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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2. 중국도자기를 체계적으로 망라한 그랑디디에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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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에서 동양미술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일찍부터 인 1847년부터이다. 그렇지만 이때의 동양은 동남아시아나 극동이 아니라 중동을 뜻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앤티크부가 생겨 이라크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이 부서는 1881년에 동양고미술부로 바뀌었다.

아시아미술품 수집은 이 부서가 생기고 나서부터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미술품이 언제부터 루브르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본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미술은 1892년부터 루브르에 처음 들어갔다. 1892년에 목 조각 그리고 1893년에는 그림이 기증됐다.


그랑디디에 기증 도자기 전시실  

루브르는 제2제정 때부터 민간 컬렉터들로부터 기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1894년에 아주 큰 기증이 한 건 있었다. 6천여 점의 중국도자기가 한꺼번에 기증된 것이다. 이들을 주로 명, 청대 도자기들로 주로 수출용 중국도자기이다. 하지만 그 속에는 1860년 북경 원명원 약탈이후 유출돼 유럽으로 건너온 궁중 컬렉션도 일부 들어있었다.

이를 기증한 사람은 에르네스트 그랑디디에(Ernest Grandidier 1833-1912)였다. 그는 로렌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어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졸업 후에 법률 방면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하던 19세기 후반의 분위기 그대로 그는 젊은 시절 여행을 업으로 삼다시피 했다.
 
1857년부터 2년 동안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했다. 동생 알프레드와 함께 프랑스 문부성의 민속조사 의뢰를 받았다. 그도 여행을 좋아했지만 동생이 보다 전문적이었다. 두 형제는 이때 남북 아메리카를 종단하다시피 했다. 캐나다 북극지방에서 출발해 파나마 협지를 지나 남미의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여행했다.
 
파리에 돌아온 뒨 형은 파리행정심판소 심의관으로 취직하면서 여행과는 거리를 뒀다. 하지만 동생 알프레드 그랑디디에(Alfred Grandidier 1836-1921)는 탐험을 계속해 인도와 아프리카 등지를 여행했다. 그는 결국 마다가스카르 섬의 자연지리전문가로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됐다.

파리에 자리를 잡은 그도 얼마 안 있어 다시 여행에 나섰다. 1870년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이때 중국도자기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매료되면서 컬렉터가 됐다. 그가 수집한 것은 유럽에 전해진 중국도자기였다. 중국의 최상급 황실도자기가 유럽의 미술시장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훨씬 나중이다. 물론 1860년 원명원 약탈이후 조금씩 나돌고 있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것은 1900년의 의화단 사건과 1911년의 신해혁명이 일어난 다음부터이다.


그랑디디에가 펴낸 『중국 도자기』의 속표지

사정은 이렇지만 그는 미지의 땅을 탐험하듯 과학적 기준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계통적으로 중국도자기를 수집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료를 가지고 1894년 프랑스 최초의 중국 도자기 책인 『중국의 도자기(La Ceramique chinoise)』을 펴냈다.

이 책이 계기가 돼 그는 루브르 아시아미술부의 중국도자기담당 첫 큐레이터로 발탁이 됐다. 그리고 이 해에 그는 자신이 모은 도자기를 전부 루브르에 기증한다고 한 것이다. 기증은 두 번에 걸쳐 이뤄졌다. 처음은 큐레이터가 된 해에 기증됐고 나머지는 그의 사후에 유증됐다. 그의 컬렉션은 1945년 국가소장품 재정리 계획에 따라 기메로 이관됐다.

그랑디디에 도자기는 3층 중국전시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가 생전에 체계적 수집에 힘을 기울였던 만큼 이곳은 프랑스에서 중국도자기를 시대별로 기법별로 가장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분채 백화금문 준, 청 건륭제 48cm
 

기증품 중 대표작은 그가 마지막까지 즐긴 뒤 사후에 기증된 분채 백화금문 준(粉彩百花錦文樽)이다. 준은 동그란 항아리와 보다 조금 길쭉한 것을 가리킨다. 분채는 옅은 채색을 선염(渲染)하듯 쓴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을 쓰면 꽃 이파리의 짙고 옅은 색을 한꺼번에 낼 수 있다. 이는 청대 들어 처음 개발됐다. 강희제나 옹정제 때의 분채는 여백을 많이 남기고 꽃문양을 넣었다. 건륭제 때가 되면 이렇게 올오버 페인팅처럼 빈틈없이 꽃을 채워 넣는 게 특징이다.


분채 백화금문 준의 부분

기메 학예실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항아리에는 국화, 모란, 백합, 나팔꽃, 연꽃, 자원, 목난, 연미화, 산다화, 벌개미취꽃(紫苑) 등 10종류 이상의 꽃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메에서 붙인 이름은 <만송이 꽃의 항아리(Vase 'mille fleurs')>이다.



분채 화조문 접시, 청 건륭제 지름 20cm 

이 항아리는 그랑디디에가 수집한 6천 점을 넘는 명청 대 도자기 중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도록마다 올라있다. 그랑디디에는 화사한 문양의 분채를 특별히 좋아했다. 이 외에 역시 분채기법을 쓴 모란과 새를 그려 넣은 접시도 또다른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랑디디에가 루브르 최초의 중국도자기 큐레이터였지만 그도 모르는 것이 많았다. 그가 살았던 시절의 유럽에는 중국 도자기에 대한 지식이 크게 부족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컬렉션 가운데 세계 최고의 명품이 들어있는 줄을 끝내 모른 채 눈을 감았다.

