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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릉3 - 명군(明君), 흰 까마귀 날아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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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明君), 흰 까마귀 날아들다 


도판1 창릉 예종능 능침 동자석주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2 창릉 예종능 능침 난간석주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종은 겨우 13개월 재임했고 또 어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자신의 업적을 쌓을 수는 없었다. 다만 <예종대왕 행장>을 보면 예종은 ‘영명, 과단, 공검(恭儉), 연묵(淵黙)하였으며 특히 세자 때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하루 세차례씩 강의를 하도록 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세조는 아들 세자를 향해 다음처럼 칭찬하였다. 

  “세자는 육예(六藝)에 통하지 아니한 바가 없구나”1)   

  예종은 공부하는 왕이었다. 즉위한 뒤에도 경서(經書) 및 사서(史書) 강독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역대세기(歷代世紀)>>를 찬술하였다. 깊은 학문으로 ‘사학의 요령’을 보여준 것이다. 예종의 업적은 워낙 기간이 짧아 세조의 통치를 변함없이 지속하는 일만으로도 넉넉하였지만 직급에 따라 토지를 나누되 그 소유를 당대로 제한하는 직전수조법(職田收租法)을 본격 시행하였으며 소작인의 고소권을 인정함으로써 세도가의 토지소유가 과다해지는 것을 억제해 나갔다.  
  앞서 진행해 오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완성을 위하여 찬술하도록 하면서 세계지도인 <천하도>를 완성케 하는가 하면, 전국에 흩어져 있던 ‘지리음양서(地理陰陽書)’를 수집하도록 했다. 크게 보잘 것 없는 치적이긴 해도 예종은 무엇보다 신하들의 간쟁(諫諍)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모든 신료들로 하여금 윤대(輪對)하게 하여 부지런히 들었다. 또한 예종은 어진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전국 각 도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려 산림(山林)에 자취를 감춘 어진이를 찾아 내도록 하였고 또 조금이라도 예능(藝能)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등용했다. 
  예종은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왕위에 오른 그 해 10월 전라도 관찰사가 하직할 적에 예종은 다음과 같이 일렀다. 

  “국사가 많은 이 때 백성을 다스림의 요체는 마땅히 진성시키기부터 할 것이며, 백성을 괴롭게 하는 것은 불가하므로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 조문에 구애받지 말고 편의(便宜)하게 처결토록 하라.” 

  이처럼 예종은 법조문 보다는 백성의 현실을 생각하는 왕이었다. 그런 왕이었기에 당시 거대한 규모의 부유한 상인 들인 부상대고(富商大賈)가 국가에 바치는 공물과 세금을 대납(代納)하면서 그 댓가를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임에 백성의 고통이 심해져 가는 사정을 파악했고 그에 따른 조치를 신속히 취했으며 그 밖에도 민생과 관련하여 백성의 삶을 위한 여러 조치들을 취했다. 그야말로 뛰어나게 밝은 명군(明君)이었던 것이다. 
  이에 금수도 감동하였던 것일까. 대궐 안에 흰까마귀가 날아들었다. 이에 대신들이 흰 까마귀가 이르는 일은 상서로움이라 아뢰자 예종은 다음처럼 대꾸하였다. 

  “내가 덕이 적은데 어찌 이러한 상서로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경들은 다만 나의 부족함을 도와서 길이 성세(盛世)를 맞도록 하라.” 2)

  그랬으므로 승하 뒤 <예종대왕 창릉지>를 쓴 이는 예종에 대하여 “재위 겨우 1년을 넘겼지만 대개 호령(號令)에 나타난 것이 빛나게 기록할만 하였다”3)고 극찬하였던 것이다.    

