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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 샹티이 성에서 직접 만든 일본풍 도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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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데 집안의 당주들이 동양도자기를 모은 것은 유럽의 다른 왕후귀족들과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유럽에 막 알려지기 시작한 미지의 세계, 즉 동양에 대한 동경과 그곳에서 생산된 사치품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도자기는 유럽에 최고급 사치품 중 하나였다. 이들은 그 무렵 유럽에서 쓰이던 둔탁하고 무거운 도기(陶器)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만큼 수요가 많았다. 그렇지만 멀고 힘든 운송 사정으로 인해 늘 공급이 부족했다.
따라서 만들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를 가져올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런 이유로 유럽 각지에서 일찍부터 동양도자기의 제조가 시도됐다. 샹티이 성의 콩데 집안도 그중 하나였다. 


알현대기실 장식장 속의 차도구 상자


알현대기실의 장식장에 눈여겨볼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오른쪽 장 맨 아래쪽에 있는 차 도구  상자이다. 이는 이른바 휴대용 차도구 세트이다. 찻잔, 찻주전자, 차통 그리고 차 쟁반 등 차도구 일습이 차곡차곡 들어있다.
찻잔은 동양식으로 손잡이가 없다. 또 찻잔과 주전자의 문양 역시 동양풍으로 바위에 매화를 그렸다. 큼직한 여백 공간이 있는 것을 보면 일본도자기 양식에 가깝다. 그렇지만 매화꽃을 나팔꽃처럼 크게 그린 것이 어딘지 어색하게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수입 일본도자기가 아니다. 샹티이 성에서 일본 것을 모방해 만든 것들이다.    
샹티이 성에서 만든 일본풍 도자기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살롱 오를레앙에 별도로 전시돼있다. 살롱 오를레앙은 회화실의 오른쪽에 이어져 있는 방이다. 여기에 오말 공의 본가에 해당하는 오를레앙 집안의 선조들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높다랗게 걸린 초상화 아래에 장식장이 줄지어 있는데 여기에 샹티이 성 제작의 도자기들이 들어있다. 
이들 도자기의 문양도 앞서 차도구 상자에서 본 것처럼 대부분이 화조(花鳥) 문양이다. 그리고 여백을 많이 두고 있는 것이나 간결한 표현 등이 일본적인 느낌을 짙게 풍긴다. 실제로 기모노 차림의 인물을 그린 것도 있다. 이들 모두 샹티이 성 도자공방에서 직접 만들었다.
일본 도자기는 1660년 무렵부터 유럽에 수출됐다. 이 무렵 중국 대륙은 아직 명청 교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중원은 손에 넣었지만 중국 남부해안과 타이완에는 명 잔존세력이 남아 저항하고 있었다. 이들의 소탕을 위해 청 조정이 내린 방책이 해외무역을 금하는 해금령이었다. 당시 인도네시아 바타비아를 거점으로 중국과 교역하던 네덜란드는 이에 큰 타격을 받으며 중국을 대신할 것을 찾으며 일본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때 발견한 것이 이마리(伊万里) 자기였다. 이마리는 알다시피 임진왜란에 끌려온 조선도공을 통해 막 자기 기술을 습득하고 있던 때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키에몬(柿右衛門) 자기가 눈에 띠었다. 가키에몬이란 채색 자기의 일종이다. 명나라에서 개발된 오채(五彩) 기법을 받아들여 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다.
오채란 유약을 입혀 한번 구워낸 다음에 다시 적, 청, 녹, 자색 등의 채색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한 번 더 구운 것을 말한다. 유약 위에 채색그림을 그려 넣어 흔히 유상채(釉上彩) 기법이라고 한다. 가키에몬이란 아리타 도공이 이 기법을 처음 사용해 붙여졌다. 일설에는 전란을 피해 일본에 건너온 중국 도공이 기법을 전수해주었다는 설도 있다.


가키에몬풍의 샹티이공방 접시(1730-1735년경, 지름 35.5cm)와 일본에서 수입된 가카에몬 항아리(1690-1700년경, 높이 34cm)


가키에몬 자기는 우유빛 나는 약간 노르스름한 바탕이 특징이다. 여기에 적, 녹, 청색을 중심으로 한 간결한 화조 문양을 넣었다. 이 가키에몬은 유럽에 소개되면서 본고장 중국 도자기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유럽의 왕후 귀족들은 자기병(porcelain sickness)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동양도자기에 심취해 있었다. 작센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Friedrich August I, 1670-1733, 재위 1694-1733)는 츠빙겐 궁전 옆에 일본자기를 가득 채운 일본궁전(Japon palace)을 짓기도 했다.
이런 열기 속에서 유럽 각지에서 중국과 일본의 자기를 직접 제작하려는 시도가 잇달았다. 프랑스에서는 샹티이 말고도 생클루, 메네시에 등지에도 공방이 만들어졌다. 샹티이에서 이를 총지휘한 사람은 그랑 콩데 공의 증손자인 루이-앙리 드 부르봉-콩데 공(Louis-Henri de Bourbon-Condé 1692-1740)이었다. 애초 그 역시 동양도자기 컬렉터였다. 샹티이 성에 전하는 상당수의 동양도자기는 그의 손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살롱 오를레앙


그는 1725년 샹티이 성 밖, 즉 오늘날 시가지 있는 곳에 도기 제조소를 만들었다. 이때 화학자인 시케르 시루(Cicaire Cirou, 미상)를 불렀다. 그로 하여금 그때까지만 해도 유럽에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카오링(자기의 원료 흙)을 대신할 수 있는 흙을 조합하게 했다.
또 그르노블 출신의 디자이너 장 안트완 프레즈(Jean-Antoine Fraisse 1680-1740)를 데려와 일본 도자기와 꼭 같은 문양을 그리게 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거둬 1730년 무렵부터 상당히 수준 높은 가키에몬 풍의 도자기를 생산하게 됐다. 


상티이 공방에서 제작한 가키에몬풍 도자기들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 알현 대기실과 살롱 오를레앙에 전시돼 있는 일본풍 샹티이 도자기들이다. 이들은 샹티이 도자기라고 부르지만 정확히 말해 자기는 아니다. 강도(强度) 면에서 도기(陶器)를 조금 넘어서는 정도이다. 자기처럼 색도 희고 문양도 비슷해 편의상 자기로 부르는 것이다. 이는 조선 초에 만들어진 연질백자가 엄격한 의미에서 백자와는 다르지만 백자로 통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상티이 공방은 루이-앙리 공이 죽은 뒤에서 계속 번성했다. 이곳 출신 중에는 훗날 만들어진 국립도자제조소인 세브르 공방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도 많았다. 샹티이 도자제조소는 혁명  직후인 1792년에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맥이 끊겼다.(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8.09.1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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