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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3. 파리 시내의 동양미술전문 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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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동양 미술을 다루는 전문적인 미술상이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면 시느와즈리가 유행하던 시절 활동했던 마르상 메르시에(Marchand mercier)가 그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는 해도 이들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인테리어 업자에 가까웠다. 업자이긴 해도 또 무엇인가를 직접 만드는 장인은 아니었다. 장인들로 조직된 길드 밖에서 활동하며 주문에 따라 인테리어 용품을 조달해주는 중개업자였다.

앞서도 소개한 것처럼 루이14, 15세 시절에 보이는 중국도자기의 황동 장식이나 일본 칠기판을 사용한 이국적인 설합장 등은 모두 이들 마르상 메르시에가 장인들을 지휘해 만든 것들이다. 그래서 백과사전에도 이들을 가리켜 ‘무엇이든 팔지만 어느 것 하나도 직접 만들지는 않는 사람’으로 기술돼있다.

이들은 작업상 중국 도자기, 일본 칠기를 수집해 다뤘다. 개인을 상대로 팔지는 않았을 뿐 직업적으로 다룬 것은 사실이다. 근대적 전문상인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이후이다.

파리 최초의 동양 미술상은 드스와(Desoye) 부부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이들 부부는 1862년 리볼리가 220번지에 ‘중국 정크선(La Jonque Chinoise)’라는 수입품 가게를 차렸다. 이들 부부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남편 드스와는 몇 년 동안 일본에 체류한 경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개업 이후에도 물건 구입을 위해 두 번이나 일본과 중국을 방문했다. 조금 살은 쪘지만 살결이 희고 곱던 이 유대인 부인 덕분에 많은 단골이 드나들었다고 했다. 마네, 드가, 휘슬러 이외에 당시의 국민 여배우격인 사라 베르나르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참고] 제임스 티소 <일본 화병> 1870년

영국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도 단골 중 한 사람이었다. 그가 1864년 파리에 와 이곳에 들렀던 일이 전하고 있다. 이 집에 걸려 있던 일본 기모노가 마음에 들었으나 망설이는 사이에 일본 소품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제임스 티소가 선수를 쳐 사가는 바람에 며칠이고 분개해 했다는 애기이다. 마당 드스와는 남편이 죽은 뒤에 혼자서 1888년까지 가게를 꾸렸다.

마담 드스와의 가게 이후 파리에 두세 집의 동양미술 판매점이 생겨났다. 하나는 ‘시누와즈리 에 자포누리(Chinoiserie et Japonais)’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과 일본의 자기와 칠기’라는 이름의 가게였다. 그리고 나서 비슷한 시기에 쟈포니즘 전파에 공이 큰 사무엘 빙의 가게(1868년 개업)와 일본인 하야시 다다마사(林忠正)의 가게(1888년 개업)가 잇달아 등장했다. 

세계적인 동양미술 상인으로 이름 높은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의 야마나카 상회가 파리 지점을 낸 것은 1905년이다. 야마나카 상회는 전시 판매 외에도 1906년부터 1922년까지 11번에 걸쳐 중국과 일본미술품을 가지고 경매를 열기도 했다.

야마나카 다음으로 파리에서 주목을 끈 동양미술점은 세테 루(C.T. Loo)의 가게로 그는 1908년에 라이위안 공사라는 가게를 열어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파리 고미술계를 주도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프랑스인이 운영하던 가게로 라이위안 공사 조금 뒤에 블라지 형제가 열었던 중국인도 회사(La Compagne de Chine et des Indes)가 있었다. 이곳은 일본과 중국에서 직접 물건을 수입해 판매하는 회사였으나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며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때 이를 인수한 사람이 로베르 루세였다. 그는 앞서 소개한 대로 기메에 당나라 채색인물용을 다수 기부한 장본인이다.
 
원래 그는 중국과 유럽을 오가는 화물선의 통신사였다. 1920년 처음 중국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때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스웨덴 출신의 동양미술사학자 오스왈드 시렌을 만나게 됐다. 그 덕분에 함께 자금성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고 그러면서 중국 미술에 눈을 뜨게 됐다.


프리드란트 대로변의 갤러리 중국인도회사

파리에 돌아와 동양미술품 수입업자로 변신한 그는 블라지 형제의 회사에 물건을 공급했다. 그러다 1935년에 회사를 직접 인수해 프리드란트 대로로 가게로 옮겼다. 프리드란트 대로는 사통팔달로 뚫려있는 파리 개선문에서 동남쪽으로 난 길이다. 개선문이 있는 에트왈 광장에서 걸어서 200미터 거리에 있다. 그리고 가게 이름에 화랑이란 말을 더붙여서 중국인도회사 화랑(La Gallerie de la Compagne de Chine et des Indes)로 바꾸었다.

이 화랑은 지난 2015년에 창립 80주년을 맞았다. 물론 로베르 루세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현재는 조카가 물려받아 운영 중이다. 창립80주년 기념전에는 루세가 다룬 명품 100점을 다시 불러 모은 기획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는 파리의 주요 미술관과 컬렉터들에게 그가 팔았던 명품들이 다시 모여 매스컴을 통해서도 큰 화제가 됐다.


갤러리 중국인도회사의 내부

그는 생전에 기메, 세르누치는 물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과 클리브랜드 미술관 등과 거래하면서 명성은 쌓았다. 지금도 화랑에 전시돼 있는 인물용, 당삼채, 중국 청화자기 등은 미술관, 박물관급의 수준을 자랑한다.

중국인도회사 화랑이 도자기에서 회화, 금속까지를 모두 커버한다면 생제르맹 데프레에 있는 베르트랑 드 라베른 화랑(Galerie Bertrand de Lavergne)은 동양도자기 전문이다. 생제르맹 데프레에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보자르, 즉 국립고등미술학교가 있는 곳이다.

이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길, 즉 상페르 가, 유니베르시테 가, 바크 대로, 볼테르 대로 등에 감싸인 블록은 카레 리브 고쉬(Carré Rive Gauche)라고 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화랑가로 부상한 곳이다.

카레 리브 고쉬는 ‘센느강 왼쪽의 네모난 동네’라는 말로 전쟁 전에는 아프리카 미술을 다루는 가게들이 몇몇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후에 화랑들이 대거 진출해 현재는 동양미술, 서양 엔티크,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유럽 근현대를 다루는 화랑이 약80곳 정도가 영업 중이다. 


베르트랑 드 라베른의 중국도자기 카달로그

베르트랑 드 라베른은 상페르가에서 보자르와 등을 마주 한 건물의 길가에 있다. 쇼윈도에서 강희제 시대의 청화백자가 전시돼 있다. 실내에는 건륭 시대의 오채 자기들이 가지런히 선반에 얹혀있다. 일본도자기인 이마리의 가키에몬(柿右衛門), 긴란테(金襴手), 아카에(赤繪) 등도 종류별로 있다. 베르트랑 드 라베른은 1985년에 루브르 데 장티케리에서 시작한 화랑이다. 현재의 자리로는 2015년에 이사를 왔다.

베르트랑 드 라베른은 물론 중국인도회사 화랑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위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 그러면 주인이 나오면서 ‘용무는?’하고 물어보는 게 보통이다. 서울과 달리 파리의 화랑 가운데 사전 예약 없이 쉽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0.06.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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