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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진규 4 - 도쿄 시절, 형의 죽음과 일본미술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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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의 죽음

1948년, 권진규는 속리산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성북회화연구소에 계속 나가야할지 서울대학교 미술학부로 진학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일본 유학에 도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임만 가득했다. 그때 일본 의과대학을 졸업한 형 권진원이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이미 일본 체류 경험이 있는 둘째 아들 권진규에게 형을 찾아가 간병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졌다. 일본과 국교 단절에도 불구하고, 선박 운행에 간신히 편승한 권진규는 서둘러 현해탄을 건넜다. 그는 밀항의 길을 선택해 미술가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병상에 누운 형을 돌보는 와중에도 미술대학 입시를 위한 학원을 찾았다. 지난날 다녔던 가와바다화학교가 아니라 이번엔 도쿄 예술원에 입학했다. 계절이 바뀌는 사이 몇 차례나 위기를 넘겼지만, 형의 병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겨울을 넘긴 1949년 봄 얼음이 풀리던 어느 날 형은 급작스레 피를 토하더니 숨을 거두었다. 악성 폐렴이 급속히 도져 손쓸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나는 형을 보며 권진규는 고통스런 시간을 맛보아야 했다. 형의 죽음은 가슴 저린 참담함과 슬픔을 주었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덧없음을 깨우쳐 주었다. 그 느낌은 동굴의 음울한 기운과 다른 것이었다. 동굴에 갇혀 있을 때는 그저 하루라도 빠른 탈출을 간절히 원했지만 피붙이의 죽음, 그리도 존경했던 형의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삶과 그 미래를 상상했다. 현해탄을 건너가면 다시 올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고 이곳에서 미래를 개척하기로 했다. 형의 유해만 서울로 보낸 채 스스로는 도쿄에 계속 남기로 했다. 가족의 뜻을 거스르는 선택이었고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학비 지원을 중단하는 행동으로 반대의 뜻을 보였다.

형의 죽음이 권진규에게 슬픔이나 덧없음의 감정만 남겨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갈등하는 사이에 선 자신의 발견이었다. 두 세계는 착란錯亂의 세계와 평상平常의 세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착란의 세계에서 ‘진실’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때 평상의 세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느 착란자의 영상에서 진실의 편린이 투영되었을 적에, 적이 평상자는 자기 자체를 의심한다”(1972.3.3)


파열의 틈새로 전혀 다른 세계가 모습을 드러낼 때 지금껏 믿어왔던 것이 허위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밀려드는 법이다. 착란의 세상이 어쩌면 진실이라고 느끼는 순간 운명은 이제 비극이다. 진실과 허위 사이에 선 권진규는 두 세계 사이에 생존해 있는 섬이었다. 세계에 대한 짙은 의심이 시작되었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갔다.

일본미술과의 만남

권진규가 일본에 건너간 1948년 8월 직후 도쿄에서는 극동국제군사재판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1947년 5월 전쟁 포기와 평화를 명시한 헌법을 시행한 이래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는데 문화예술분야에서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비판하는 흐름이 일어났다. 평화운동의 한 켠에선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애국심 논의가 급격하게 등장했다. 1947년까지 서양미술 전람회 열풍이 일어났었지만 1948년에 이르러 저 애국이란 구호 앞에 서양이란 주제는 사라져버렸다.

권진규가 도착하기 몇 개월 전인 4월 일본국립박물관은 일본미술사상 최고의 걸작 7백 점을 망라한 <일본미술사종합전>을 열었고, 10월에는 근대시기 5백 점을 망라한 <근대일본미술총합전> 그리고 다음해 10월에는 황실의 보물을 드러내는 <정창원특별전>을 개최했다. 애국의 열풍 속에서 국립박물관은 일본미술의 총본산임을 과시하였고 권진규가 이러한 일본미술의 정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49년 2월 도쿄도미술관에서는 요미우리 신문사가 <제1회 일본 앙데팡당전>을 열어 화단의 당파성과 같은 기존 체질을 일소하고 실력 중심의 혁신 기풍을 일으켰다. 전후 문화운동의 기운이 일어난 것인데 이러한 분위기는 이후 전위미술운동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기도 했다.

