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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릉 1 - 광릉, 태조릉에 버금가는 명당
  • 1628      

글/최열(미술평론가)


도판1.  광릉 하늘에서 본 풍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광릉, 태조릉에 버금가는 명당 

  세조(世祖 1417-1468).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수양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조카의 권력을 찬탈했다. 쿠테타로 집권한 이들의 말로는 대개 끝이 좋지 않은데 수양대군의 끝은 그렇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이 무려 460년을 집권했으니까 사후까지도 놀랍도록 좋았던 왕이었다. 대체 어떤 까닭인가. 비밀은 그의 능에 감춰져 있다. 역사상 가장 빼어난 왕릉은 물론 태조 이성계의 능이지만 그에 버금가는 명당이라고 해도 좋은 광릉이 바로 왕과 왕의 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묻혀 있는 땅이다. 

  1468년 9월 8일 저 수양대군 다시 말해 세조가 승하했다. 하루 앞인 7일에 즉위한 예종은 곧장 세조의 능을 마련하기 위하여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자락에 있던 당시 세종대왕릉을 살펴보도록 했다. 그곳을 답사하고 난 정인지는 쓸만한 땅이 없다고 했고 따라서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을 비롯한 14명의 대신으로 하여금 택지를 조사하라 하였다. 여러 후보지를 물리치고 세곳으로 좁혀졌는데 그 가운데 정흠지의 선산으로 모였다. 산 모습이 기이하고 빼어났다는 중론이었다. 9월 28일 지관 안효례가 먼저 도착해 경기도사와 더불어 주변의 나무를 베어냈다. 9월 30일에는 종친과 대신, 지관이 현장을 답사했다. 토론이 벌어졌고 끝내 가능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10월 2일 드디어 예종이 이곳으로 거동하였다.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역시 안효례가 왕의 눈과 귀가 되었고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정3품의 당상관에 올랐다. 드디어 이 땅으로 결정되었고 정흠지의 선산은 훼철당해야 했다. 정흠지의 아들은 단종복위운동을 세조에게 고변하여 공신이 되었고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차례로 지낸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로 이 정창손의 선산이 다른 왕도 아닌 세조를 위하여 쫓겨나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창손은 충성의 뜻을 접지 않았고 또 다시 예종에게도 충성을 다했다. 1468년 10월 빼어난 무장인 남이(南怡 1441-1468), 강순(康純 1390-1468)을 어이없이 반역죄로 처형하는데 일을 잘했다고 하여 공신에 올랐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정창손은 세조가 폐위시켜 죽여버린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소릉(昭陵) 폐출에 가담했었으며 뒷날 생육신의 한 분인 남효온이 소릉 복위 주청을 하고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또 영의정에 재임하던 때인 1479년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비하려 하자 모호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그 뒤 사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지난 날 연산군의 생모 폐출 논의에 참여한 죄로 한명회를 포함한 12간(十二奸)의 한 사람으로 지목당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건 살아있는 권력을 위하여 끝까지 충성함으로써 생전에 권좌를 놓칠줄 몰랐지만 이미 살아 생전 생육신의 한 분인 김시습을 비롯한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끝내 부관참시를 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충성을 다 한 주군에게 명당을 빼앗긴 탓이었을까. 세조에게 선산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와 같은 삶을 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곳을 명당이라 하는가 

  광릉은 경기도 양주 동쪽 주엽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세조능은 정남향이고 주산은 운악산, 안산은 백령산이다. 정희왕후능은 북북동남서 방향이고 주산은 운악산, 안산은 천령산이다.

도판2.  광릉 정희왕후능 앞에서 바라본 풍경 -최열 촬영

  이곳의 물줄기는 금천교를 지나 집수정을 통해 봉선사천으로 흘러간다. 입구에 재실이 있고 그 앞에 금천교가 있는데 여기에 하마비가 서 있다. 이 하마비는 왕릉 가운데 오직 하나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다른 능의 하마비는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처럼 이 하마비에 손도 대지 못한 것을 보면 세조의 위엄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일까. 하마비 앞에서 말을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홍살문이 있고 그 동쪽으로 조그만 우물이 있는데 이를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홍살문을 뚫고 한참을 걸어가면 정자각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정자각을 중심으로 양쪽 날개를 펼치듯이 왼쪽으로 세조능, 오른쪽으로 정희왕후능이 장엄하다.


도판3 광릉 어정 홍살문터 동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장영훈 풍수는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이곳 광릉을 “기이한 유두혈의 광릉 명당”1)이라고 지목했다. 배후를 이루는 뒤쪽 운악산 줄기가 세 갈래로 나뉘면서 오른쪽 줄기로 세조릉이, 왼쪽 줄기로 정희왕후릉이, 가운데 줄기의 끝에 정자각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두 팔을 벌려 양쪽 가슴의 젖무덤에 두 개의 릉이 자리를 잡고 가슴과 가슴 사이 정중앙 명치 자리에 정자각이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두 팔로 아이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이 마치 좌청룡, 우백호가 왕와 왕비를 보호하는 형세다. 장영훈 풍수는 이것을 “어미의 품안에 안긴 광릉”2)이라고 표현했다.  
  세조는 풍수전문가였다. 일찍이 28살 때 왕릉의 관(棺)에 관한 연구임무를 띤 수기색제조를 맡았을만큼 밝았으며 따라서 아버지 세종 왕릉이며 형 문종 왕릉 그리고 자신의 첫째 아들이 요절함에 따라 마련한 경릉 설치 때 그는 국력을 동원하여 조사, 토론을 거듭했던 것이다. 특히 단종을 살해한 뒤 단종의 후손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을 마련하기는커녕 시신조차 내친 것은 우주의 기운이 자연의 어느 곳으로 모여드는 일이 없도록 했던 책략이었던 것인데 그야말로 풍수전문가다운 선택이었다. 
  중이 제머리 못깎는다는 속담이 있지만 세조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빨리 썩어야 하므로 석실(石室), 석관(石棺)을 마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두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땅에 묻히고나면 살이 빨리 썩어 혼이 하늘로 올라가게 해야 하고, 뼈는 오랫동안 보존되어 땅 속 혈(穴)의 생기(生氣)를 계속 흡수하여 그 기운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저 돌로 만든 석실과 석관은 시신이 썩는 것을 가로막는다. 세조는 죽어서도 하루빨리 혈에 모여 발생하는 생기 위에 올라타기[乘生氣] 위하여 그렇게 명령을 했던 것이다. 
  이 명령에 따라 대신들은 세조의 광릉에 석실, 석관 그리고 심지어 병풍석까지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세조의 릉 사초지 아랫쪽에 커다란 돌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이 돌은 오로지 세조의 릉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청맥돌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생기를 올라 탐으로써 세조는 자신의 후손으로 하여금 왕위를 460년 동안 끊이지 않도록 했다. 풍수의 힘 바로 그것이었다.


도판4. 광릉 세조능 아래쪽 청맥돌 앞에서 본 풍경 -최열 촬영



도판5. 광릉 세조능 뒤에서 바라본 풍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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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사, 2000. 93.

2) 장영훈,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 대원사, 2000. 93.

글 최열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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