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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릉 3. 동대문에서 정순왕후를 찾다
  • 1602      
동대문에서 정순왕후를 찾다

  오백년 동안 정순왕후는 잊혀지지 않는 왕비였다. 그가 살던 곳 동대문 밖 숭인동 일대는 온통 정순왕후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멀리 영월 장릉을 가서 하루를 머물고 되돌아 오는 길에 남양주 사릉을 들렀다가 귀가한 뒤 매년 6월 4일이면 동대문 일대를 유람할 일이다. 만남과 헤어짐을 생각하고 또 영원한 이별, 오백년의 슬픔을 추억하면서 말이다.


도1. 사릉 문석인 서쪽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영원한 이별의 장소, 영도교에서 

  단종이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영월로 유배를 갈 적에 부인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한 곳이 있다. 청계천 8가로 동묘에서 청계천쪽으로 가면 낯설기 그지 없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게 영도교다. 영도교는 왕과 왕비의 이별을 지켜 본 백성들이 ‘영이별 다리,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고 그 뒤 성종이 나무다리를 헐고 규모있는 돌다리로 신축한 다음 친히 ‘영도교(永渡橋)’라는 이름을 짓고 글씨를 써서 새기도록 했다.1)
 
  재미있는 것은 성종이 썼다고 하는 永渡橋라는 한자 이름에도 불구하고 무려 다섯 가지의 한자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永渡橋는 물론 永尾橋, 永美橋, 潁尾橋, 潁眉橋 하는 식이다. 아무튼 이 영도교가 있는 동부 숭신방(崇信坊) 일대를 영미동(潁尾洞)이라고 하였데2) 어떻게 쓰던간에 왜 이렇게 다섯 가지나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숱한 사람들이 저 나름으로 세조와 단종과 정순왕후 이야기를 하며 이래저래 부르던 이름을 제각각 표기하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또 다른 단서는 남편 단종을 보내놓고서 궁궐로 돌아갈 수 없었던 정순왕후가 터를 잡은 곳이 그 영도교에서 가까운 청룡사(靑龍寺) 정문 옆 연미정(燕尾亭)의 곁이었다는 사실이다. 연미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대를 연미정골[燕尾汀洞]이라 했는데 이 고을의 제비꼬리[燕尾]와 저쪽 다리의 냇가 끝[潁尾]이 비슷한데 착안하여 그렇게 비슷비슷하게 부른 것 같다.     

  그 이름이 여럿인만큼 운명도 기구했는데 1860년대에 이르러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 다리를 헐어다가 경복궁 석재로 사용하고 일부만 남겨 돌이 띄엄 띄엄 있는 다리로 바뀌었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대원군 때의 다리를 철거하고 콘크리트 다리로 개축했다. 이것도 반세기를 버티지 못했다. 6.25전쟁 뒤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철거당했으며 세기가 바뀐 2005년 청계천을 뒤덮은 복개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영도교를 신축한 것이다. 누군가를 이를 복원이라고 하지만 옛 흙다리나 성종 때의 돌다리가 아니고 일제의 콘크리트 다리로 되돌아간 것이니 복원이라고는 못하겠다. 


정업원 터 

  종로구 숭인동 17번지, 청룡사 정문 옆 연미정 곁에 정업원(淨業院)이 있었다. 남편 단종을 보낸 정순왕후 송씨가 지은 작은 초가집이다. 보잘 것도 없는 아주 헐거운 초가집을 짓고 그 이름을 정업원이라 한 다음 시녀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 셋을 데리고 입주했다. 

  청룡사는 고려 의종(毅宗) 때인 1158년 희종법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람들은 이 절을 새절승방이라 불렀는데 43년 전인 1115년 창건한 북쪽 고개너머 보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청룡사는 숭인동 17-1번지에 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곳 청룡사에는 정순왕후와 더불어 한가할 때면 세 시녀가 함께 두던 ‘고누놀이판’(도3)이 1960년대까지도 있었다.3)
 


도2. 정업원 구기 비각 (출처 홍미숙, 『왕의 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


도3. 청룡사 앞 바위의 고누놀이판. 정순왕후와 세 시녀의 놀이장소였다.(출처 김영상, 『서울육백년』 4권)


  특히 청룡사에는 우화루(雨花樓)란 건물이 지금도 있는데 단종과 정순왕후가 헤어지기 전 날 밤을 지새던 곳으로 이별을 앞두고 빗물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빗대어 꽃비라고 한 그 이름이 아름답고도 슬프다. 

  정순왕후가 이곳 정업원에 터를 잡은 까닭은 이별의 장소인 ‘영영 건넌 다리’에서 멀지 않기도 했지만 청룡사며 연미정 정자에 오르면 남편 단종이 유배가 있는 영월쪽으로 시야가 환히 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연미정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해서 아침저녁으로 높은 봉우리를 찾아 갔는데 이곳이 동망봉(東望峯)이다. 지금 동대문구 숭인근린공원 일대로 여기엔 동망봉 산신각이며 쉼터도 있는데 산신각에서는 산신제도 지내곤 한다. 
  유본예는 《한경지략》 궁실조의 <정업원>에 다음처럼 썼다. 

