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측메뉴타이틀
  • 일본미술관 with 한국미술관
  • 최열의 그림읽기
  • 영화 속 미술관
  • 조은정의 세계미술관 산책
  • 미술사 속 숨은 이야기
  • 경성미술지도-1930년대
  • 김영복의 서예이야기: 조선의 글씨
  • 한국미술 명작스크랩
  • 도전! C여사의 한국미술 책읽기
  • 왕릉을 찾아서
  • 시의도-시와 그림
  •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타이틀
  • 이중섭 - <닭>
  • 464      
이중섭이 닭을 그린 가장 빼어난 작품인 <닭 1>의 형상을 보면 닭이라기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우현리 강서중묘의 <주작도>를 닮았다. 통통한 몸뚱이와 풍성한 날개를 생략한 채 날렵한 선으로 형상화했음에도 우아함과 세련된 자태를 갖출 수 있는 이유는 두 마리의 날렵한 움직임이 빚어내는 율동의 기운 때문이다. 속도감으로 뒷받침된 붓질로 선묘의 동세를 살려냈기 때문에 저토록 추상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중섭 <닭 1> 48.5X32.5cm, 종이에 유채, 1954, 호암미술관


  닭은 새벽을 알리는 태양의 새로 신성한 존재였다. 어둠을 끝내고 빛이 드러남을 예고하니까 혼돈을 끝내고 질서를 알리는 개벽의 전령이다. 그러므로 닭을 그린 세화를 벽에 붙여 재앙을 막았던 풍습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이중섭은 닭만이 아니라 새들을 무척 많이 그렸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까닭에 신성한 영물이었고 그러므로 고구려나 신라의 설화 속에 새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중섭의 새들은 까치, 까마귀, 비둘기, 갈매기 같기도 하고 오리나 봉황 같기도 한데 지금 보는 일련의 작품에 등장하는 새를 닭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생김이 닭과 같아서일 뿐이다.

  1955년 미도파화랑 이중섭 작품전을 알리는 안내장에 인쇄된 「작품목록」에는 ‘17 닭, 18 닭’이라는 명제가 있다. 그 뒤 1971년 조정자는 미도파화랑 출품작으로 두 점의 <닭>을 제시하였다. <닭 1>과 <닭 2>가 바로 그 작품인데 문제는 이에 관하여 다양한 주장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중섭 <닭 2> 29x42cm, 종이, 1954, 국립현대미술관


  <닭 1>에 대하여 조정자는 김광균 소장품이며 제작연대는 서울 시절, 제목은 미도파화랑 작품전을 따라서 <닭>이라고 명기하였다. 하지만 197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전람회에서 그 제목을 <부부>라고 붙였다. 제작 연대도 ‘통영 시절’이라고 했다. 그 뒤 1976년 효문사 간행 『이중섭』에서는 소장자가 김종학, 제작 연대는 ‘서울 시절’ 재료는 ‘종이에 유채와 에나멜’로 바뀌었는데 제목만큼은 여전히 <부부>라고 하였으며 1986년 호암갤러리 이중섭전 때에도 <부부>라는 제목을 유지했다.

  작품의 제목은 작가 자신이 붙이는 것이라면 시비를 따질 게 아니다. 하지만 타인이 붙이는 경우, 그 작품이 다루는 소재나 재료․기법 같은 사실 설명형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두 마리 ‘닭’을 가리켜 ‘부부’라고 규정하는 것은 주제 해석형이어서 사실과 거리가 먼 것이다. 닭이라는 단순 소재를 부부라는 상징 의미로 전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은 <닭>으로 환원해야 하고 또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령 부부 관계라는 해석을 따른다고 해도 그 두 마리 닭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조화일 수도, 불화일 수도 있다. 그 색이 청색과 홍색인데 화폭 상단과 하단에 청색과 홍색 줄무늬를 넣음으로써 이중섭의 제자 김영환은 뒷날 “남녀 간의 애정 뿐 아니라 남과 북으로 갈라선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을 만큼 구분이 너무도 천양지차가 난다. 이처럼 다르게 해석된 까닭은 그 제목의 변천사와 관련이 있다. 

  <닭 2>의 경우도 그렇다. 『신미술』1956년 11월호에 이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면서 제목을 <투계>라고 바꿔버렸다. 두 마리 닭이 싸운다고 해석한 것이다. 작가가 사망한 지 두 달이 지나고서 일이다. 그런데 1971년 조정자의 조사 결과 소장자는 이마동이며, 또 지난날 『신미술』에 도판으로 게재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신미술』의 표기인 <투계>를 따르지 않고 미도파화랑의 이중섭 작품전 때의 기록을 따라 <닭>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1972년 현대화랑 작품전 때 이 작품의 제목을 <투계>라고 했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제목 <투계>가 “이중섭 자신의 명제”라고 밝힌 데 있다. 별다른 설명이 없어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투계인 까닭이 ‘부부 사이에 공동의 문제에 대한 의견 충돌의 회화적 표현’을 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해석은 자유지만 투계를 ‘부부싸움’으로 규정하는 것은 두 마리 닭을 ‘부부’라고 해석하는 바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두 마리 닭이 어울리는 소재를 그린 것을 ‘부부’의 조화나 불화로 해석하는 관점은 작품의 의미와 작가의 상징 의도를 제한하는 행위다. 더구나 작품 제작 연대를 ‘통영 시절’로 바꿨으며, 이에 따라 이후 이 작품은 <투계>, 통영 시절 작품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중섭이 생전에 부부라고 규정했다는 자료가 출현할 때까지는 단순하게 <닭>으로 환원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닭 또는 새를 유사 도상으로 그렸을 때 이중섭은 이후의 논객들처럼 사랑하거나 다투는 부부를 생각할 수도 있겠고, 분단 상황을 떠올릴 수도 있고 또 신성한 존재로서 새로운 희망과 저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작이 지닌 동세를 생각했을 수도 있다. 성공해야 할 개인전을 앞두고 그린 닭이라면 새로운 희망이어야 했고, 따라서 이중섭에게 닭은 새벽의 전령이었다. 입신양명의 뜻을 지닌 사람들이 닭 그림을 걸어두었던 까닭도 그런 것이었다.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
최열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26 14:31

  

SNS 댓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