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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진규 5 - 도쿄에서의 열정어린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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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과 영원의 지향
  무사시노를 졸업한 1953년은 권진규에게 매우 특별한 해였다. 신혼생활을 시작했고, 지난 해 입선했던 이과회 공모전에 다시 <기사>와 <말머리>, <양머리>를 출품하여 특선에 올랐기 때문이다. 수상자에게는 프랑스 유학을 보내주었는데 이런 특전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그러나 일본 국적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유학 특전은 주어지지 않았다. 역량의 탁월함을 과시하는 데 만족해야 했고 서구 진출의 열망은 미래로 넘겨버려야 했다. 그럼에도 권진규는 도쿄를 본거지로 관서의 오사카와 후쿠오카를 오가며 활력에 넘치는 작가활동을 거듭함으로써 점차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1953년 이과전 특선 작품 <기사> <말머리> <양머리> 옆에서 동료들과. 맨 오른쪽이 권진규.


  이 시절 권진규는 너무나도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어서 재료와 기법은 물론 소재 또한 단일한 데 머물 수 없었다. 재료, 기법 면에서 돌이나 나무, 석고는 물론, 진흙을 불에 구워 만드는 테라코타까지 넓혀나갔다. 특히 석고 및 흙, 천 위에 옻나무 액을 칠하는 건칠 기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소재로는 말과 같은 짐승을 주로 골랐지만 여성, 남성을 아우르는 인물상과 더불어 고대 분위기를 품고 있는 추상조각 그리고 불상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혔다. 그 무엇도 가리지 않는 욕망의 기관차와도 같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권진규가 진심으로 탐닉했던 재료는 석조였고 소재는 말과 기사였다. 

  권진규가 처음 공모전으로 선택한 문호가 이과전이었는데 이과전은 스승인 시미즈 다카시가 일찍이 등용문으로 선택했던 관문이었다. 시미즈 다카시는 스물다섯 살이었던 1920년 제6회 이과전에 유화 <풍경>을 응모해 입선에 올라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 후 1923년까지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다. 권진규가 이과전을 출세의 관문으로 선택한 게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낸 작품이 석조였다. 연이은 두 차례 입상작이 석조였던 사실은 또 한 사람의 스승 긴바라 세이고의 생각과도 무관치 않다. 

  긴바라 세이고는 동양의 미를 논하면서 ‘동양에서는 모든 형체의 근원을 돌에서 인식하여 인간의 모습마저도 돌 속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였다. 또 ‘냉정함 속에 생명이 충만하고 또한 마구 노출하지 않는 돌의 자태야말로 그 적막과 힘의 항구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은 ‘중용의 상태이자 노경’이라고 하고서, 그러므로 ‘동양은 돌을 사랑하고 물을 사랑한다’고 하였다. 어쩌면 권진규는 이 시절 돌을 사랑했을 것이다. 

  암컷과 수컷의 말머리 두 점으로 제작한 <말머리>는 적막한 기분을 한껏 이끌어 낸 작품이다. 어딘지 아득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는 두 마리 말이 짓고 있는 표정은 꿈틀대는 동세를 포기한 모습이다. 마치 무덤에 들어앉아 암흑을 응시하는 듯 고요하다. 신바라 세이고의 생각을 그대로 재현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권진규가 깊이 사랑한 것은 돌이었지만 그 깊은 곳엔 바로 적막 또는 긴장의 영원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사>는 말에 올라탄 사람이 견고한 돌 속에 파묻혀 하나가 되어버렸다. 네모난 돌덩어리에 답답하다 싶을 만큼 사람과 말을 가두고서 근육을 부풀려 둠으로써 터져 나올 것 같은 긴장감을 살리고 싶어했다. 마리노 마리니의 말과 부르델의 견고한 질량감을 끌어들이면서도 긴바라 세이고로부터 배운 적막의 미학을 관철하고자 했던 권진규 미학의 총화라고 할 것이다.

