집이 부유하여 호사스런 성품에, 노래와 여색을 더할 나위 없이 즐겼다. 우리나라 사람은 흰옷을 입는데 김억 혼자서 눈부신 채색비단 옷을 입고 다녔다.
칼에 대한 벽(癖)이 있어, 구슬과 자개로 장식한 칼들을 방과 기둥에 걸어 놓고는 하루에 한 개씩 바꿔 찼는데, 일 년이 돌아와도 그 많은 칼을 다 차지 못하였다고 한다.
악원(樂院)에 교습이 있는 날이면 기녀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김억이 교습을 받는 기녀들을 구경하며 즐기고 있는데, 그를 시샘한 젊은 무리들이 서로 말하기를,
“김억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 우리들과 만나지도 않다가, 나라 안의 여악(女樂)에 틀어박혀 있느니 가증스럽다. 그를 혼내주자.” 하고, 김억에게 말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김억은 대꾸조차 않았다. 그러자 마침내 청년들이 김억을 구타하고 옷을 찢어버렸다. 한쪽 외진 곳에서 새로 옷을 갈아입은 김억은 좀 전처럼 기녀들을 구경하는데, 아까 입었던 옷과 모양새나 색깔이 다를 바가 없었다. 청년들이 화가 나서 또 옷을 찢어버렸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김억은 좀처럼 싫은 내색 하나 비치지 않은 채 옷 세 번을 다 갈아입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처음과 같이 구경만 하였다. 시비를 걸었던 청년들은 부끄러워졌고, 그에게 사과하였다고 한다.
그가 총애하는 기녀는 모두 여덟 명이었는데, 서로를 알지 못하게 할 만큼 그의 수완이 좋았다. 하루 저녁은 여덟 기녀를 모두 불러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기녀들 각자 총애 받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해 여덟 명의 기녀가 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전혀 투기하지 않았다. 그의 권모술수가 대개 이와 같았다.
우리나라에 양금(洋琴)이 있었으나 소리를 내려면 빠르게 쳐야하는 점 때문에, 가락에 맞추어 연주할 사람이 없었다. 김억이 처음으로 양금을 울려 가락을 연주하니, 청명한 소리가 들을 만하였다. 지금 양금을 치는 사람들은 김억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공령문(功令文)도 잘 지어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화가로는 김신선金神仙·조신선曺神仙 등의 기인과 최북崔北·임희지林熙之·김홍도金弘道·이재관李在寬·전기田琦 등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전기田琦에 대한 부분을 살펴볼까요.

...인물이 헌걸차고 빼어났으며 그윽한 정취와 옛스러운 운치가 왕성하여 진, 당시대의 그림 속의 인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으니, 산수인운을 그리면 그 수려한 필치가 문득 원나라 때 그림의 묘경에 들어간다....그의 안목과 필력은 압록강의 동쪽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나의 겨우 30세에 병으로 죽었다... 고람의 시는 다만 당세에 짝이 적을 뿐 아니라 상하 백년을 가지고 논할 만하다. 작년 가을에 내가 남쪽으로 내려갈 때 나를 찾아와서 서로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뜻을 보이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이것이 마침내 천고의 영결이 될 줄이야! ... 돌아 보건대, 70 노인인 내가 30 소년의 일을 쓰는 것을 옛사람의 일을 쓰는 것처럼 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차마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절구 한 수로써 통곡한다....


고람 전기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24.5x41.5㎝.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호산외사는 호산기, 호산외기라고도 불립니다. 조희룡이 직접 쓴 호산외사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집에 있으면서 심심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몇몇 사람의 전기를 기록하였다. 다행히 이 전기가 전지간에 남아 있다가 뒷날 읽는 이로 하여금 지금 사람이 옛일에 대한 것처럼 하고자 한다. 이에 대담하게 마음 놓고 빨리 내리 써 놓고 수염을 비비며, 후인이 고서를 읽는 것처럼 읽었다. 그리고 나서 생각하니 어리석고 망녕된 짓이다. 옛사람의 언행이 전할 만한 것이 전해지는 것이나, 또 꼭 전할 만한 것도 아니면서 전해지는 것도 다 대인大人의 위대한 문장을 빌린 뒤라야 전한다. 내가 어찌 그런 사람이겠는가. 장차 찢어서 불태워버리려고 하였으나 가만히 생각하니 느끼는 바가 없지 않다. 이항의 몇몇 사람에 관한 얘기가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일지라도 무엇에 의지하여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세상에 대인 거필巨筆이 나와서 혹은 추후하여 그 사람들의 얘기를 알고자 한다면 이 책에서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냥 남겨 두기로 하였다.
헌종 10년(1844년) 3월 2일 호산거사 스스로 쓰다.

은근히 계급적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찢어버리지 않고 이렇게 전해지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를 알려드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SmartK 관리자
업데이트 2017.12.1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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