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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릉2 - 왕권과 신권 그리고 종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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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과 신권 그리고 종친의 갈등  


 창릉 예종능 서쪽 문석인 -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종은 1450년 1월 1일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 1418-1483) 사이에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그 날이 범상치 않았지만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고 또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예종은 그저 왕족의 일원으로 생애를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섯 살 때인 1455년 윤 11월 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자가 되었고 또 여덟살 때인 1457년 9월 세자였던 형 이장(李暲)이 죽음에 아버지 세조는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둘째 아들 이황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청하였다. 황제는 세조에게 다음과 가튼 조칙을 내렸다. 

  “왕은 충효(忠孝)로써 교훈하여 세자로 하여금 덕(德)을 두텁게 하고 의(義)를 지켜 게으르거나 교만하지 않게 하여 나라 사람들의 여망에 부응토록 하오.”1)   

  이렇게 세자가 된 이황은 <예종대왕 행장>을 보면 여러 학자를 스승으로 삼아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세조가 <훈사(訓辭)>를 지어 줌에 이를 마음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467년 봄 세조가 병환이 깊어짐에 세자로 하여금 국무를 결정하게 하였고 그로부터 또 한 해가 지난 1468년 9월 7일 세조가 죽음을 앞두고서 세자에게 전위(傳位)함으로써 세자는 바로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다음 날 세조가 승하하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예종은 19살이었다. 이 때 어머니 정희왕후 윤씨가 나섰다. 보위에 오른 아들이 아직 19살이기 때문에 자신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었으므로 대리청정하는 자리 앞에 발을 내려 놓고서 아들 대신 정무를 살폈으므로 이를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 불렀다. 정희왕후 윤씨는 ‘여장부’라는 별명을 지녔을만큼 대단했기에 아마도 오래전부터 자신이 국사를 다루길 간절히 원했었을 것이다. 수렴청정은 조선 개국이래 최초의 일이었고 정희왕후는 처음으로 국사를 전단하는 여성의 지위에 올랐다. 
  10월에 들어 예종은 <친필 하교>를 내렸는데 다음과 같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고 임금을 두어 억조창생을 기르게 한 것은 마음대로 자기 욕심을 내어 자기 몸만 위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덕이 적고 우매한 사람으로 일찍이 선업을 이어받아 지혜가 사리에 밝지 못하고 덕이 백성을 편히 할 수 없으니 여러 관료들의 도움으로 어렵고도 크나 큰 선업을 길이 보전하려 한다. 만약 여러 신하들이 생각한 바 있는데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이는 이른바 군문(君門)이 만리보다 더 멀다는 것이겠다. 정사의 득실과 백성의 기쁜 일과 슬픈 일을 내가 무엇으로 인연(因緣)하여 알겠는가. 오직 그대 신료들이 모두 나의 뜻을 체득하여 각각 그 직책을 삼가고 나의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2)

  예종의 이같은 <하교>는 수렴청정하는 어머니 정희왕후 윤씨의 뜻도 담겨있을 것인데 <하교>가 뜻하는 바는 신하들로 하여금 정국에 적극 개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인 세조 때 이미 원상제도(院相制度)를 도입, 자신이 육성해 온 신숙주(申叔舟1417-1475), 한명회(韓明澮 1415-1487), 구치관(具致寬 1406-1470)을 원상으로 임명해 두고서 국사에 개입시키고 있었으므로 조금은 엉뚱한 요구였다. 그리고 예종은 왕위에 오른지 한달도 채 안된 9월 21일자로 하나의 조치를 단행했다. 세조가 이미 임명해 둔 세 명의 원상 이외에 몇 사람을 추가하여 원상을 9명으로 임명했다. 그 까닭은 당시 세종대왕의 손자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 1441-1479)이며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아들 의산군(宜山君) 남이(南怡 1441-1468)를 비롯한 종친세력에 맞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다음 달 10월에 남이, 강순(康純 1390-1468)을 비롯한 30명을 역모(逆謀)란 죄명으로 죽여버렸다. 왕권을 위협한다는 명목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분할통치의 기술을 발휘한 데는 수렴청정하는 어머니 정희왕후가 한 복판에 버티고 있었던 것인데 정희왕후 윤씨의 권력을 왕권이라고 한다면야 왕권중심의 국정운영이 펼쳐진다 하겠지만 정작 왕인 예종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강화는커녕 왕권수호에 급급해야할 판국이었다. 그러니까 위로는 어머니 정희왕후, 아래로는 9인의 원상 들에게 포위당한 형세였던 것이다. 섭정의 포로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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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31쪽. 
2) <예종대왕 행장>, <<선원보감>>1권, 계명사, 1989. 231-232쪽.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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