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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중섭 - 은지화의 기원 <가족, 게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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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은지화는 1951년 제주 시절과 1952년 부산 시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수련용의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이룩된 예술 작품으로 재료 및 형식의 모든 면에서 최초의 발견을 이룩한 위대한 업적이다. 은지화는 기법으로는 소묘, 방법으로는 회화이고 결과에 있어서 관객에게는 완전한 본격회화인 것이다.


<가족 02 게잡이> 8.8x15.4cm, 은지, 개인소장

 
  지금껏 은지화의 기원과 관련한 증언과 기록을 살펴보면, 가장 이른 증언은 1972년 박고석의 「이중섭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이란 글이다. 시기를 특정하지 않은 채 ‘이 무렵’이라고 했는데 문맥으로 보면 아내와 아이들을 도쿄로 보내고 난 뒤 ‘무척 따분하고 외로운 일상의 반복’이라는 서술을 하고서 은지화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이 무렵’이란 1952년 7월 이중섭의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가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인 것이다.


1952년 12월 박고석, 한묵과 함께 기조전 무렵에 찍은 사진


은종이(담뱃갑)에 송곳으로 선을 북북 그은 위에 암비 색깔을 대충 칠한 뒤 헝겊이라도 좋고, 휴지뭉치라도 좋아라, 적당하게 종이를 닦아내면 송곳 자국의 선은 암비 색깔이 남고 여백은 광휘로운 금속성 은색 위에 이끼 낀 듯 은은한 세피아조sepia調가 아롱지는 중섭 형의 그 유명한 담배딱지 그림도 이 무렵에 이룩된 가장 창의적이요, 독보적인 마티에르matière인 것이다.1)

  1973년 고은은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에서 “중섭의 은지화는 훨씬 뒤 그의 피난 생활의 가난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고 이미 그의 도쿄 시대의 초기에 독창적으로 시험한 것”2)이라고 기록한 다음, 이중섭의 제자 김영환의 목격담도 소개했다. 피난지 부산에서 이인범 발레단 작업장에 갔을 때 보았다는 내용이다.

그분은 변소에 가더니 담배 은지가 휴지꽂이에 꽂혀 있더라고 가지고 와서 여간 흐뭇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년 그대로였으니까요. 중섭 선생은 홀hall의 걸상에 그것을 잘 펴놓고 날카로운 주머니칼 끝으로 형상을 파기도 하고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아주 좋은 그림이 될 것 같애’라고 말하면서 은지화를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 같았습니다.3)

  그리고 시인 구상이 부산에 내려와 이중섭을 만났을 때 구상에게 이중섭이 다음처럼 말했다는 체험담도 소개했다.

이즈음은 담배 은지에 그리고 있네. 헤에. 한묵이 양담배 몇 갑을 주길래 그걸 다 피우고 은지에 그림을 새겨봤지. 아주 재미있는 것이 되더군.4)

  1972년부터 1973년 두 해 동안 나온 증언과 기록은 피난지 부산 시절과 도쿄 유학 시절 두 가지다. 그 뒤 꾸준히 나온 증언은 대개 부산 시절을 그 기원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손응성은 1952년 12월 부산에서 기조전에 이중섭과 함께 출품했던 동료 화가인데 1974년 「기조전 무렵」이라는 글에서 이중섭의 은지화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다방 한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담배 속 은박지를 모아 골펜骨pen으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목하게 골펜으로 파인 곳은 ‘세피아’로 채색을 하곤 했다.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얻어먹는 식사지만 조금도 배고픈 낯을 하지 않았다. 그런 때를 무사히 넘기려고 아마 은딱지 그림을 수없이 그렸던 모양이다.5)
 
  또 손응성은 1975년 「그림과 술로 맺은 우정」이란 글에서 이중섭이 은지화를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었다고 적시하였다.

그도 역시 나보다 나을 것이 없는 떠돌이가 되어 다방 같은 데서 담배 은박지를 화포로 대용하고 있었다.6)

  원산 시절을 함께 보냈던 김영주는 1976년 3월 「이중섭과 박수근」이란 글에서 이중섭과 함께 송혜수, 김영주 들이 범일동에 어울려 살고 있었고 여기에 한묵, 정규가 드나들 때의 어느 여름날 다음과 같은 현장을 목격했다고 썼다.

우리가 살던 주위 골짜기에는 미군이 버린 쓰레기가 쌓여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중섭이는 그 더미 속에서 담배나 초콜릿을 쌌던 은종이를 한 아름 가져다가 못과 송곳과 골필 같은 것들로써 그림 아닌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업은 심심풀이로 모두 함께 했는데 선을 다 긋고 난 다음에 번쩍거리는 은종이에 담뱃진을 바르면 제법 침전되고 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늘고 길게 움푹 파인 선이 짙게 돋보이는, 그야말로 색다른 재료에 따르는 표현 방법으로서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7)

  김영주는 은지화의 효과를 공동으로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돌에 새긴 불상의 선과 비슷한 맛”으로 “캔버스나 종이에서 나타낼 수 없는 색다르고 미묘한 표현력에 모두들 놀랐다”는 것이다.

