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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3. 18세기 유럽인 想像한 中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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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심 드 카몽드 미술관에는 그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있어도 18세기 그림들뿐이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이 그랑 뷔로의 창가 쪽에 걸린 나신의 여인 그림이다. 바쿠스의 여사제를 그린 것이다. 프랑스에서 신사임당만큼 유명한 여류화가 엘리자베트-루이 비제-르브렁(Élisabeth-Louise Vigée-Lebrun 1755-1842)이 그렸다.  


그랑 뷔로에 걸린 비제-르브렁의 <바쿠스의 여사제>

이 미술관에서 이 그림보다 훨씬 유명한 것이 위에 살롱(Le salon des Huet)에 걸린 6점의 전원풍경 연작이다. 이는 장-밥티스트 위에(Jean-Baptiste Huet 1745-1811)가 1771년에 그린 것이다. 위에는 샹티이 성의 생주리 방에 있는 원숭이 우화그림을 그린 크리스토프 위에 2세의 사촌 동생이다. 그는 루이 15세의 또 다른 정부인 마담 뒤바리(Madame du Barry 1743-1793)를 위해 6폭 연작의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 내용은 전원 풍경속에 감미롭게 사랑을 나누는 양치기 목동 그리고 그의 연인이 주를 이룬다.   


장-밥티스트 위에 그림이 걸린 위에 살롱

모이스는 이 그림을 걸기 위해 방 자체를 6면체로 다시 꾸몄다. 그리고 18세기 그림에 걸맞게 왕실전용의 사본느리(Savonnerie) 공방에서 만든 루이15세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태피스트리도 깔았다. 방 안에 있는 의자는 모두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썼던 것들이다. 


장-밥티스트 위에 <전원 풍경>

위에 그림은 사촌형 이삭과도 관련이 있다. 이삭은 위에가 밑그림을 그린 보베 공방의 타피스트리를 13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이들 타피스트리는 나중에 그의 다른 소장품과 함께 루브르에 유증됐다. 이삭의 컬렉션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지만 파리를 찾는 관광객에게 빼놓을 수 없는 그림들이 다수 들어있다. 

모이스는 장식 미술품만을 수집했으나 형 이삭은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았다. 그림 외에 태피스트리도 구했고 나중에 보게 되는 것처럼 청동기에도 관심이 있었다. 컬렉터로서는 이삭이 훨씬 더 유명했다. 형 이삭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미술 외에 음악도 즐겼다. 음악은 작곡가 수준까지 이르러 자기가 창작한 오페라를 직접 상연해봤을 정도였다.

컬렉터로서의 명성은 특히 인상파 그림과 연관이 깊다. 그는 생전에 개인적으로 드가와 가까웠다. 자주 함께 식사도 했고 왕래도 잦았다. 드가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압상트>나 <다림질 하는 여인> 그리고 <목욕하는 여자> 등 유명한 걸작들은 그가 모두 드가에게 직접 구입한 그림들이다.  


[참고] 드가 <압생트>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모네의 걸작 <피리 부는 소년>과 세잔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도 소장하고 있었다. 이런 그림을 구입하면서 그는 루브르 사람들과도 친했다. 루브르미술관의 후원회인 루브르의 친구들회(la Société des Amis du Louvre)를 맨 처음 만든 것은 이삭이었다. 자신이 회장을 맡아 이끌면서 동생 모이스도 끌어들여 부회장을 맡겼다.  

그런 열성이 있었기에 그는 1897년부터 소장품을 루브르에 기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1년 세상을 떠나면서는 전 작품을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게 기증된 것 가운데 인상파 그림만 159점에 달한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루브르에 걸려있었다.

그러다 인상파 전문미술관으로 주드폼 미술관이 만들어지면서 그의 컬렉션은 주드품으로 옮겨졌다. 또 1986년에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이 탄생하자 이들은 다시 오르세로 옮겨졌다.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이 인상파 미술의 성지(聖地)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다분히 이삭 드 카몽드의 컬렉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니콜라 소티오 제작의 시계

위에 살롱에도 곳곳에 도자기 화병이 장식물로 놓여있다. 그러나 이는 자세히 보면 중국에서 수출된 도자기가 아니다. 세브르에서 모방해 만든 것들이다. 당시 유행한 중국취향에 따라 세브르에서 중국도자기를 본뜬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이런 중국 취향은 시누와즈리(Chinoiserie)라고 한다.


시계의 중국인 조각

세브르산 화병 사이에 놓인 시계 역시 이 중국취향을 말해주는 한 사례이다. 이는 루이15세  궁중에서 이름을 날린 시계장인(匠人) 르나클 니콜라-소티오(Renacle Nicolas-Sotiau 1749-1791)가 만들었다. 여기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조각된 중국인 모습이 장식돼있다.

검은 중국인은 언 듯 보아 아프리카 흑인처럼도 보이는데 실제로 당시 프랑스에 전해진 중국의 대한 지식은 이처럼 뒤죽박죽이었다. 18세기 들어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했지만 이를 채워줄 지식이 태부족이었다.

