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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릉 3 - 세조의 업적
  • 1880      


세조의 업적 

  유능한데다가 그와 같은 군주관을 갖춘 왕이었고 따라서 자신의 이상과 재능을 실현하기 위하여 즉위하자 곧바로 신하에게 넘어가 있던 권력 다시 말해 신권(臣權)을 회수하여 왕권(王權)을 확립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단종이 즉위하면서 대신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이게 바로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다. 의정부는 알았지만 군주가 있음은 알지 못한지 오래되었다고 할만큼 당시 신권은 절대권력이었다. 

  즉위한 바로 그 해 세조는 육조(六曹)가 모든 공사간의 업무를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는 왕에게 계문(啓聞)하여 그 뜻을 육조로 하여금 시행토록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8월 7일자로 폐지하고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를 부활시켰던 것이다. 군주와 신하가 협력하는 체제인 의정부서사제는 어려서 대신의 보호를 받아야 했던 단종 때 지속된 제도였지만 세조로서는 권신(權臣)의 보호가 불필요했다. 군주의 이상과 구상을 실현해 나갈 유능하고 올바른 관료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러한 인재를 육조(六曹)에 배치하여 직접 보고받고 지시하고자 했던 것이 곧 육조직계제였다.   

  세조는 국가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우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1456년 7월 1일 단군, 기자, 동명왕의 신주를 개정하고 12월 11월에는 원구단(圜丘壇)을, 다음 해 1월 8일에는 원구서(圜丘署)를 설치했다. 원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제후국가인 조선의 군주는 곧장 하늘과 교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조가 원구단 설치만이 아니라 그 제사를 주관하는 관청인 원구서까지 설치했던 것은 국가의 위상을 그만큼 드높여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처럼 자부심이 대단했으므로 세조는 군사 분야에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평화로운 날이 오래가면 해이해질 것이라 하여 한 달에 두 번씩 진을 검열하였고 봄, 가을에 강무(講武)를 하였으며 스스로도 진법(陣法)을 저술하였다. 세조는 1456년 2월 전국의 군정(軍丁)과 한량인(閑良人)을 조사하여 군적에 등록하도록 하였으며 그 때 <<역대병요(歷代兵要)>>를 강원, 전라, 경상도에 보내 간행 보급토록 하였고 8월에는 <<무경(武經)>>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며 1458년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완성하고 1459년 7월 함길도에 <<무경(武經)>>을 보냈다. 헛된 자존심만으로 천자의 원구단을 경영한 것이 아니라 물리력을 갖춘 군주로서 국가를 운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세조는 군사분야만이 아니라 산업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459년 1월 <<잠서주해(蠶書註解)>> 편찬을 명령하고 6월에 양잠조건을 정했으며 그해 10월 양성지가 새로 편찬한 <<잠서(蠶書)>>를 올렸다. 또한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의 개간장려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1461년 3월 <<잠서>>를 언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업의 토대인 교통제도에도 주력하여 1855년 8월 12일 양성지에게 지리지(地理志)와 지도 편찬을 명령하고 1457년 경상도 역로(驛路)를 개편하였으며 7월에는 각도 역로소관(驛路所管)을 개정하였다. 

  특히 의료분야에도 애정을 기울여 1456년 8월 내의원(內醫院)을 비롯 전국 당본방서(唐本方書)를 한 곳으로 집결시켰고 1458년 3월 의서를 분야별, 과별로 나누어 의원들로 하여금 익히도록 하였으며 1459년 9월 <<의방유취(醫方類聚)>>를 교정, 간행토록 하였다. 





세조의 불교 

  세조는 1466년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들렀다.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고 무사(武士)들을 시험하여 급제를 주었는데 그때부터 그 자리를 어림대(御臨臺)라 불렀다. 또 등창을 앓던 세조는 이곳 오대산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너무도 맑고 또 문수동자(文殊童子)가 머무시는 산이라 그 기운을 생각하며 계곡물에 목욕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손이 등 뒤로 나아가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마침 물가로 어떤 꼬마가 지나가므로 불러 등물을 부탁했다. 

  조그만 손이 등을 쓰다듬어 주더니 얼마나 지났을까 마쳤다고 하며 떠나는 것이었다. 이에 세조는 귀여워 놀려줄 마음이 생겨 등 뒤의 꼬마에게 “꼬마야, 오늘 네가 임금의 등을 밀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하여라”했다. 꼬마가 대꾸하기를 “그럼 임금님,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셔요”라고 했다. 순간, 놀라 몸을 돌려 보니 꼬마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고 보니 등창도 씻은 듯 사라지고 말끔했다. 

