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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장. 저택 전체가 18세기 인테리어미술관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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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프티 트리아농을 본 딴 19세기 부르주아저택

세르누치 미술관을 나와 마주치는 큰 길이 말세르브 가이다. 이 길을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사거리 길모퉁이에 카페가 하나 있다. 고급주택지인 8구의 카페답게 내부가 우아하다. 이름은 그랑 카페 드 라 포스트이다. 실내와 달리 무미건조한 이름은 바로 길 건너편에 우체국이 있어서이다.
   
이 카페와 우체국 사이에 놓인 큰 길이 몽쏘 가이다. 공원 아래쪽 길인 이 몽쏘 가를 따라 5분쯤 걸으면 오른쪽에 미술관 배너가 걸린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동양의 관람객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Musée Nissim de Camondo)이다.


정면 파사드

배너가 걸렸지만 길가에서 보이는 건물은 행랑채에 불과하다. 행랑채의 아치문을 들어서면 흰 모래가 깔린 둥근 중정이 나온다. 이 중정 맞은편에 3층으로 된 본채가 미술관이다.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은 파리에서도 이름난 저택미술관 중 하나다. 20세기 초 파리 대부호 의 한 사람이었던 은행가 모이스 드 카몽도(Moïse de Camondo 1860-1935)가 살았던 집이 그대로 미술관이 됐다.

현재 이 미술관은 파리장식미술관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는 모이스가 사후에 집과 컬렉션을 모두 기증한 때문이다. 기증했다 해도 집 자체가 미술관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카몽도는 집을 지으면서 모든 인테리어를 전부 프랑스 18세기풍으로 꾸몄다.

프랑스의 18세기는 아주 각별한 시대였다. 태양왕인 루이14세(재위 1654-1715)와 그의 증손자인 루이15세(재위 1715-1774)가 통치하던 절대 왕정의 황금기였다. 당시 프랑스 파리는 전 유럽의 문화 중심지였다. 유럽 각국의 왕후귀족들은 누구나 파리 여행의 꿈꾸었다. 또 파리에서의 생활을 동경했다.
     
이 시대에 궁중에서 쓰던 가구와 장식품, 의상은 물론 심지어 먹는 것까지 모두 우미하고 장엄했던 프랑스의 절대 왕권을 상징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영광이 온 누리에 뻗치던 시절의 문화, 특히 궁중의 실내장식 문화를 실물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 이곳 니심 드 카몽도이다.
 
모이스가 이 집을 완성한 것은 20세기 초인 1914년이다. 집을 짓는 데만 3년이 걸렸다. 부친 니심 드 카몽도(Nissim de Camondo 1830-1889)가 살았던 집터에 건축가 르네 세르장(René Sergent 1865-1927)을 불러 짓게 했다. 

세르장은 런던 사보이 호텔과 클라리지 호텔 등의 인테리어를 맡은 실력자였다. 또 당시 유태계 화상으로 이름을 떨치던 조셉 뒤빈(Joseph Duveen 1869-1939)의 런던 집을 지은 경험도 있었다. 뒤빈의 집은 화상의 집답게 집안 곳곳에 그림이나 조각을 놓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모이스의 집을 지으면서 베르사이유 궁의 프티 트리아농을 모델로 삼았다. 프티 트리아농은 루이15세가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어준 이궁(離宮)이다. 당시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그래서 중정에서 바라보는 미술관 외관은 어딘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몽쏘공원 쪽 입구

이 집의 뒤쪽에는 또 하나의 현관이 있다. 몽쏘 공원으로 직접 통하는 곳이다. 이곳에 트리아농에서 시작돼 한때 유행한 말발굽형 포치가 있다. 이 현관 앞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벨에포크 시대를 대표하는 조경사 아쉴 뒤센(Achille Duchêne 1866-1947)이 꾸민 작은 정원도 있다.
 
그는 이 집을 짓는데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다. 200만 프랑을 쓴 것으로 전한다. 요즘 가치로 600만 유로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세르장은 이 가운데 인테리어 비용으로 80만 프랑을 지출했다고 한다. 각 방에 놓인 의자는 루이 14세와 15세 때 쓰던 것을 구해 가져다 놓았고 커튼과 철제 난간을 위해서는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을 불러와 일을 시켰을 정도이다.


재택사무실 역할을 한 그랑 살롱  

이렇게 집짓기에 몰두했지만 일반인들이 생각하듯 그는 자기 자랑이나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는 성격적인 것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파리 상류층의 사교사회를 떠나고 싶어 했다. 시내 한 복판에서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이를 시은(市隱)이라고 하는데 그런 심리 행동을 결심한 데에는 집안일과 은행일 두 가지가 모두 계기가 됐다.  

