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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기의 명필 2 - 선조의 사위 동회 신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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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도성과 백성을 버린 왕으로 기억되는 선조 왕. 그 선조의 사위들 중에 동회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숙옹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글씨를 매우 잘 썼습니다. 선조도 글씨를 잘 쓰고 그의 사위들도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 사위에게 글을 쓰라고 시험하기도 하고 평을 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왼쪽은 <이석형신도비>, 오른쪽은 <이이 신도비>로 신익성의 글씨.


국조인물고에는 그를 "무릇 글씨와 그림에 있어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붓을 종이에 대기만 하면 지극히 정묘하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명에는 "문장이 크고 유창하고 명랑하고 호준豪俊했으니, 시는 격조가 높고 뛰어났으며 문은 한 사람의 것만 오로지 본받지 않았다. 서법의 작은 해서楷書는 이왕(왕희지)에 거의 가깝고 또 팔분과 전주를 잘 써서 당시의 금석문이 공의 글씨를 얻지 못하는 것을 모두들 부끄럽게 여겼으며, 나라의 옥책, 보전, 명정, 신판, 지문은 공의 글씨가 열에 일곱, 여덟을 차지했으니, 또한 가히 그 재주의 훌륭함을 알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익성 그림. 2012년 옥션단 경매에 출품되었던 화첩 중 <백운루도>가 발견되었습니다.
신익성 <백운루도> 《전가홍보첩》 26.5x35.7cm 


신익성의 글씨는 분명 원류는 송설체가 맞지만 많이 변형되어 있어 송설체라고 칭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왕희지에 가깝다고 볼 수 있고, 한석봉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송설체는 멋지게 삐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을 덜 한 느낌이고 갈무리를 짧게 끊습니다. 한석봉도 그렇고 신익성도 그렇습니다. 특히 신익성의 글씨는 획이 가느다란데, 일단 획이 가느다랗게 나오면 획의 강약이 보여지지 않고 송설체의 느낌이 나지 않게 됩니다. 


신익성의 글씨


신익성과 친분이 있던 사람 중에 잠곡 김육(潛谷 金堉, 1580(선조13)~1658(효종9))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동법을 시행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가평 쪽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집권을 하면서 나라 정세가 어지럽자 선조의 사위였던 신익성은 시골 땅에 홀로 농사를 짓던 잠곡 김육을 찾아갔는데, 이때의 작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소를 빌려 밭을 갈던 김육은 빌린 소로 밭을 갈아야 하는 형편이기에 밭을 부지런히 갈겠다고 하니 익성은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일을 끝내고 김육의 집에 가보니 방이라고는 아래, 위를 구분하여 아래는 안방으로 위는 사랑방 겸으로 쓰고 부엌이 하나 딸린 정말 초라한 초가삼간이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김육은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구해 손수 썰어 신익성과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둘이 술을 나누는 사이 아래칸의 방에서 김육의 아이가 아이를 낳고 맙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술을 대접받던 신익성이 황망하여 자리를 뜨려고 하자 김육은 “대감이 오시자 내가 귀한 아들을 낳았으니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하며 주무시고 가길 청합니다. 신익성은 이에 감격하여 마침 난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딸과 김육의 아들을 혼인시키기로 약속하며 사돈의 연을 맺었다고 합니다. 

왕의 사위이지만 시골의 삶을 잘 알았고, 혼자서 시와 서에 매진한 세월도 많았던 신익성. 사실 시나 그림은 천재적인 재능만으로도 완성될 수 있지만 글씨는 그렇지 않습니다. 타고난 재능이 있더라도 붓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려면 최소한 4~5년간 매일매일 써야 필력이 생기게 되고, 또 여기에 독서 등 견문을 넓히고 생각이 깊어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내공이 생겨야 글씨의 변화가 생겨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똑같이 베껴쓰기만 한다고 글씨가 느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익성의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신흠입니다. 이분도 송설체의 글씨를 남겼습니다. 신익성의 동생 신익전의 글씨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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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성(申翊聖 1588년(선조 21) ~ 1644년(인조 22)) 호는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  
우참찬 신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대신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로는 회양의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의 「영창대군의비(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다.


관리자
업데이트 2017.12.1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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