그는 매혹되어 신들린 사람처럼 비지땀을 흘리면서 선을 그으며 “됐디, 됐디” 하고 계속 중얼거렸다. 전쟁의 쓰레기 더미에서 새로운 미학이 탄생했다. 불안과 공포의 피난살이에서 중섭이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추구하던 아름다운 ‘선조線條’의 예술이 우리 땅 남쪽에서 북방 계통의 화가인 바로 그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진 셈이다.8)

  백영수는 1983년 수필집 『검은 딸기의 겨울』에서 이중섭과 함께 잡지 삽화 작업을 하던 시절, 피난지 부산 금강다방에서 이중섭이 은지화를 그렸다고 증언했다.

시간은 남고 지루하기도 하고 일거리가 없을 때면 이중섭과 함께 손장난을 했다. 이중섭은 다 피운 담뱃갑 속의 은박지를 싹싹 펴서 연필로 간단한 것을 그려보곤 하였다.(....) 우리의 놀이를 지켜보던 문인들도 다 피운 담뱃갑의 은종이를 모아서 주기도 하였다.9)

  1986년 도쿄 시절과 제주 시절을 함께 했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는 다음처럼 증언했다.

동경 시절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일본으로 돌아온 후 53년인가-. 그이가 일주일간 일본으로 왔을 때 처음 은지화들을 저에게 보여주더군요. 그때 그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에스키스에 불과한 것이며, 이것을 토대로 해서 형편이 피면 그때 대작으로 완성시키겠다고 했었죠. 그러니까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면서 저에게 맡겼던 것입니다.10)

  이 증언은 이중섭 은지화의 탄생 시기를 확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중섭과 함께 했던 도쿄, 제주는 물론 부산 시절에 이르기까지 은지화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1952년 7월 이전엔 이중섭이 은지화를 그리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야마모토 마사코의 증언을 전제한다면 결국 최초의 증언인 박고석의 목격담처럼 1952년 아내가 일본으로 떠난 7월 이후에서 기조전 개막일 이전인 12월까지 그 5개월 사이 어느 날엔가 은지화를 처음 그렸고, 또 박고석 ․ 손응성 ․ 백영수의 증언처럼 범일동 판잣집이나 광복동 금강다방을 비롯한 다방가 일대가 은지화 발상지다. 뒤이어 이중섭과 함께 1952년 10월부터 몇 개월을 부산 영도에서 함께 거주한 김서봉11), 이중섭의 제자 김영환12) 등도 부산 시절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던 이중섭을 추억한 바 있다.


1952년 부산에 머물 당시 김서봉, 황염수와 함께 찍은 사진.


  하지만 이후 제주 및 도쿄시절에 그가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는 목격담이 등장함으로써 그 기원설은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1951년 제주에서 어울리던 아동문학가 장수철은 1991년 5월 『격변기의 문화수첩』에서 벌거벗은 어린이나 여인의 얼굴 같은 소재를 은박지에 그려서 자신에게 주기도 했다고 증언했고, 2003년9월에는 도쿄 유학시절 함께 어울리던 메이지대학 학생 조병선이 이중섭이 은지화를 그리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는 1952년 7월 직후 피난지 부산 다방가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가장 유력한 설로 두고, 그 밖에 도쿄 유학시절설, 제주도설 또한 염두에 두는 게 지금으로서는 합당하다. 


<정 2> 15.5x19.5cm, 은지 앞면, 1951(추정), 개인소장




(원고 출처: 최열, 《이중섭평전》, 돌베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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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고석, 「이중섭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 『이중섭 작품집』, 현대화랑, 1972년 3월, 107쪽.
2) 고은,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 민음사, 1973, 46쪽.
3) 위의 책, 187쪽.
4) 위의 책, 186쪽.
5) 손응성, 「기조전 무렵」, 『화랑』 3호, 1974년 봄호, 58쪽.
6) 손응성, 「그림과 술로 맺은 우정」,『신동아』, 1975년 8월.
7) 김영주, 「이중섭과 박수근」,『뿌리 깊은 나무』, 1976년 3월, 99쪽.
8) 위의 글, 100쪽.
9) 백영수, 『검은 딸기의 겨울』, 전예원, 1983, 227쪽.
10) 야마모토 마사코 ․  유준상 다담, 「이젠 모두 지나가버린 얘기니까 괜찮습니다-이남덕 여사 인터뷰」, 『계간미술』, 38호, 1986년 여름호, 47쪽.
11) 김서봉, 「나의 청춘 시절」,『매일경제신문』, 1990년 7월 28일.
12) 「창작의 산실-서양화가 김영환 씨」,『매일경제신문』, 1990년 9월 16일.
최열 관리자
업데이트 2017.09.26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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