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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릉 2. 그 겸손한 아름다움
  • 1399      
사릉(思陵)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최열(미술평론가)

사릉, 그 겸손한 아름다움 


 사릉 전경 (출전《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순왕후는 남편과 자신의 복위가 이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지 몇 해 뒤인 1521년 6월 4일 승하하였다. 이에 중종은 “노산 부인 송씨 상사(喪事)는 의거할만한 전례가 없으니, 마땅히 왕자군 부인 호상(護喪) 예수(禮數)에 의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자 예조가 대군부인의 예에 의하기를 아뢰자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1) 
   
  그녀의 장지는 양주군 건천면에 있는 양자이자 단종의 생질인 정미수 집안의 선산으로 정해졌다. 왜 영월로 가지 않고 양자의 선산으로 장지를 삼았는지 인연이야 알 수 있을 뿐, 그렇다고 해서 양자의 선산으로 장지를 정하라는 법은 없으므로 여전히 장지 선정 이유는 의문으로 남는다. 죽어서도 이별해 있으라는 것이었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정순왕후가 자신의 재산을 정미수에게 의탁한 일이다. 정순왕후가 중종에게 올린 <탁후서(託後書)>에 밝힌대로 재산과 무관하게 이미 정미수는 정순왕후를 “내 몸도 잠시도 어그러짐이 없이 항상 정성껏 돌봐”2) 오던 터였다. 그런 까닭에 정순왕후는 정미수를 시양자로 들였고 뒤에 정미수가 후사조차 없이 먼저 세상을 떠났음에도 정미수의 부인에게 그 재산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해평부원군 정씨 집안에서는 대대로 단종과 정순왕후의 제사를 올렸고 또한 정순왕후의 장지마저 선산에 모신 것이다. 

  정순왕후의 능묘는 처음엔 능(陵)도 아니고 더욱이 사릉(思陵)같은 건 더욱 아니었다. 그런 이름이 붙은 때는 1698년 12월이었고 그 때 처음으로 정순왕후란 위호(位號)를 얻었으니 사릉이란 남편 단종을 생각한다[思]는 뜻이었고 정순이란 “승순히 행하여 어그러짐이 없었던 것을 정(定)이라 하며, 온화하고 도리에 따르신 것을 일컬어 순(順)이라 한다”3)는 풀이와 같은 것이었다.


사릉 배면 (출전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처음 정순왕후 묘는 대군의 예법에 따랐으므로 지극히 단순한 묘였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보는 사릉의 모습은 그 때의 모습이 아니라 1699년 2월 왕릉으로 추봉됨에 따라 몇가지 석물(石物)을 추가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능침의 병풍석이며 난간석도 없으며 석수(石獸) 또한 석양과 석호 한쌍씩 네 마리만 배치해 두었다. 보통 능역 석수는 두쌍씩 여덟마리를 배치하였으니까 절반에 불과하다. 석인(石人) 또한 무석인 없이 문석인 2구만을 배치해 두었다. 

  숙종, 영조가 절반에 불과한 사릉의 석물을 가리켜 “가장 겸손한 예”라고 하였지만 무려 250년을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다가 250년만에 처음으로 왕릉의 예우를 받는 순간 그렇게 겸손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그것도 정순왕후 스스로 겸손한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숙종, 영조가 ‘겸손’을 거론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살펴 보면 사릉은 아담하고 고운 느낌이어서 반듯한 정(定), 거스름 없이 흐르는 순(順), 그윽히 생각할 사(思)와 같은 낱말들과 한결같이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사릉의 풍경은 곱디 고와서 이젠 영월로 보낼 수 없을 것같다. 사람들이 그 사연을 듣고나면 한결같이 사릉을 영월의 장릉 곁으로 옮겨야만 한다고들 한다. 죽어서조차 이별이란 아니될 말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릉을 옮기고 나면 지난 5백년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5백년의 슬픔은 물론, 기억해야 할 것들마저 지워버리고 말 것이다. 역사의 사실은 후손이 변경시키라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1984년 사릉의 소나무 두 그루를 영월 장릉에 옮겨 심었으므로 그 이별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참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정업원으로 들어갈 적에 함께 따른 세 시녀 희안, 지심, 계지도 뒷날 세상을 떠남에 사릉 옆 가까운 땅에 장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4) 아주 가끔 사릉에 갈적이면 그 입구 어느곳에선가 두리번 거리곤 하는데 혹 세 시녀의 묘소가 그 어디메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곤해서다.


사릉 입구. 사릉 주변에 세 시녀가 묻혔지만 흔적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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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414쪽. 
2) 정순왕후, <탁후서(託後書)>,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232쪽. 
3)  <단종대왕 장릉지>, 《선원보감》2, 계명사, 1989. 251쪽. 
4)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435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8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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