유럽인이 쓴 중국에 관한 책은 17세기 중반부터에 나오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피상적인 여행기나 혹은 유럽에 앉아서 여러 자료를 종합해 쓴 반 상상에 가까운 책들뿐이었다. 중국에 관한 책으로 맨 먼저 관심을 끈 것은 네덜란드의 여행가 얀 니에호프(Johan Nieuhof 1618-1672)가 쓴 책이다. 여행가인 그는 중국뿐 아니라 인도, 브라질도 여행했고 한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돼 있기도 했다. 

그는 1655년에서 1657년 사이에 광동에서 베이징까지 2400km를 여행했는데 이때의 체험으로 『동인도회사에서 온 대사(An embassy from the East-India Company)』(1665년)를 썼다. 이 여행기는 유럽인이 중국 대륙을 직접 보고 쓴 것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그해 바로 프랑스어로 번역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니에호프 다음으로 동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의사이자 저술가였던 올페르트 다퍼(Olfert Daffer 1639-1689)이다. 그는 서재에 앉아서 자료를 가지고 책을 쓰는 사람이었다. 1668년에 『아프리카지(誌)(Description of Africa)』이란 책을 써서 반응이 좋자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에 관한 책을 연달아 쓰면서 그 중의 하나로 중국에 관한 것도 썼다.

그러나 다퍼는 니에호프와 달리 현지를 직접 여행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네덜란드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책에는 출처미상의 불명확한 내용이 다수 들어있었지만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독자들을 사로잡으면서 각지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18세기 들어 중국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책은 프랑스에서 나왔다. 파리 예수회소속 수도사 장-밥티스트 뒤 알드(Jean-Baptiste Du Halde 1674-1743)는 1702년부터 중국에 가 있는 수도사들이 보내온 편지를 가지고 『예수회선교사 서간집』의 편찬에 종사했다. 그리고 작업 틈틈이 스스로 중국 자료를 정리해 전4권으로 된  『중국전지(中國全誌)』를 펴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중화제국와 중국달단의 지리, 역사, 연대기, 정치, 사물의 기술(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로 매우 길다. 이 책에는 조선에 대한 언급도 약간 들어있다고 전하는데 어쨌든 유럽에 나온 최초의 중국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었다. 실제로 1735년에 나오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즉시 각국어로 번역됐다.

영국의 동양도자 전문가인 올리버 임페이(Oliver Impey 1936-2005)는 당시에 출판된 이런 책에 들어있던 각종 삽화들이 당시의 유럽인들이 생각했던 중국인관(觀)의 기초가 됐다고 말하고 있다. 또 프랑스는 물론 이 무렵 유럽에서 만들어진 도자기 그리고 태피스트리에 등장하는 중국인들 역시 이 책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삽화 속에 나오는 중국인들은 유럽인들의 눈에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그려졌다고 했다.


오뷔송 공방 제작의 태피스트리와 중국도자기

계단을 올라가 식당으로 향하는 복도를 이곳에서는 갤러리라고 부른다. 짧은 복도의 왼쪽 벽에 태피스트리 두 점이 걸려있다. 태피스트리와 마주보고 있는 반대편 벽에는 도자기 장식장이다. 이 장식장 안에는 일본의 이마리(伊万里) 도자기를 모방한 세브르 자기들이 놓여있다. 장 위쪽에 있는 것은 일본 본토에서 만든 이마리 도자기이다.  

이들 일본제, 유럽제 도자기를 마주하고 있는 태피스트리는 모두 오뷔송(Aubusson)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제목은 각각 <중국 정원>과 <중국 춤>이다. 이국적인 풍경에 둘러싸인 중국인들을 소재로 했다. 이들은 우아한 포즈로 정원을 산책하거나 또 높은 대좌에 앉아 무희들의 아름다운 춤을 감상하는 모습이 묘사돼있다.


오뷔송공방 <중국춤> 태피스트리 1750-1770경

이들 태피스트리는 오뷔송의 전속화가인 장-조셉 뒤몽(Jean-Joseph Dumons 1687-1779)의 밑그림을 가지고 태피스리장인 장-프랑스와 피콩(Jean-François Picon, 미상)이 1750년에서 1770년 사이에 짠 것이다. 당시 이 공방에서 짠 중국 인물이 그려진 태피스트리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 이들은 시누와즈리(chinoiserie) 벽걸이라고 불리면서 불티나게 팔렸다.

시느와즈리는 중국취향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이에 대해서 임페이는 보다 정확하게 ‘(18세기) 서양의 미술과 장식에 보이는 오리엔탈 스타일의 영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특히 시느와즈리 태피스트리가 유행한 것은 앞서 소개한 화가 장-밥티스트 우드리에서 비롯된다. 그는 왕실 전용의 보베(Beauvais) 공방을 위해 중국 황제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밑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이 시느와즈리 태피스트리의 효시이다.* 

이때가 1740년대 초이다. 얼마나 인기가 높았는지 10년도 안 돼 오뷔송에서 모방작을 나온 것이다.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에 걸려있는 태피스트리는 오뷔송에 있던 공방에서 우드리의 밑그림을 모방해 만든 것들의 일부이다. <중국 춤> 태피스트리 앞에 놓여있는 화병은 청대에 수출용으로 만들어진 청화백자이다.(y)

*장-밥티스트 우드리 밑그림의 중국황제소재 태피스트리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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