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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론: 조선시대의 인물들과 그 글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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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복 선생님의 조선시대 글씨 이야기를 풀어주시는 칼럼이 새로 연재됩니다. 조선의 글씨가 어떤 흐름을 가지고 이어져 내려왔는지 재미있는 일화를 곁들여 풀어주실 것입니다. 어렵게만 생각되던 서예를 어떻게 감상할 수 있을지 그 기초를 닦는 기회를 마련해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

우리가 보통 조선시대 선비화가들의 덕목이라고 얘기하는 “시서화”라는 말 속에는 시와 글씨와 그림 중에 시가 가장 중요하고 우위에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시가 으뜸이고 그 다음은 글씨여서, 그림보다 더 중요하게 쳤던 것입니다. 


이달 <대송사군정순 만정대간엄 외> 지본묵서 《양현유묵》

허균의 스승이자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던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중종 34)-1612(광해군4))은 글씨가 특별히 뛰어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시를 잘 써서 대우받았던 몇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 외에 조선 초기 노비출신의 어무적魚無迹1이나, 양평의 나무꾼출신 정초부鄭樵夫2 등도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시 하나만으로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조선시대에 시의 위상이 높았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위상이 높았던 서書, 글씨는 대체로 시와 함께 평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글씨 그 자체로 대우를 받았던 사람도 없지는 않은데 유명한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중종 38)-1605(선조38))를 대표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한호는 중인 집안 출신인 것으로 전해지는데, 글씨를 잘 쓴 나머지 중인 최초로 ‘사자관寫字官’ 자리에 오른 사람입니다. 사자관은 승문원이나 규장각의 말단벼슬로 외교문서나 궁중교지, 유서諭書(관리파견공문) 등 주요 문서들을 쓰는 관직입니다. 한석봉은 ‘선조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었다’고 하는데, 높이 평가하고 아꼈다는 뜻입니다. 현재 한석봉이 쓴 공신녹권3도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호 <도잠 「귀거래사」> 지본묵서 《석봉필적 一》


석봉 한호가 1604년에 쓴 교서


사자관 얘기가 나온 김에 떠오르는 몇 사람을 꼽자면 숙종 때 사자관이 되어 청나라 사신으로부터 동방 제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는 이수장李壽長(1661(현종2)-1733(영조9))이 있고, 화원 집안의 현재덕玄在德이라는 사람이 글씨로 대우를 받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학자 중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이 교지 등을 작성했었기 때문에 초기 교지는 거의 초서로 쓰여져 있습니다.

후기로 들어서면 대개 해서로 쓰여지는데, 보물로 지정된 왕지들은 거의 다 초서로 되어 있습니다. 해서나 초서의 특징과 시대와 관련해서는 후에 더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백광훈 <칠언시> 견본묵서


시와 서를 함께 보았을 때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후에 얘기하게 될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1537(중종32)-1582(선조15))입니다. 옥봉은 글씨도 잘 쓰고 시도 훌륭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교하기는 좀 뭣하지만, 당대의 문장가였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1539(중종34)-1583(선조16))의 경우 학문에도 능하고 빼어난 시를 썼지만 글씨는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백광훈의 글씨는 명나라 사신도 감탄케 했다고 합니다.


시는 재주로 볼 수 있어서 그 시를 쓴 사람이 약간 경망하거나 해도 훌륭한 시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글씨는 조금 달라서 그 글씨를 쓴 사람의 덕망과 함께 보게 됩니다. 이에 관해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 중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년(인조19)-1721년(경종1))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양반 글씨는 작대기 글씨라고 하여 그리 훌륭한 글씨는 아니었습니다.


권상하의 필적


하루는 중국 사신이 와서 이 사람의 비석과 글씨를 보고는 비석에 대고 갑자기 절을 했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 주위에서 왜 절을 하느냐고 물으니 사신이 대답하길 “이 정도 글씨인데 비석을 세웠다면 이 양반 덕망이 얼마나 높길래 비석을 세웠겠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글씨를 아무리 잘 써도 덕망보다 아래라는 반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퇴계는 글씨도 좋고 게다가 덕망이 높으니 그 글씨를 더 높게 쳐 주는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이 글씨를 아무리 잘 썼어도 그 사람 글씨는 잘 취급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청명靑溟 임창순任昌淳(1914-1999) 선생이 한석봉에 대해 말하기를 집안이 그리 훌륭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와 글이 너무 가려진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조선시대 때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사람을 평가할 때 집안을 많이 따졌습니다. 집안이 떨어지면 글씨를 한수 접고 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현성의 필적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1542(중종37)-1621(광해군13))은 한석봉과 나이가 한 살 차이로 비슷하고, 율곡 이이와는 같은 과거에 합격한 동방급제 친구 사이였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남창 김현성을 부를 때는 ‘김 공’으로, 석봉 한호를 부를 때는 ‘한 군’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결국 집안 문제인 겁니다. 남창은 최고의 송설체로 불릴 만큼 글씨를 잘 썼지만 결국 석봉 한호에게 밀렸습니다. 집안이나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한석봉이 유명해진 것은 그의 글씨가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조선시대에 글씨와 관련되어 이야기할 때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그 사람의 당색입니다. 백하白下 윤순尹淳(1680(숙종6)-1741(영조17)), 백하의 제자였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숙종31)-1777(정조1))는 소론 집안이었습니다. 이광사의 제자인 조윤형까지 이 세 사람은 모두 글씨로 유명하며 글씨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론의 글씨 중 특히 윤순, 이광사, 조윤형 세 사람이 글씨 내림이라고도 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백하 윤순 <고시> 지본묵서 1737년


이광사 <오언율시> 견본묵서

이광사의 사위였던 자하 신위는 약간 다른 글씨를 보입니다. 윤석오4 선생은 평생 자하 신위를 사숙하여(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좋아하여 따르는 것) 그 글씨체만 썼습니다. 윤석오 선생도 소론 집안이며, 이 글씨도 소론에 내려오고 있는 서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집안이나 학문적 계통, 개인의 품성에 따라 글씨가 모두 다를 수 있겠지만 크게 보았을 때 조선 초기에는 송설체, 중기에는 석봉체, 후기에는 추사체가 대세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 예를 들면 중기에 윤백하체나 원교체 등이 유행하던 시기도 있는 등의 변주가 있는 것입니다. (계속)

정리: 윤철규, 최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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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무적(?-?) 조선 연산군 때의 시인으로, 사대부인 아버지와 천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관노였다가 글재주로 인해 면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 7년 김해에서 상소를 올려 유교적 이상정치를 실행할 것을 주장했는데, 첫째는 나라의 근본을 바르게 하고, 둘째는 선비의 기를 길러주며, 셋째는 여악(女樂)을 금지하고, 넷째는 술을 금하며, 다섯째는 불교를 금하고, 여섯째는 축성(築城)을 금하라는 것 등이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해 군수가 매화나무에까지 세금을 징수하여 백성들이 매화나무를 잘라내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작매부 斫梅賦>를 지어 김해 군수의 노여움을 사 도망하다 유랑자 신세로 죽게 된다. 그의 시는 주요 시선집에도 실리는 등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2) 정초부(1714-1789) 조선의 노비 출신 시인. 조선 후기 주요 시선집인 '병세집'에는 정초부의 시가 11수나 실려 있다. 유명한 김홍도의 <도강도> 그림에도 정초부의 시가 화제로 써 있다.

3) 
공신을 책봉하고 이들의 공훈을 써서 수여하던 상훈 문서.

4) 
윤여준 전 장관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지냈다.
김영복 관리자
업데이트 2017.08.1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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