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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 메디치가 도전한 중국의 청화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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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도자기를 망라해 놓았다는 세브르이지만 중국도자만을 떼어놓고 보면 그렇게 많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수량과 별개로 프랑스 파리에 앉아 중국도자기의 시대적 흐름을 가늠해보기는 충분하다. 한나라 녹유(綠釉) 도기에서 시작해 청나라 채색자기에 이르기까지 고루 갖춰져 있다. 물론 중국도자기의 탁월함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북송 청자와 원대 청화도 있다.
 
본고장 중국 사정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일본에서 이들 북송과 원 도자기 대접은 하늘을 찌른다. 도자기는 서화와 달라 빛이나 온습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이름난 사립 미술관을 가보면 이들 도자기가 상설 전시돼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평소에는 꽁꽁 싸매놓고 특별전 때에만 잠시 꺼내 소개할 뿐이다.

물론 국공립미술관, 박물관의 경우는 다르다고 해도 그에 비하면 그에 비하면 이곳의 대접이 홀대(?)받고 있다고 할 만큼 거리낌이 없다. 중국도자기는 1층에 있는 한중일 도자전시실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지만 상중하 3단으로 겹쳐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극소수만 전한다는 북송 정요(定窯) 자기역시 그 사이에 멋쩍게 끼어있을 정도이다.
 


북송 정요 백자대접
 

북송의 관요(官窯) 중 하나인 정요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신비의 가마였다. 이곳에서 만든 백자는 노르스름한 유백색에 얇은 기벽(器壁)이 특히 유명했다. 세브르에 있는 정요 자기는 백자 완이다. 커다란 연잎 6개를 포갠 모습으로 제작됐다. 정요 백자답게 얇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탁월하다. 입 닿는 부분은 정요 자기의 또 다른 특징의 하나인 철분 안료가 액센트로 칠해져 있다. 
세계적으로 정요자기 이상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자기가 원나라 청화백자이다. 원 청화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수십 점만 알려져 있을 정도로 소수이다. 중국 본토에서도 통일이후 발굴 사업이 재개된 1960년대 이후에 겨우 실물이 확인됐을 정도이다.


청화백자 여의두팔보문 능화반(靑花白磁如意頭八宝稜花盤) 원 지름 60.0cm 

세브르 소장의 원 청화백자는 대형 접시이다. 이는 현재 알져져 있는 원 청화 접시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지름이 무려 60cm에 이른다. 중동에서는 커다란 금속 쟁반 같은데 음식을 담아 많은 사람이 빙 둘러앉아 먹는 습관이 있었다. 이 접시도 그와 같은 전통에 따라 중국에 주문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접시의 주변부에는 원 청화의 특징인 파도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접시 양쪽에 보이는 자기들이 명초의 청화백자들이다. 이들 역시 원 청화만큼 수자가 적어 귀한 대접을 받는 게 보통이다. 원이든 명이든 청화백자가 유럽에 처음 알려진 것은 중국과과 교역하고 있었던 중동을 통해서였다. 당시 유럽에서 중동과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탈리아에 처음 알려졌다. 

일설에는 16세기 피렌체의 메디치가에 이미 수백 점의 중국도자 컬렉션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현재도 전해지며 유럽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메디치가의 중국도자기는 2008년 겨울에 파리에 전시된 적이 있다.


[참고] 메디치가 소장의 원대 용천요 청자병



[참고] 메디가 소장의 명대 청화백자 병

물론 중국도자기만을 전시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없어진 파리 시내의 마이욜 미술관에서 열린 ‘메디치가의 보물’전은 과거 메디치가의 영광을 말해주는 컬렉션 가운데 유럽 각 미술관에 흩어져 전하는 것들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였다. 여기에는 메디치가에서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  뿐만 아니라 메디치가 집안에서 장식품 그리고 먼 이국과의 교역을 통해 수집한 진귀한 물건들이 다수 소개됐다. 

이 중에 중국 도자기 2점도 들어있었다. 하나는 원나라 때 용천요(龍泉窯)에서 만든 청자 병이다. 귀 달린 청자병은 신안해저 유물선에서도 발굴된 적이 있다. 다른 하나는 명 초기의 청화백자 모란당초문 병이다. 두 점 모두 현재는 피렌체 피티 궁전의 은(銀)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15세기 후반 메디치가에서 만든 연질청화백자 도기
 

메디치가는 당시 이들 중국자기만을 수집했던 것은 아니다. 제조까지 시도했다. 16세기 후반 메디치가의 당주였던 프란체스코 1세(Francesco I de' Medici 1541-1587)는 악명 높기로 이름난 군주였다. 폭정 뿐 아니라 아내까지 독살했다는 말이 있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수 없지만 일찍부터 금은세공, 화약, 연금술 등에 관심이 많았다. 직접 연구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는 토렌토에서 도공을 불러 중국 청화자기를 견본을 주면서 제조를 명했다. 이때 토렌토 도공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약간의 백토에 규석, 석회 그리고 명반 등을 섞어 청화백자처럼 보이는 도자기를 만드는데 일단 성공했다.
 