   흥인문 밖 동망봉 밑 연미정동(燕尾汀洞)에 있다. 즉 단종왕비 정순왕후 송씨가 궁을 물러난 뒤에 거처하던 옛터이다. 영조 47년에 어필로 ‘정업원 옛터[淨業院舊基]’ 5자를 써서 비석을 세우고 또 ‘동망봉(東望峯)’ 3자를 써서 정업원 맞은 편 산 위의 돌에 새기라 하였다. 즉 송씨가 올라가서 영월 단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곳이다.  
  상고해 보면, 지금의 정업원에는 집이 없고 하나의 돌장기판이 있다. 또 지금 동문 밖 관왕묘 앞에 여인들의 채소 파는 시장이 있다.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단종비 송씨가 정업원에 있을 때에 채소의 공급이 떨어져서 동교의 여인들이 시장을 정업원 앞에 개설하고 채소를 거두어서 공급하였다. 이 뒤부터 여인들의 채소시장이 지금까지 철폐되지 않는다”한다. 
  국조보감에 보면 성종 27년에 성종의 생모 한씨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불상을 만들어서 정업원에 보낸 것을 유생 이벽(李鼊) 등이 가져다가 불태웠다.4) 
  
  이벽(李鼊)이란 인물은 선조 때 공신으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박여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공신에 올랐다. 인수대비가 발원한 불상을 파괴할 정도로 불교에 대한 적개심이 깊었던 유가근본주의자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혼란스러운 바가 있다.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정업원에 왜 인수대비가 불상을 보냈을까 하는 것이다. 한스러운 생애를 위로하려는 뜻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만 본시 정업원은 태종 8년 이전 한양 천도와 더불어 건립한 사찰의 이름이었다. 

  정업원은 고려시대 공민왕비가 주지로 있던 개성의 니승(尼僧) 사찰이었고 모두 사족(士族) 가문출신으로 수십명에 이르렀다. 조선개국과 더불어 천도 때 한양에도 그 전통을 계승해 건립했으니까 이건한 셈이다. 이곳 정업원 주지 공민왕비가 승하하자 소도군처(昭悼君妻) 심씨(沈氏)가 주지를 대신하였고 그 뒤 태종 11년에는 정종비의 제(娣)가 주지를 맡았다. 억불숭유 정책에도 불구하고 정업원은 여전했고 왕실의 보호를 받는 특별한 사찰이었다. 세종 때에도 왕실의 여성이 그 주지를 맡아 지속되었지만 유가 유일주의자들의 탄핵으로 말미암아 끝내 세종 30년 11월 혁파하고 말았다. 

  하지만 세조는 재위 3년째 정업원을 다시 세웠으며 다음 해인 4년째 노비 100명을 배치하였고 또 6년째는 추가로 노비 100명을 지급했다. 그러나 성종 17년째 대신들이 나서서 정업원 철거를 주장하기 시작해 끝내 연산군 11년에 혁파당하고 말았다. 그 뒤 명종은 정업원을 인수궁(仁壽宮)이란 이름으로 다시 세웠다. 하지만 아무도 인수궁이라 부르지 않았고 누구나 정업원이라고 불렀다.5)

 이 정업원이 언제까지 존속해는지 뚜렷하지는 않지만 선조 때 유생 이벽이 불상을 파괴했다는 것을 보면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사찰 정업원과 정순왕후의 정업원이 겹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바가 있다. 

  오늘날 숭인동 5번지에 ‘정업원구기’라고 새겨놓은 비석이 있는데 모두 영조가 친히 쓴 글을 새긴 것이다. 정순왕후 승하 251년이 지난 1771년에 왕이 친히 기리는 비석을 새겼는데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인 비각(碑閣) 현판의 글은 다음과 같다. 

  “앞산 뒷바위 천만 년을 가시려나[前峰後巖於千萬年] 신묘년 9월 6일 눈물을 머금고 쓰노라[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 6)


도4. 정업원 구기 비각 처마의 현판 영조 글씨 (출처 김영상, 『서울육백년』 4권)


  이 가슴저린 글도 영조가 직접 쓴 글이다. 정순왕후의 생애는 전설이었고 이백오십년이 흐른 뒤에도 왕이 나서서 그 마음 드러낸 뜻은 당대 백성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려는 것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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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본예 지음, 권태익 옮김, 한경지략, 탐구당, 1974. 177-178쪽. 
2)《한국지명총람》1 서울편, 한글학회, 1966. 32-33쪽. 
3) 김영상, 《서울육백년》4, 대학당, 1996. 134쪽. 
4) 유본예 지음, 권태익 옮김, 한경지략, 탐구당, 1974. 73-74쪽. 
5) 
 <정업원 구기비>,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 1987. 1132쪽. 
6) 
김영상, 서울육백년4, 대학당, 1996. 124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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