무사시노

권진규는 형이 세상을 떠나고서 1949년 9월 제국미술학교의 후신인 무시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제국미술학교는 1929년 10월 개교한 4년제 전문학교로 패전 뒤 군국주의 분위기인 ‘제국’이란 이름을 버리고, 나라현의 지명인 ‘무사시노’로 교체하였다. 관학인 도쿄미술학교에 버금가는 사학으로서 자부심을 갖추었고, 교수진은 일본 미술계 정상급 명성을 지닌 이들이었으며, 특히 동양미술사의 긴바라 세이고나 조소예술의 시미즈 다카시는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긴바라 세이고 교수는 동양미술의 핵심이 ‘전율이 깊이 감추어진 정적과 간소함’이라고 강의하며 동양의 아름다움을 설파했다. 동양의 마음은 ‘어찌하지 못하는 적막에 다다라야만 비로소 그 예술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동양에 대한 긴바라 교수의 이러한 정의는 권진규에게 내면의 미의식으로 다가왔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영혼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짐이었다.


무사시노미술학교의 학우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가 권진규. 1950년대 초.


시미즈 다카시 교수는 부르델의 제자였고 권진규는 이 실습 지도교수로부터 서양 근대 조소예술 세계로 빨려들어갔다. 거칠고 현란한 신화와 견고한 수직의 장엄을 향해 나아간 부르델로부터 배운 시미즈는 그러나 온화한 세계를 지향함으로써 스승의 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권진규가 처음 교실에서 시미즈로부터 기초 기술을 습득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고스란히 시미즈의 착실한 양식을 배울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양미술사 강의를 맡은 이타카키 다카호 교수와 가타야마 도시히코, 마쿠모 쇼노스케로부터 부르델만이 아니라 부르델의 스승 로댕과 마이욜의 작품세계를 배웠고 특별히 마리노 마리니의 작품세계도 배웠다. 시야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시미즈로부터 탈출을 꾀하게 되었다. 1950년인 2학년 이후 권진규는 작업실에 시미즈 교수가 들어오면 자신의 작품에 검은 천을 덮어두고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오곤 했다. 부르델이 로댕으로부터 탈출하는 행위를 권진규는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물론 권진규는 시미즈로부터 충실한 기술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회화수련이 상당했던 듯하다.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는 ‘평면에서 시작하여 입체의 본질로 나아간다’는 시미즈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소묘에 의한 방법’을 기초과정으로 설정해두고 있었다. 프랑스 유학 이전까지 회화를 전공했던 시미즈 자신의 체험을 적용한 것인데 거의 서양화과 수업과정과 일치하는 조각과를 다닌 권진규가 회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

1950년, 권진규는 전란에 휩싸인 조국 소식에도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가족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면 그뿐이었다. 1951년 초 함흥에서 대구로 월남하여 피난살이를 하고 있던 아버지 소식을 들었다. 아침에 눈뜨면 작업도구를 들고 다니며 온갖 소재들을 묘사했고 낮에는 학교에서 조소 작업에 몰두했다. 나이 차이가 많은데다가 워낙 말없는 성품이어서 누구도 말을 먼저 건네지 않았지만 뛰어난 기량으로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학교 이사장 다나카 세이지는 이 이국의 청년으로부터 수업료 대신 작품을 받아 갔다. 학비가 끊긴지 제법 오래였기 때문에 권진규로서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밤엔 직장에 나가야 했다. 심야의 노동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면 서양미술사 화집을 들고 밤을 새웠다. 특히 부르델을 읽기 위해 3년 동안 프랑스어를 수강하였고 불어사전이 닳아빠질 때까지 뒤적였다.