  그 뒤 권진규는 여러 점의 말머리를 제작했다. 학창시절부터 후원자였던 무사시노의 이사장 다나카 세이즈는 이과전 입상 작품을 모두 구입하였다. 지극히 단순화한 이 시기의 작품들과 달리 우에키 츠토무가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말머리>는 실제 말의 형상을 많이 닮았다. 사실성을 높이고 구상을 지향하려는 의지를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다. 이 무렵 밑그림으로 그린 소묘들은 말의 여러 자세를 관찰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다른 작품들을 보면 굳이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성이 아닌 추상성, 재현이 아니라 상징, 외형이 아니라 내면에의 탐닉이야말로 권진규의 세계였던 것이다. 말은 일본에서 산신의 의미를 갖춘 수호신이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호감을 얻고 있었던 데다가 조선에서도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바처럼 북방의 신성함을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권진규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운을 갖춘 동물이었던 것이다. 


말과 소년, 테라코타, 35x34x36, 1960년대


  뱀은 오늘날과 달리 옛 동양에서는 죽음을 모르는 영원이었으며 풍요로움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뱀은 신의 몸이자 자신의 조상을 상징한다. 권진규가 제작한 <뱀>은 다나카 세이지가 소장하였는데 아마도 그런 신성함을 숭배하고자 주문했고 권진규가 그 뜻을 아로새겼던 것 같다. 수직의 형태는 동양의 비석이나 무덤을 수호하는 십이지상을 떠올리게 하는 가운데 부르델의 원통과도 같은 기념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열정 어린 나날들
도쿄 무사시노미술학교 작업실에서의 권진규를 찍은 이 사진의 뒷면에는 ‘1955-56 Kwon'이라는 기록이 되어 있다. 프랑스 유학의 꿈이 좌절당한 1953년 이후 그는 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체 탐구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등신대의 대작은 물론 50센티미터 높이의 자그마한 인체 또는 두상 따위를 숱하게 제작했다. <남자입상>과 <남자좌상>처럼 대상을 재현하면서 로댕의 인상파 그리고 렘부르크의 표현파 수법을 적용한 작품도 제작했지만, 눈길을 끄는 작품은 1954년의 <여인입상>과 다음 해 제작한 <여인입상>이다. 1954년의 작품은 석고로 형태를 완성하고 그 위에 건칠을 입혔으며 1955년의 작품은 나무를 깎은 것이다. 주관 감성을 강렬하게 표현한 건칠 작품은 거친 질감의 엄숙함을 풍기는 한편, 양감을 두드러지게 강조한 목조 작품에서는 풍요와 다산의 주술이 떠도는 원시성을 떠올릴 수 있다. 서로 다른 경향ㅇ르 한꺼번에 분출하는 듯하지만 같은 시기에 제작한 <도모의 얼굴>에서는 그 모두를 아울렀다. 부인의 얼굴을 새겼으므로 사랑이 넘치기를 기대하지만 오히려 안정감과 더불어 온화한 엄숙을 잔뜩 강조했다. 특히 <도모의 얼굴 2>는 사실성마저 배제하여 고대 신화 속 인물처럼 여성은커녕 남성도 아닌 중성처럼 묘사하였으니 대상 재현은 무의미했던 것이다.


남자 좌상, 브론즈, 45x22x33cm, 1953년


  1959년 귀국하기 직전 부인 도모와 함께 찍은 사진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듯하다. 다정하기는커녕 나란히도 아닌, 부인을 뒤로 제쳐둔 채 앞에 앉아 두 팔을 벌리고서 도모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이 자세야말로 오직 홀로일 뿐이라는 존재 의식과 그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절실히 드러내 준다. 

  1956년 9월 8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으로 건너온 지 꼬박 10년이 지났고 그 사이 졸업과 결혼까지 했다. 게다가 작가로서 입지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버리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 해를 더 보냈다. 하지만 이제 짐을 꾸려야 했다. 왜 1959년 여름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계속)
 

글/ 최열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1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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