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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릉 1. 영원한 이별의 주인공 정순왕후
  • 1287      
사릉(思陵)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최열(미술평론가)


사릉도 2폭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짧은 만남과 영원한 이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나이 열 다섯 때인 1454년 1월 22일 열 네 살의 단종(端宗 1441-1457 *재위1452-1455)과 혼인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 1455년 왕비에서 밀려나 대비(大妃)가 되었고 1457년에는 남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당해 영월로 유배를 떠나면서 자신은 평범한 부인으로 강등당했지만 이것이 영원한 이별일 줄은 몰랐다.  
  정순왕후는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혼인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맑은 덕과 도운 자질을 갖춘”1) 여인이었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1698년 기록인 대제학 서종태(徐宗泰 1652-1719)의 <정순왕후 추상시호 옥책>에는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태와 일찍 터득하신 지혜로 새로 등극한 임금의 시초의 청명함을 도우시고 은밀한 교화가 잠겨 있는 가운데 충실하시어 안팎으로 화목이 원만케 하시었습니다.”2)  

  단종보다도 한 살 위인 정순왕후가 그 지혜로움으로 단종을 은근히 내조하였다는 것이다. 서종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종과 이별 뒤에 정순왕후가 겪어야 했던 일을 다음처럼 기술했다. 

  “하온데 불행히도 시변이 거듭일어나 마침내 조정의 의론이 많이 오류되어 해는 침윤되고 달은 어두워졌으며, 우주를 아울러 밝히는 광채가 색깔을 잃었습니다. 포구에의 사모와 구의산에의 애통함은 창오의 죽음을 뒤쫓지 못하신 통한으로 맺혀 있으사 간약하기 그지 없이 거처하시되 옥체에는 티가 없으시었고 하늘의 순리에 맡기고 또한 쫓으시니 연세는 더욱 오래 누리시었습니다.”3)  

  단종과 정순왕후 부부의 서글픈 생애를 저렇게 묘사한 서종태는 또 홀로 살아남은 정순왕후의 ‘통한’어린 행적이 마치 “꽃나무가 떨어뜨린 향기로운 먼지[芳塵]”와도 같은 생애인데도 땅에 묻히고 가리워졌으니 “뭇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차탄(嗟歎)하여 마지 않사옵니다”라고 흐느끼듯 탄식해 마지 않았다.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마음이다.


사릉 장명등 (출전 《조선왕릉2》 국립문화재연구소)


  정순왕후는 82년의 생애를 살았으므로 그 슬픔이 오래고도 오래였다. 고통의 길이가 그만큼 길었던 것이지만 생각해 보면 남편 단종에 대한 중종의 따스한 말을 듣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중종 11년째인 1516년 10월 그러니까 78살 때의 일이다. 그날 저녁 중종은 경연 자리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노산(단종)의 일은 선조에 있어서도 어렵게 여겼으나 다시 생각하여 보면, 비록 득죄하였더라도 고혼이 되어 의탁할 곳 없는 것이 차마 못할 일이니, 종친으로 하여금 후사를 삼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4)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또 다시 대신들로 하여금 논의를 하게 한 뒤 중종은 다음처럼 전교하였다. 

  “국가가 제사를 베풀면 영구히 흠향하여 폐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의거할 바가 없으므로 입후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더니, 지금 송씨(단종비), 신씨(연산비)가 모두 생존하여 있으니 각각 스스로 입후(入后)하도록 하라 하였다. -중략- 노산 묘에 치제(致祭)하는 절목을 마련하라.”5) 

  이처럼 중종이 양자를 들이라는 전교에 따라 정순왕후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아들인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를 시양자(侍養子)로 들였다. 그리고 12월 드디어 중종은 우승지 신상(申鏛)을 강원도 영월로 보내 치제하기에 이르렀다. 정순왕후가 살아 생전의 일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단종의 능묘를 찾아내고 또 능묘에 직접 제사를 올리는 예를 행하고 또한 자신으로 하여금 제사를 모심에 나라에서 제사에 들어가는 각종 제수용 물품을 공급하여 주는 조치를 하였으므로 정순왕후로써는 절망 속에서나마 희망의 첫단추를 꿰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멀고도 멀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는 무려 250년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했으니까 말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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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왕후 봉왕비 교명>,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62쪽.  
2) 서종태(徐宗泰), <정순왕후 추상시호 옥책>,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64쪽.   
3) 서종태(徐宗泰), <정순왕후 추상시호 옥책>, 《선원보감》3, 계명사, 1989. 164쪽. 
4)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412쪽.   
5) 이긍익, <단종조 고사본말>, 《국역 연려실기술》1, 민족문화추진회, 1966. 412쪽.  
글 최열(미술평론가)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2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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