물론 완전한 백자는 아니다. 백토의 자화(磁化)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연질(軟質) 백자이다. 이때가 1575년이다. 조선에도 청자와 백자의 교체시기에 경상도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이런 연질 백자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는 국보172호인 백자상감초화문 편병은 대표적인 연질백자이다. 이 편병이 만들어진 것은 1466년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유럽에서 연질 청화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때 만든 메디치 자기(Medici porcelain) 중 일부가 세브르에도 있다. 접시도 있고 병도 있다. 여백을 많이 둔 문양을 보면 명대 청화백자를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사각 병에 보이는 왕관 밑의 방패는 메디치가의 문장이다.   

메디치가의 연질 청화백자는 그후 유럽에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비슷한 것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만든 청화백자이다. 16세기 후반이 되면 유럽의 아시아 루트에 큰 변화가 생긴다. 중동을 거쳐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들어오던 교역 루트가 16세기 후반에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희망봉 루트로 바뀌게 된다. 바스코다가마가 이루트를 개척하며서 포르투갈은 아시아에 진출 마침내 1557년 마카오에 거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중동을 거치지 않고 중국과 직접 교역하면서 중국 도자기를 유럽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가져온 중국의 차와 비단 그리고 도자기는 리스본을 거쳐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거쳐 유럽 각지로 전해졌다. 자료에 따르면 17세기 초 리스본에는 25곳이 넘는 가게에서 중국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다뤘다고 한다. *


[참고] 리스본 산토스궁 도자의 방 천정
 

당시 사정을 짐작해볼만한 사례가 현재도 남아있다. 리스본에 있느 프랑스 대사관이다. 이곳은 15세기 이래 포르투갈 왕족이 거주하던 산토스궁으로 20세기 초에 프랑스가 구입해 대사관으로 쓰고 있다. 산토스 궁에는 과거 궁중파티에 초대됐던 귀부인들이 잠시 쉬는 곳으로 쓰인 호사스러운 방이 남아있다. 이 방의 장식 중 보는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것은 천정이다. 사각으로 치켜 올라간 천정에 중국 청화백자가 빈틈 없이 붙여져 있다. 모두 260여점에 이른다. 이들은 명대 제작된 것으로 엄밀히 말하면 당시 對유럽 수출용 청화백자였다. 그렇기는 해도 당시 아시아 교역을 독점했던 포르투갈의 부를 상징했던 방임은 말할 것도 없다.


 포르투갈의 중국무역은 17세기 들어 네덜란드가 동인도회사가 설립해 교역에 뛰어들면서 막을 내린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설립 직후에는 해적과 다름없이 포르투갈 화물선을 닥치는 대로 나포했다. 당시 중국에서 돌아오는 포르투갈의 배에는 향신료, 비단, 차를 비롯해 백 수십톤에 이르는 중국도자기가 실려 있었다.
 
중국의 청화백자는 이미 그 무렵 유럽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투명하고 푸른 유약이 청결감을 더해주었고 그 위에 유리처럼 단단했다. 나포된 배의 화물들은 경매에 붙여져 큰 수익을 남겨주었다. 고객은 유럽 각지의 왕후, 귀족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유럽 왕후귀족들 사이에 중국도자기 수집 붐이 크게 일었고 각지에 궁정에 이른바 도자기의 방(the Porcelain Room)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자기에 이어 명청 교체기에는 일본자기도 다뤘다. 델프트 자기는 암스테르담 항을 통해 이들 동양 도자기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17세기 후반부터 만들어졌다. 이른바 값비싼 동양의 수입도자기를 대신했던 대용품이었다.


18세기 델프트 제작의 청화백자 사각병   

중국의 청화백자를 그대로 흉내 낸 이들 델프트의 연질백자는 세브르 1층의 17, 18세기 실에 나란히 소개돼 있다. 병, 접시, 항아리 등 다양하다. 사각 병에 새겨진 문양은 우산을 든 동자를 데리고 화려한 복장을 한 귀인이 산책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병의 측면에는 유럽 왕가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델프트 제작의 청화백자 인물문 항아리 

또 중국 복장을 한 인물들이 여러 명 등장하는 청화백자 산수인물문 항아리도 있다. 청화 백자 그 자체도 그렇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물론 전 유럽에서 중국적인 이미지가 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세일즈 포인트가 되고 있었다.(y)

*오히라 마사미(大平雅巳) 『서양도자입문(西洋陶磁入門)』 이와나미신서(岩波新書), 2008년
*유바 다타노리(弓場紀知) 『청화의 길-중국도자기가 말하는 동서교류(青花の道―中国陶磁器が語る東西交流)』 NHK북스(NHKブックス) 2008년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11.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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