역사 기록의 엄중함을 보여준 예종  


도판3 창릉 예종능 서쪽 석양 오른쪽 방향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4 창릉 예종능 서쪽 석마 왼쪽 방향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종이 오래 통치하였더라면 업적을 더 많이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업적 하나만으로도 예종의 가치는 너무도 커 보인다. 역사서인 <<역대세기>> 저술자인 예종은 역사 기록의 엄중함을 헤아리는 왕이었다. 예종이 왕위에 오른 뒤 <<세조실록>>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예종은 세조 때 춘추관(春秋館)에 근무했던 모든 사관으로 하여금 사초(史草)를 제출하도록 했다. 또 예종은 사초를 작성한 이들의 이름을 해당 사초에 밝히도록 했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었다. 후환이 두려워 제대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종은 사관 책임제를 강조하여 그렇게 하도록 했다. 
  결국 부작용이 생겼다. 제출자의 한 사람인 민수(閔粹 ?-?)가 자신이 써서 제출한 사초에 ‘한명회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는 내용이 있음을 기억하고는 친분이 있는 이들을 통해 사초를 빼돌려 수정한 뒤 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고친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사학자였던 예종은 그 사안의 중대함을 알고 있었다. 이에 친히 국문(鞫問)에 나섰다. <<연려실기술>>은 이 과정을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친히 국문하니 민수는 ‘신이 쓴 것은 모두 대신(大臣)들의 일입니다. 그 대신들이 모두 <<세조실록>>을 편찬하는 실록각(實錄閣)에 있으므로 신이 중상 당할까 염려하여 고치려 한 것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울면서, ‘신은 외아들이니 목숨이나 잇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매, 임금도 불쌍히 여기고 ‘정직하다. 내가 서연(書筵)에 있을 때부터 민수의 사람된 품(品)을 잘 안다’하고 드디어 죽음을 면해 주고 곤장을 친 뒤 제주로 보내어 관노(官奴)로 만들었다.”4)   

  더불어 관련된 인물 가운데 거짓을 고한 자는 참형(斬刑)에, 사실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자는 곤장형에 처하였다. 이 사건은 최초로 사초를 수정하는 사건이었으며 국왕이 직접 나서서 친히 국문할만큼 사안의 중대함을 천명하는 과정이었다. 
  역사가였던 예종은 예종이라는 자신의 묘호(廟號)까지도 생전에 지어두었다. 대체로 묘호는 승하 한 뒤 대를 잇는 왕이 지어 바치는 것인데도 예종은 손수 지은 <어제(御製)>에 ‘사후 예종이라는 묘호를 받으면 족하겠구나’라고 기록해 두었고 이를 받들어 그렇게 지어 올렸다는 것이다. 과연 미래를 준비하는 역사가의 자질까지 보여준 셈이다.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 그리고 최초의 독살설 


도판5 창릉 예종능 서쪽 무석인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종은 즉위하고서 13개월이 지난 1469년 11월 27일 다리에 종기가 났다. 이를 본 신하들이 걱정을 하자 다음처럼 호기롭게 말했다. 

  “이것 때문에 죽기야 하겠느냐” 

  하지만 다음 날 28일 급작스레 승하하고 말았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혈기왕성한 나이 겨우 스무살에 불과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다시 민간에는 한명회가 예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영민하고 총명한 예종이 세조의 왕권중심정책을 계승하고 있음에 훈신세력의 수장인 한명회가 두려움을 느껴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공식기록인 <예종대왕 행장>에서는 예종의 사인을 다음처럼 기록했다. 

  “세조가 승하하시자 왕은 몸부림을 치며 슬피 울고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아니하며 부모의 상중에 상주가 거처하는 막인 의려(倚廬)에서 거처하며 애달파 하심이 지나칠 정도였다. 이로 인하여 건강을 그르치시어 그 해 겨울에 이르러 병이 생겨 날로 더욱 침체되어서 약이(藥餌)의 효과도 없이 11월 28일에 승하하였다.”5)

  하지만 이런 기록은 허점이 크다. 예종이 즉위한 다음 날 세조가 승하하였고 그로부터 13개월 동안 여러가지 치적을 쌓아가다가 다리에 종기가 났을 뿐이다. 의려에 거처하다가 발병하여 내내 병상에서 악화되던 끝에 임종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독살이냐 병사냐가 아니다. 왕권(王權)에 도전하는 신권(臣權) 세력의 발호가 얼마나 심했으면 민간에서 저와 같은 독살설이 퍼져나갔을까 하는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신권이란 어불성설이다. 왕조국가 역사상 신권이란 대체로 공익(公益) 보다는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다. 예종의 왕권에 도전하는 한명회의 신권이 바로 그러했다. 예종이 과연 사익을 추구했던 폭군이었던가. 왕조국가에서 신권을 주장하는 세력을 근대 민주국가에 접근하는 경향이라고 생각하는 건 커다란 왜곡이다. 오늘날 민주국가의 관점으로 과거 왕조국가를 재단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신권을 민권으로 이해하는 건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바로 이것이 한명회의 신권과 예종의 왕권의 경계를 분별하는 기준일 것이다. 


도판6 창릉 배위(홍살문 옆)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도판7 창릉 비각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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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33쪽. 
 2) <예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33쪽. 
 3) <예종대왕 창릉지>, <<선원보감>>2권, 계명사, 1989. 269쪽.
 4) 이긍익, <예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2, 민족문화추진회, 1966. 13쪽.
 5) <예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33쪽.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7.26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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