은행 일부터 설명하면 카몽도 집안의 은행업은 할아버지 시대부터 시작됐다. 모이스의 큰 할아버지 이삭 카몽도는 1802년에 오토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은행을 설립했다. 당시 카몽도 집안은 이스탄불에 살고 있었다. 이들은 스페인통일 이후 유럽에 흩어진 이른바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세파르디계 유대인이었다.

18세기 한 때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에 살기도 했다. 그러다 이스탄불로 건너와 은행을 차렸다. 이 집안의 번영은 그의 동생인 아브라함-살로몬 드 카몽도(Abraham-Salomon de Camondo 1782-1873) 시대부터 시작됐다.

아브라함은 죽은 형을 대신해 1832년부터 이삭 카몽도 회사를 맡아 뛰어난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오토만 제국의 황실과 귀족들을 상대로 대출을 해주는 한편 막 착수된 이스탄불 동쪽의 신시가지 갈라타 지구의 개발을 주도해 큰돈을 벌었다. 또 비엔나, 런던, 파리에까지 영업을 확대해 서쪽에 로스차일드가 있다면 동쪽에는 카몽도가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오토만 제국에서의 장래를 걱정했는지 그는 이탈리아 이주를 생각했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후원하면서 시민권을 얻었다. 이탈리아국왕 엠마누엘 2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아브라함에게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또 세습 사용권까지 챙겨주었다. 이 집안에서 이름 가운데 ‘드’ 자를 넣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탈리아 대신 파리를 택했다. 1869년 모이스 집안 전체가 파리로 이주했다. 이때 기차 한 편을 통째로 세내 이삿짐을 옮겼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됐다. 그는 이미 3년 전에 두 아들 아브라함 베호르 드 카몽도(Abraham-Behor de Camondo1829-1889)와 니심 드 카몽도를 파리에 보내놓고 있었다.

모이스는 이 니심의 아들이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가족을 따라 9살 때 파리로 왔다. 파리에서 아브라함이 자리 잡은 곳은 페레르 형제가 개발한 몽쏘 공원 일대였다. 베호르, 니심 형제도 몽소가 63번과 61번지에 나란히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다 1889년 이 두 형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을 떠났다.

은행은 사촌형 이삭 드 카몽드(Isaac de Camondo 1851-1911)에게 맡겨졌다. 이 무렵 카몽도 은행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장이 된 이삭 역시 은행보다는 음악과 미술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11년에 사촌형이 죽자 그가 은행을 맡게 됐는데 이 무렵이 되면 모이스 은행은 사세가 많이 기울어 서서히 정리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카몽도 저택의 서재

두 번째 계기인 집안일은 보다 결정적인 것으로 부인에 관한 일이다. 그는 은행가였지만 사교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스포츠와 레저를 즐겼을 뿐 내향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31살 때 유태인 은행가의 딸 이렌느 카엥 당베르(Iréne Cahen D'Anvers 1872-1963)와 결혼했다. 두 집안 모두 세파르디계 유대인이었다.

이렌느의 아버지 루이 카엥 당베르(Louis Cahen d'Anvers 1837-1922)는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19세기 후반 파리에 자포니즘이 크게 유행하는데 일조를 한 공쿠르 형제(Edmond de Goncourt 1822-1896, Jules de Goncourt 1830-1870)와 매우 가까웠다.

또 인상파 화가들과도 친했다. 르누아르는 루이의 세 딸을 모델로 종종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장녀 이렌느를 그린 <작은 이렌느>는 오늘날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에밀 뷔엘레 재단 미술관에 소장된 르노와르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참고] 르누아르가 그린 <작은 이렌느>

이 이렌느가 모이스와 결혼한 것이다. 그녀는 19살에 결혼해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들어 갑자기 바람이 났다. 파리에 와 살고 있던 이탈리아 귀족과 눈이 맞은 것이다. 이로서 오랜 별거 끝에 1902년 이들 부부는 합의 이혼했다. 집안이 집안이었던 만큼 이들의 이혼은 파리 상류층 입방아의 대상이 됐다.

이때부터 모이스는 파리 사교계와 거리를 두었고 미술품 수집에 몰두하게 됐다. 몽쏘 공원 옆의 새 집은 그 연장선상에서 지은 것이다. 즉 파리의 사교 생활에서 한 발 비켜나 은거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이었다.

니심 드 카몽도 미술관이 된 모이스의 집은 출발부터 이처럼 가족 사정과 관련이 깊었는데 나중에 집 자체가 미술관이 된 것도 역시 또 다른 가정사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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