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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3. 세계적인 원나라 청화백자와 명의 이슬람풍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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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전문의 미술관이라면 그 수준을 단 하나의 물건으로 말해주는 것이 있다. 원나라 청화백자이다. 청화 백자는 문양을 그림처럼 그려 넣은 도자기를 말한다. 청화 이전의 문양이라면 파거나 새기거나 아니면 덧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청자 시대의 문양은 여기까지였다. 문양만으로 보면 당연히 한계가 분명했다. 청자는 무엇보다 색채와 형태를 먼저 본다는 말은 이런 한계를 뒤집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도자기 역사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그림처럼 문양을 마음대로 그려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 쓰인 재료는 산화동과 산화코발트 두 가지였다. 산화동은 청자에서 이미 시도된 바가 있다. 그렇지만 가마 속의 고온에 쉽게 날아가 버려 색을 안정적으로 안착시키기가 무척 어려웠다. 반면 산화코발트는 산화동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중국도자기 진열장 모습 

그래서 한번 구워낸 백자 위에 산화코발트로 그림을 그려 푸른색 나는 문양이 넣은 청화백자가 탄생하게 됐다. 도자기에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도자기 발전의 역사에서 보면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한 했다. 이런 의미를 지닌 청화백자는 원나라 때 처음 선을 보였다. 그런데 원나라에서도 청화는 극히 귀했다.


원나라 백자청화 파초화과문 접시, 14세기 지름 45cm     

장식미술관의 도자기 복도에는 이 원나라 청화백자가 한 점 전시돼 있다. 거의 빈틈없이 문양이 꽉 채워진 접시이다. 가운데에 보이는 메인 문양은 큰 파초이다. 위쪽에 대나무 가지가 보인다. 반대편에는 포도 그림이다. 이들 주변에는 수박, 나팔꽃이 보이고 여백을 덩굴로 채웠다. 이는 14세기에 중국 경덕진(景德鎭) 가마에서 구운 것이다. 징더전은 원나라 청화백자의 고향이다.   

그렇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원나라 시대의 청화는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청화는 으레 명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겼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1925년에 원나라 때 청화백자가 구워졌다는 사실이 최초로 밝혀졌다. 이를 확인한 사람은 대영박물관 도자기부의 큐레이터였던 로버트 L. 홉슨(Robert L. Hopson 1872-1941)이었다.


데이비드경 컬렉션의 청화백자 화병 한 쌍

그는 이 무렵 이상한 도자기 한 쌍을 조사하고 있었다. 인도 은행의 설립자 아들로 30살 무렵부터 중국도자기를 수집한 퍼시벌 데이비드 경(Sir Percival David 1892-1964)이 가지고 있던 청화백자 용문 상이병(龍文象耳甁) 한 쌍이었다. 이 병은 인도의 뭄바이 지사이자 중국도자기 컬렉터였던 마운트스튜어트 엘핀스톤 경(Sir Mountstuart Elphinstone 1779-1859)의 구장품이었다.

높이가 63.6cm나 되는 큰 병에는 구름 위에 떠있는 용이 하나 가득 그려져 있다. 병 위쪽에 붙어있는 손잡이는 코끼리 코 형상을 하고 있어 나중에 청화용문상이병(靑花龍文象耳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이 한 쌍의 병 중 하나에 글귀 하나가 적혀 있었다. 목부근에 쓰여진 글귀는 물론 청화로 썼다. 내용은 강서성 옥산현(江西省 玉山縣)에 사는 쟝웬진(張文進)이란 사람이 ‘가족의 번영과 자녀 평안을 위해 향로와 함께 화병 한 쌍을 도관(道觀)에 기부한다’고 했다. 그리고 말미에 지정(至正) 11년이라고 써놓다.

옥산현은 경덕진 남동쪽에 100여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지정은 원나라 마지막 황제 원종 시대의 연호이며 지정11년은 서기 1351년에 해당한다. 이 해에 나중에 명나라를 세우는 주원장이 속한 홍건족이 난을 일으켰다. 아무튼 이로서 원나라 말기에 청화백자가 구워진 사실이 세계 최초로 알려지게 됐다.(데이비드 재단 소장의 이 병은 현재 영국박물관 95번 전시실에 위탁 전시돼 있다.) 

이것이 기준이 돼 이후 세계 여러 곳에서 잇달아 원나라 청화백자의 존재가 확인됐다. 대표적인 곳으로 우선 이란북부 카스피해 쪽의 도시인 알데빌(Ardabil)에 있는 영묘가 있다. 사막을 건너온 중국의 교역품은 이슬람 성인들이 묻힌 이곳에 계속 헌상됐는데 16세기부터 이 일이 시작됐다. 알데빌 영묘에 전해오는 751점의 도자기 가운데 32점이 원나라 청화백자로 판명됐다. 또 이스탄불의 토프카프 궁전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됐다. 이곳에 있는 1만500여점에 이르는 중국도자기 가운데 40점이 원나라 청화백자임이 밝혀진 것이다.
 
중국에서도 1960년 후반부터 원 청화가 발견됐다. 원명의 교체기에 피난을 가면서 귀중품을 땅 속에 파묻은 교장(窖藏), 이른바 땅속 창고에서 원나라 청화백자가 잇달아 발굴된 것이다. 현재 중국 내에 확인된 수는 60여점을 넘는다.    

이처럼 귀한 원나라 청화백자는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앞을 다퉈 탐내는 소장품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장식미술관의 이 접시는 라울 뒤세네르(Raoul Duseigneur, ?~1916)에게 1894년에 구입했다고 돼있다. 미술관 건립이 1905년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 이곳을 사용하던 파리장식미술조합이 구한 것으로 보인다. 