2층 전시실의 19번방에는 한 가운데는 현대도자기 한 점이 놓여있다. 파리에서 활동한 중국화가 주태춘(朱德群 1920-2014)이 세브르 백자에 코발트 안료와 금박으로 추상화를 그려놓은 항아리다. 이 항아리 뒤쪽 벽에 짙은 곤색 바탕에 흰 용 한 마리가 가득 새겨진 매병(梅甁)이 별도로 전시돼있다. 이 병은 원나라 때 만든 청화백자의 일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병이다. 


코발트 유약에 용 문양을 새긴 매병, 원 높이 33.6cm

기메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도자관련 책에도 단골로 실려 있는 병이다. 일본에서는 이 병을 가리켜 남유 용문병(藍釉龍文甁)이라고 소개한다. 남색 유약의 용문양 병이란 제목인데 실은 이것만으로는 병의 모습을 설명하기에 다소 부족한데가 있다. 중국의 도음을 받았는지 기메 제목은 보다 분명하다. 제남유 유백발용문 매병(霽藍釉留白拔龍文梅甁)이라는 캡션이다. 

제(霽)는 비눈 갤 제 자로 아주 맑다는 말이다. 제남유는 아주 맑은 남색 유약이란 뜻이다. 유백발이란 문양이 되는 부분만 그대로 남기고 바탕을 색으로 칠했다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이 매병은 용 부분만 남겨두고 모두 짙은 곤색 유약을 발라서 구웠다.

남유는 산화코발트를 그림 그리는 안료로 쓴 청화와 달리 직접 유약에 섞어 바른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 약간 낮은 온도에서 구우면 이처럼 짙은 곤색을 얻을 수 있다. 이 방법 역시 원나라 때 처음 시도됐다.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유물이 몇 점 밖에 없는 극히 드문 기법이다. 

그랑디디에 생전에는 원나라에서 청화백자를 구웠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것이 영락제가 확인된 것은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1929년 대영박물관 중국도자기 큐레이터 로버트 L. 홉슨이 처음 확인했다.

그랑디디에는 원 청화뿐만 아니라 명나라 때의 청화에 대해서도 정확한 정보가 없었다. 원 이후 명 들어서도 수준 높은 청화백자가 구워졌다는 사실은 그랑디디에가 죽은 뒤 한 세대가 훨씬 지난 1950년대 이후에 비로소 학계에 알려졌다.

미국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의 존 A. 포프(John A. Pop 1906-1982) 관장은 데이비드 경의 화병을 기준으로 이스탄불 토프카피궁의 중국도자기와 이란 알데빌 영묘에 있는 중국도자기의 원나라 양식을 확인하며 명나라 들어서도 수준 높은 청화백자가 구워진 것을 확인했다.

그랑디디에 수집의 청화백자에는 명나라 초인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의 걸작도 들어있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鄭和 1371-1433)를 대장으로 한 대규모 원정대를 중동, 아프리카까지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원정대의 파견목적은 명목적으로는 명의 국위 선양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지의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보물을 찾고자 한 쪽이 더 컸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7차례에 걸친 장화 원정대의 활약으로 중국과 이슬람간의 교역이 과거처럼 활발해졌다.


백자청화 포도문 접시, 명 영락제
 

덤으로 얻어진 게 산화코발트 안료의 안정적인 확보였다. 중앙아시아 초원을 넘어 대제국을 이뤘던 원이 멸망한 뒤 중동산 산화코발트 안료는 한 때 부족사태를 맞았다. 그러던 것이 정화의 원정으로 다시 순도 높은 안료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영락제 때 청화백자의 우수성은 다분히 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19번방에서 원이나 명초의 청화백자 이상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도자기는 묵채(墨彩) 자기이다. 묵채 자기는 오랜 중국도자기 역사 속에서도 거의 소개되지 않는 극소수의 도자기이다. 이는 채색 기법의 완성 뒤에 도자기에도 수묵화와 같은 느낌을 내기 위해 먹을 안료로 써서 개발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문양 내용 역시 수묵의 문인화에 가깝다.


묵채 인물문 접시, 청 건륭제

소개된 두 점 중 하나에는 정원의 괴석에 걸터앉아 분재를 감상하는 문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문인 한 사람이 물가에 앉아 흘러가는 물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두 접시 모두 나무와 문인의 의복선 등에 짙은 먹을 사용해 마치 담채를 가한 수묵화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수묵화 기분을 그대로 내려고 했던지 접시 뒤에는 시구가 있다고 설명문에 적혀있다. 분재 감상 쪽은 ‘이 어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휘파람 불어보니 이곳에 피는 꽃은 향기도 그득하도다(此間抱膝發淸嘯 其地開花多異香)’라는 글귀이다. 물가 선비 쪽은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어본다(臨淸流而賦詩)’로 동진 시대의 문인 도연명의 유명한 「귀거래사」의 한 구절을 따서 적은 것이다.

이들 모두는 건륭제 때에 제작된 것으로 모두 그랑디디에가 수집해 1894년에 기증한 것들이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9.04.2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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