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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 파리 동양미술을 도맡은 전설의 딜러 C.T.L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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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누치에 주마기악대 도용을 기증한 주엘릭 형제가 세계적인 컬렉션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딜러인 에드워드 추(Edward T. Chow 1910-1980)가 이들을 뒷받침해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추의 중국 이름은 구염지(仇焱之)다. 강소성 태창 출신으로 스위스로 옮겨와 활동했다.
 
태창은 중국회화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이름을 낯익은 곳이다. 청대 회화를 주도한 사왕오운(四王吳惲) 가운데 제일 먼저 손꼽히는 왕시민(王時敏 1592-1680)이 태어난 고향이 태창이다. 추는 어릴 때 상하이로 나와 진고재(晉古齋)에서 골동을 배웠다. 그리고 1945년 홍콩으로 이주해 가게를 차렸다. 그후 공산당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자 1949년에 다시 멀리 스위스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참고] 법화화조문항아리(h44.5cm)과 청자 팔각병(h22cm)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그에 의해 메이인탕 컬렉션이 거의 대부분이 이뤄졌을 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름난 세계적인 중국도자기 컬렉션은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활약했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것 가운데 명나라 법화화조문항아리(法花花鳥文壺)는 그가 소장했던 것이고 남송 관요 제작한 청자 팔각병은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을 때 에드워드 추가 중간에 나서서 낙찰을 받아준 물건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가 에드워드 추의 무대였다면 전쟁 이전에 추 이상의 역할을 한 중국인 딜러가 파리에 있었다. 세테 루(C.T.Loo)였다. 그 역시 세르누치에 중국 유물을 기증했다. 수나라 석조불두(佛頭) 한 점은 그가 기증했다. 이 불두는 머리 부분만 33.3cm에 달한다. 아마 전체가 있었다면 등신대를 훨씬 넘는 엄청난 크기였을 것이다.


C.T.Loo 기증의 벽지불 두상, 수나라 7세기초 높이 33.3cm 

이 불두의 설명문에는 벽지불(僻地佛)이라고 돼 있다. 벽지불은 스스로 깨달음에 도달한 자를 말한다. 루는 이 불두를 1920년에 기증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는 세르누치에만 기증한 게 아니다. 그의 또 다른 고객이었던 기메에도 여러 점을 기증했다.

세테 루는 전쟁전 파리의 중국미술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의 원래 중국 이름은 노근재(盧芹齋)였다. 그는 절강성 호주(湖州) 출신으로 노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10살 때 고아가 돼 친척 집을 전전하다 이 지역의 생사무역 거상인 장보선의 집에 들어감으로 출세의 발판을 얻게 됐다. 파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집을 통해서였다.  

장의 아들 장정강(張靜江 1877-1950)은 1902년에 주불공사의 수행역으로 뽑혀 파리에 가게 됐다. 이때 그는 루를 데리고 갔다. 당시 루의 나이 22살이었다. 장은 파리에서 공사관 상무(商務)직원으로 정식 임명됐다. 그리고 그 뒤에 공사관을 나와 통윈 공사(通運公司)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는 생사 외에 차와 중국 골동품도 취급했다. 사업이 성공하면서 통윈 공사는 런던과 뉴욕에도 지점을 냈다.

장은 무역에 종사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에서 건너온 무정부주의자들과도 어울렸다. 그리고 파리와 중국을 왕래하던 중 우연히 손문을 만난 것을 계기로 그를 손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이런 인연으로 장은 나중에 국민당 정부에서 고위 관직을 맡게 됐다. 


정치에 기웃거린 장으로 인해 자연히 장사는 루의 몫이 됐다. 루는 6년 동안 통윈 공사에서 일하며 파리 물정은 물론 골동거래 기술도 익혔다. 1908년 그는 독립하면서 이름을 세테 루(C.T. Loo)로 고쳤다. 세테루는 노근재를 웨이드-자일식으로 부른 청차이 루(Cheng-Tsai, Loo)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그가 세운 라이위엔 공사(來源公司)는 번창했다. 그는 파리 컬렉터의 취향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파리의 컬렉터들은 이전부터 전해오는 중국의 수출용 도자기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것을 원했다. 더욱이 시대는 돈황 발굴로 인해 바야흐로 동양 붐이 크게 일고 있던 때였다. 그는 또 빅토르 세갈랑, 에두아르 샤반느, 폴 페리오 등 세르누치 자문역들과도 친했다.

1912년에 베이징과 상하이에 지점을 열고 물건을 조달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에는 미국시장의 성장을 겨냥해 뉴욕에 지점을 냈다. 실제 미국에서의 상대한 고객은 메트로폴리탄, 시카고 미술관, 워싱턴의 프리어 갤러리 등 쟁쟁한 곳들이었다.
 
이런 활약으로 그는 에드워드 추에 앞서 세계를 상대로 활동한 중국인 1세대 미술상인이 됐다. 루 이전에 중국 미술을 세계적으로 다룬 동양미술상은 일본 오사카출신의 야마나카 사다지로(山中定次郞 1866-1936) 정도밖에 없었다.


[참고] 소릉 육준마 부조, 펜실베니아대학

이런 활약상과 달리 중국에서 그의 이름은 악명이 높다. 대놓고 도둑이란 말도 서슴지 않는다. 20세기초 중국이 열강의 침략으로 혼돈에 허덕일 때 문화재를 빼돌려 팔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비난이 집중되는 것은 당 태종무덤인 소릉의 부조이다.
 
당 태종은 중국을 통일하면서 애마 6마리를 번갈아 타며 전장을 누빈 것으로 유명하다. 이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태종의 육준마이다. 그가 죽은 뒤 이 말들을 돌에 새겨 장식으로 썼다. 이것이 소위 소릉 육준(昭陵六駿)이다. 태종 무덤은 근대 들어 1913년과 1917년 두 번에 걸쳐 도굴을 당했다.

도굴할 때 깨진 것 4점은 중국에 놔두고 성한 것 2점이 1918년 무렵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때 그가 관여한 것으로 전한다. 이 준마 부조는 미국에서 구매자를 찾지 못하고 한 동안 펜실베니아대학 박물관에 대여, 전시됐다. 이때 미국실업가 엘드릿지 존슨(Eldridge R. Johnson 1867-1945)는 이를 보고 12만5천 달러를 구입해 학교에 기증했다. 


몽소가와 쿠르셀가 교차로에 세워진 C.T.Loo의 파리 파고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두 번 다시 중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돼버렸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테보가에 있던 가게를 1925년에 몽소 공원 아래쪽에 있는 쿠르셀가 사거리 부근으로 옮겼다. 그냥 옮긴 것만이 아니다. 4층 규모의 탑 모양 건물을 새로 지었다.

탑은 유럽에서 파고다로 불리며 중국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세테 루가 지은 붉은 건물은 즉시 파리 파고다로 불리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실제 건물 안에도 온통 중국식으로 장식했다. 그는 이곳에서 중국 요리사를 불러 중국 요리로 내놓는 파티를 열면서 파리 컬렉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루가 죽은 뒤 파리 파고다는 한동안 그대로 방치됐다. 2010년 개인사업가가 구입해 현재는 이벤트장으로 쓰이고 있다. 세르누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어 쉽게 가볼 수 있지만 외부만 볼 수 있을 뿐 내부는 평소에 공개되지 않는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12.18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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