뒤세네르는 고고학에 조예가 깊었던 컬렉터로 직업은 도서관 사서였다. 뒤세네르 이전의 전래는 물론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이를 제외한 자신의 소장품을 훗날 리용 시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원나라 백자청화 모란당초문 항아리, 14세기 높이 33.5cm

장식미술관에는 이외에도 원나라 청화백자 항아리가 한 점 더 있다. 이는 몸체 윗부분이 깨어져있어 상설 전시에는 보통 소개되지 않는 것이다. 2014년 봄에 기획된 중국미술전에 소개된 적이 있을 뿐이다. 기록에는 드로잉 수집가인 줄 마시에(ules Maciet 1846-1911)가 다른 소장품과 함께 이를 유증한 것으로 돼있다.

원 청화백자접시 옆에 있는 조금 푸르게 보이는 백자 병은 명나라 중기 정덕제(正德帝, 재위 1505-1521)때에 경덕진에서 만든 것이다.(푸르게 보인 때문에 청백자 병이라고도 한다) 그는 라마교를 신봉한 것으로 유명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처음 마카오에 나타난 것도 그의 시대였다. 


백자음각 용문 병, 명 정덕연간(1506-1621) 높이 47cm

최근 연구에 의하면 경덕진에는 이 시기에 이슬람 도공이 상주했다고 한다. 청화 백자에 코란 문구를 적어 넣은 것이 이 시기에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백자 병 역시 형태로 보면 이슬람 느낌이 물씬하다. 이슬람의 금속기를 모방했다. 이 병의 받침과 주둥이 그리고 뚜껑에 보이는 황동 장식은 말할 것도 없이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만들어 끼운 것이다.  

이 병은 컬렉터 알렉시 루아르(Alexis Rouart 1839-1911)가 기증했다. 야금공장 사장인 알렉시 루아르는 드로잉과 판화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그렇지만 당시 컬렉터로서 더 이름난 사람은 그의 형인 앙리 루아르(Henri Rouart 1833-1912)였다.


드가가 그린 앙리 루아르, 1875년

앙리 역시 사업가였지만 스스로 그림도 그리던 이른바 일요화가였다. 그는 주로 인상파 그림을 수집했다. 그는 파리 명문고교의 하나로 손꼽히는 루이-르-그랑(Lycée Louis-le-Grand) 출신으로 재학시절 그는 드가와 같은 반 동창이었다. 드가가 그린 그림 중에 공장 앞에 서있는 앙리를 그린 것이 있다. 또 두 형제를 나란히 그린 그림도 있다.

형 앙리는 드가 이외에 들라크루와, 쿠르베, 마네, 르노와르, 밀레, 로트렉, 피카소 등의 그림을 수집했다. 또 드가와의 인연으로 생전에 인상파 전시를 3번이나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그의 방대한 컬렉션은 사후에 자식들에 의해 전부 매각됐다. 이때 매각된 금액은 천문학적 금액에 이르렀고 이때부터 인상파 그림 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는 일화가 있다.

원 청화접시와 함께 있는 전시품은 중국의 법랑기(琺瑯器)이다. 법랑은 도자기와 반대로 유럽에서 중국에 전해진 기술이다. 법랑은 금속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금속위에 불투명 유리질 유약을 녹여 붙인 것이다. 자기가 흙에다 유약을 입혀 강한 유리질 피막을 만들었다면 법랑은  그것을 금속에다 한 시도한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돼 이후 이집트, 중동에 전해졌다. 투탕카멘 왕의 황금마스크에도 이 기법이 쓰였다. 중국에는 유럽 선교사들이 전해주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도자기의 길과 정반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해진 기술이다.

오채 도자기의 최상급 기술로 일컫는 분채(粉彩)도 법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채는 법랑에 사용하는 산화주석 가루에 안료를 섞어 문양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타낼 수 있는 색의 가짓수가 생각 이상으로 많아진다.

뿐만 아니라 점점 짙어지고 점점 옅어지는 그러데이션 효과까지 낼 수 있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54-1722, 재위 1661-1722) 때에 정교한 꽃과 새는 물론 인물 표현이 가능한 두채 자기는 법랑 기법이 어느 정도 모티프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법랑 산수인물문 화반, 명 경태연간(1449-1459) 지름 53.5cm

장식미술관의 법랑기는 모두 유대계 은행가 데이비드 데이비드-웨일(David David-Weill 1871-1952)이 기증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이중국적자인 데이비드-웨일은 현재도 왕성한 활동 중인 투자은행 라자르 프레르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컬렉터로도 유명한데 모이스 드 카몽드처럼 그도 루브르의 친구들회의 부회장을 지냈다.

그의 컬렉션은 3천점도 넘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는 자신의 컬렉션을 1923년과 1928년에 두 차례로 나누어 기증했다. 물가의 앉은 인물을 새긴 이 수반(水盤)은 1928년의 기증품에 들어있다. 이는 명의 일곱 번째 황제인 경태제(景泰帝 재위 1449-1457) 시절에 만들어졌다. 수반 아래에 ‘경태년제(景泰年製)’라고 적혀있다. 명의 법랑 중에서 특히 푸른색 발색이 좋은 것은 경태람(景泰藍)으로 불리며 그 솜씨가 높이 인정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컬렉션은 제2차 세계대전 중 2천점 가까이 나치에 약탈당했다고 전하기도 한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11.18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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