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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광훈과 이산해 / 집안과 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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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서 중반까지 글씨 잘 쓰고 시 잘했던 유명한 사람으로 김구, 양사언, 황기로 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무리하기 전에 한두 사람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먼저 짚어야 할 사람은 옥봉 백광훈으로, 그의 시와 글씨가 모두 훌륭합니다. 글씨는 왕희지체 초서를 주로 썼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지금 강릉에 신사임당 글씨라고 알려진 글씨가 한 점 있는데, 여러 정황과 글씨의 형태로 판단했을 때 백광훈이 쓴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백광훈 <칠언시> 지본묵서 첩 30x22cm



강릉 오죽헌 전 신사임당 초서 병풍 


김구와 양봉래, 황기로의 초서를 보면 휘갈겨 마구 쓴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백광훈의 초서는 이와 달리 법도에 충실한 정통파 초서라고 하겠습니다. 황기로의 초서 같은 글씨를 미칠 광(狂)자를 써서 ‘광초’라고 하는데, 당나라 서예가 장욱의 초서를 광초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합니다.  

또 한 사람 북인의 영수로 맹위를 떨쳤던 이산해도 초서로 유명한데, 그는 황기로와 유사한 초서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산해의 집안에서는 그 이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특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산해 <題冠岳山人正覺詩卷> 지본묵서 첩, 세로 23.5cm


이산해는 평생 정파와 당쟁을 이끌던 사람으로, 그의 사위였던 이덕형의 경우는 그 이하 자손들이 모두 남인 계통이 됩니다. 오성과 한음에서 한음 그 이덕형 맞습니다. 이덕형의 친구 ‘오성’ 이항복은 서인 집안으로, 어릴 때의 친한 친구가 집안의 정파로 인해 갈라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글씨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산해가 속한 한산 이씨 집안은 특이한 것이, 집안 내에 대립되는 당파가 팽팽하게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산해와 명곡 이산보는 사촌형제 지간인데, 이산보는 골수 노론이 됩니다. 한산 이씨의 자손으로 현대의 소설가 이문구 씨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이문구 씨의 호가 ‘명천’인 것으로 그 집안임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산해의 직손으로는 독립기념관장이었던 이문원 씨가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던 이태복 씨도 한산 이씨 중 노론 집안입니다. 


  사육신 이개李塏의 경우, 왕권에 저항하는 세력, 지금으로 말하자면 야당 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개의 삼촌은 세자를 키운 스승이었습니다. 이렇듯 집안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집안에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있는 것이 유리한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북인의 경우 특징적으로 한 집안이 모두 같은 당색인 경우가 많아 죽은 인물도 많고 그리하여 몰락한 집안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인의 영수 오준吳竣은, 당대에 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낸 오백령이었고 사촌 육촌 등 모두 대단한 권세를 누린 골수 남인 집안이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숙종 이후 그 오씨 집안이 벼슬을 하지 못했습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권력에 아부하여 나아가려고 하다가 손가락질을 당하고 집안 망신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집안의 당색을 무시하고 권력을 쫓는 경우 안 좋은 결과를 낳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죠. 집안 자존심을 무시하고 잘 나가는 사람의 사위가 된다든지 하여 출세를 구하면 본인이 손가락질 당할 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대접을 못 받게 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송강 정철도 그의 누이 중에 인종의 후궁과 종친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있어 왕실의 인척으로 위세가 대단하였지만 권력을 쫓아다닌다는 이유로 그를 좋게 보지 않아 초창기에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의병장으로 유명했던 고경명高敬命도 아버지 고맹영高孟英이 정치를 농단했던 이량李樑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로 장원급제를 했어도 벼슬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가 그렇게 무서운 시대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글씨를 얘기하다보면 여러 양반들의 삶의 형태를 얘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 중에는 높은 벼슬을 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을 보면 참 다양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비슷한 수준의 관직이라도 서울 가까이에 있으면 월급이 적었는데, 그런데도 벼슬을 얻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서울에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 내려가면 완전히 자유롭고 거의 아무도 터치하지 않게 되지요. 그래서 군수나 현감을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군수나 현감을 구걸하는 행동을 걸군, 걸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앙에 세금만 잘 올려보내고, 양반인 사람을 살해한다거나 하는 중죄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그 지방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됩니다. 반면 지방 아전들은 따로 월급이 없었습니다. 경찰 월급이 적은 나라의 경찰이 돈을 받고 부패하듯, 그때의 아전들도 중간에서 뜯어먹고 백성들을 괴롭혔죠. 위에 올리는 물건 중 반은 중간에서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조선 말기 분원에서 도자기를 500개 보내라고 하면 1000개는 만들어야 제대로 갔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쌀로 통일하여 세금을 내도록 했던 대동법을 일찍 시작했으면 조선 시대 지방 관리들의 부패는 조금 덜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영복 관리자
업데이트 2017.06.28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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