이 무렵 1950년 8월 한 달 동안 열린 <현대세계미술전>은 전후 일본미술계의 화제였다. 요미우리 신문사가 해외 작품을 현지에서 직송해 왔으므로 그 반응이 뜨거웠다. 1951년 2월 마이니치 신문사가 주최한 <일프日佛미술교환전> 또한 권진규의 시야를 넓혀주기에 충분했다. 실기와 이론학습은 물론 대규모 전람회를 관람하는 것만으로도 분주하기 그지없는 세월이었다. 거기에 생계를 위한 야간 노동까지 겹쳤지만 권진규는 전력을 기울여 2학년 때부터는 자신만의 세계를 일궈나갈 창작의 길에 도전했다.


일프미술교환전 벽보. 1951년 2월


습작기로부터의 탈출은 1952년 9월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린 제37회 이과전二科展 공모전에서였다. 석조 <백일몽>을 응모했다. 웅크린 인체를 건축물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부르델의 기념비를 떠올리기에 충분한데 견고한 구조물로서 무겁기만 한 권진규의 내면생활을 압축한 듯한 느낌이다.



<백일몽> 석조, 1952년 제 37최 이과회 공모전 입상 작품


날아든 입선 소식에 비로소 이국 청년의 입가로 웃음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행복이 또 하나 찾아왔다. 바로 오기노 도모라는 서양화과 2학년에 다니는 여학생의 존재였다. 오기노 도모는 아홉 살이나 연상인 조선 청년 권진규와 급격히 가까워졌다. 서른 한 살의 노총각은 처음 만난 여성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을 나누었다. 아득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고향 함흥에서 누이동생과 뛰놀며 명랑했던 어린 시절, 사슴을 새겨 입상했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오기노 도모는 권진규로 하여금 불상 제작 기회를 주었다. 오기노 도모의 부모는 권진규에게 불상을 주문했고 또 나가오카 미술관에 소개하여 구입토록 했다.

이 무렵 동료 센나 히데오는 권진규와 함께 교토 여행을 하면서 전시중인 중국 석불들을 관람했는데, 권진규가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조각을 만들고 싶기 때문에 유럽 특히 그리스에 가보고 싶다.... 돌을 갖고 싶다. 대륙의 돌을 갖고 싶다.”

권진규는 해안의 니가다 지역에 마련해 둔 산장으로 갔다. 불상을 제작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어 두었는데 몇 해 전 일본에 건너오기 앞서 속리산 법주사에 여섯 달을 머물며 미륵대불을 매만지고 작업했던 경험이야말로 이때의 자양분이었다. 더욱이 권진규가 만졌던 미륵대불의 작가 김복진은 일본 불상 조소예술계의 거장 다카무라 고운의 제자였으니 인연의 흐름이 이렇게 이어져 내린 것이다.

1953년 3월 졸업 이후 오기노 노모와 동거생활을 시작했다. 이미 두 사람 사이를 잘 알고 있던 도모 집안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만 권진규의 아버지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여성과의 결혼은 크게 문제없었다고 해도 남은 단 한명의 아들이 누군지조차 모르는 아무개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어렵사리 보내던 약간의 생활비조차 끊겼다. 아버지와 자식이 머무는 서울과 도쿄는 너무나도 멀었다.


마네킹에 채색을 하고 있는 오기노 도모


무사시노미술학교 연구과는 석사과정이지만 교수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었고 제작실을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점에서 오히려 이득이었다. 연구와 더불어 시작한 신혼생활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신혼여행을 마친 다음 조그만 살림집을 유지하기 위해 부부가 나란히 마네킹 회사로 출근해야 했다. 마네킹 색칠을 맡은 오기노 도모와는 달리 권진규는 조소예술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원형 제작 업무를 맡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마네킹은 백화점 같은 곳에서 쓸 수 있는 표준형을 요구했지만 권진규는 개성에 넘치는 변형을 추구했다. 회사의 입장에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이후 권고사직을 당한 뒤 다시 찾은 회사가 동보영화사였고 권진규는 이곳에서 필요한 소도구 제작을 담당했다.(계속)

글/ 최열 관리자
업데이트 2017.12.1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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