  한양에 돌아 온 세조는 이 이야기를 첫째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에게 해 주었다. 감격한 공주는 계곡의 위쪽에 자리잡은 조그만 암자 상원사(上院寺)에 발원하여 전각을 짓고 거기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토록 했다. 바로 그 <문수보살상>이 지금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는데 미술사상 가장 빼어난 작품의 하나로 그 아름다움이 하늘에 닿아 있는 것이었다. 물론, 몇 해 전에 가 보았더니 그 눈부신 동자상 표면에다가 금물을 칠하고 또 칠해 둔탁해 져서 이제는 볼품하나 없는 탐욕의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작품 사진 문수보살상 오대산 상원사 ) 

  그리고 그 전각 앞 계단 양옆에 <고양이상>이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양이상> 또한 세조와 인연이 있는 작품이다. 상원사에 <문수동자상>이 봉안된 뒤 감동이 여전했던 세조가 다시 오대산을 찾아 불공을 드리고자 했다. 그런데 계단을 올라서려 하자 난데없이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잡아 끌곤 했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는 전각을 수색하라 했고 <문수동자상> 아래 불단에서 칼을 품은 자객을 체포했다. 고양이 덕분에 암살을 면한 것이다. 이에 그 고양이를 기려 두 마리 조각상을 세운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세조와 불교의 인연, 특히 오대산 문수동자와의 인연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그와 무관하게도 세조는 불심에 깊이 사로잡힌 불제자였다. 세조는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29종에 이르는 불경을 출판했다. 이 때 간행한 불경인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이 모두 한글본이었다. 그 전 해인 1460년 5월 <<훈민정음>>, <<동국정운>>, <<홍무정운>>을 문과 초장(初場)의 시험과목으로 정했으니까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의 전승과 보급을 제도화해 나간다는 명분도 있지만 여기에 편승하여 불교를 결합시키는 지혜를 발휘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한 1462년 지금 탑골공원 자리에 거대한 사찰인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했는데 세조의 불교에 대한 애착은 대단했다. 





생육신과 사육신 
 


도판1 광릉 세조능 서쪽 문인석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1456년 6월 1일 세조는 한양에 막 도착한 명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는 성삼문과 박팽년을 중심으로 하는 단종복위운동 세력은 세조와 세자 그리고 정권의 중심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한명회, 권람, 신숙주를 제거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단종복위운동세력은 단종과 문종의 처가 가문 및 집현전 출신 청년 관료세력이었다. 이들은  바로 그 날이 6월 1일을 거사일로 잡고 거사장소도 잔치 행사장인 창덕궁 광연전(廣延殿)으로 잡았다. 

  제거해야 할 핵심인물은 역시 세조였다. 임금이 행사장에 자리하면 바로 뒤쪽 양옆에 호위무사가 서는데 이들을 운검(雲劍)이라 부른다. 이날의 운검은 유응부와 성승으로 정해졌다. 거사 당일 장소가 비좁다 하여 운검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또 세자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때 성승과 유응부는 그대로 진행하려 하였지만 다음과 같이 일이 어긋났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세자가 오지 않았으니, 한명회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치려하니, 박팽년과 성삼문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본궁에 있고 또 운검을 들이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 만일 여기서 거사하였다가 세자가 경복궁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성패를 알 수 없으니, 다른 날에 임금과 세자가 같이 있는 때를 타서 거사하여 성공한 것만 같지 못하니 그래야 일이 성공된다’하였다.”1)  

  거사가 중단되자 김질이 정창손에게 “먼저 고발하면 부귀를 누리리라”고 함에 정창손이 김질과 함께 세조에게 거사계획을 모두 털어놓았다. 세조는 먼저 성삼문을 체포하여 심문을 시작하였다. 성삼문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성삼문이 남의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가 폐출 당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라며 다음처럼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다”2)

  끝까지 실행하자고 주장하였던 유응부는 고문을 당하는 가운데 성삼문을 돌아다 보면서 다음처럼 말하였다. 

  “사람들이 말하되 서생과는 같이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도다. 지난번 잔치를 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였으니 너희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3)   

  가담한 이들은 모두 죽거나 유배를 떠났고 단종은 끝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 때 죽음을 당한 이를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살아 남은 이를 ‘생육신(生六臣)’이라 불러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김문기  
  생육신: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세조는 1468년 9월 7일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급작스럽게도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지 13년, 그 나이 5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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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394쪽.
2)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396쪽.
3)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397쪽.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7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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