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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사 샐러리맨 화백이 모은 중국서예 최고의 컬렉션 - 다이토구립(台東區立)서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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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세상에는 어느 곳이나 아속(雅俗)이 적당히 섞여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세상에도 애써 고상함을 지키려 하는 곳은 많습니다. 교양의 전당 같은 미술관이나 박물관도 그런 편입니다. 

연꽃이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진흙탕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가 적당한 박물관이 있습니다. 도쿄 다이토구의 네기시(根岸)에 있는 다이토 구립서도박물관입니다. 이곳은 일본 최초이자 동양 최초의 서예전문박물관입니다. 네기시는 도쿄 동쪽관문인 우에노역에 가깝씁니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우구이스다니(鶯谷)역 근처입니다. 역사가 매우 깊지만 어찌된 영문이지 이곳은 도쿄 3대 러브호텔 밀집지역으로 손꼽힙니다.(우구이스다니는 꾀꼬리 우는 계곡이란 뜻입니다)

이 박물관 역시 20채나 되는 러브호텔이 줄지어 있는 좁은 골목길 끝에 있습니다. 초행의 방문객은 공연히 민망해지는 기분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구립과 연관지어 ‘구립은 역시’라는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설립자의 살림집이 애초에 이 동네에 있었습니다.

서양화가이자 삽화가로 유명한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1866-1843)은 자신이 살던 집에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이때가 1936년입니다. 일본 최초의 서예전문박물관의 탄생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가족이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1995년에 다이토구(台東區)에 기증됐습니다. 구에서는 옛 창고 자리에 새로 2층 규모의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곳을 나카무라 후세츠 기념관로 이름 짓고 종이로 된 자료 전시실로 쓰면서 2000년에 재개관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전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서예 자료로 가히 세계 최대 규모입니다. 나카무라는 생전에 법첩, 탁본 그리고 종이 이외의 자료 등 1만8천여 점을 수집했습니다. 서양화가인 위에 막대한 양의 수집품을 생각하면 흔히 부잣집 도련님을 연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반대입니다. 그는 자수성가한 화가입니다. 그리고 컬렉터로서는 샐러리맨 수집가에 가깝습니다.  

그는 도쿄 교바시(京橋)출신입니다. 부친은 우리의 동장(洞長) 보좌역 정도 되는 나누시(名主)의 서기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그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모친의 고향인 나가노(長野)로 내려갔습니다. 가난한 가계로 어려서부터 상가의 사환에서 애보기까지 여러 일을 거쳤습니다. 그러는 가운데도 공부를 놓지 않아 결국 초등학교 교원이 됐습니다.

수학과 미술에 재능이 있어 이를 가르쳤습니다. 한때 수학자가 되려는 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이는 포기하고 미술을 택했습니다. 화가가 되고자 도쿄로 올라와 고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郞)의 화숙에 들어갔습니다. 고야마는 나중에 아사이 추(淺井忠 1856-1907)과 함께 태평양 미술회를 설립한 화가입니다. 나카무라는 이 태평양 미술회를 통해 화가로 등단했습니다. 그 사이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단팥죽 장사를 했는가 하면 삽화도 그렸습니다. 


박물관 맞은 편의 마사오카의 집

삽화 솜씨를 통해 그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를 만났습니다. 마사오카는 일본 근대를 대표하는 하이쿠(俳句) 작가입니다. 결핵으로 일찍 죽었지만 도쿄대학 출신으로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와도 가깝습니다. 나카무라는 그에게 대컬렉션의 계기를 가져다준 주인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사오카 시키가 살던 집도 기념관이 돼 골목길 건너편 박물관과 마주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신문에서 일하던 그는 나카무라에게 삽화 일을 주었고 청일 전쟁의 종군삽화를 제의했습니다. 청일전쟁 종군을 위해 중국에 건너간 것은 그의 서예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1895년 인천을 거쳐 여순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쟁은 끝나버렸습니다. 그는 그곳서 중국 내륙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6개월에 걸친 이 여행에서 중국 옛 건축을 보았고 중국문화의 깊이를 체험했습니다. 


용문이십품 

이때 구한 것이 탁본첩인「용문이십품(龍門二十品)」입니다. 이는 북위 시대에 개착된 용문석굴의 조상기(造像記)를 탁본한 것입니다. 그 중 뛰어난 것 20가지만 골라 묶은 것이 이십품입니다. 이 탁본 글씨는 육조시대 해서를 대표하는 것으로 이름 높습니다.

중국여행 뒤 삽화 일을 계속하면서 1901년부터 3년 반 동안 파리 유학을 단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근대화가라면 거의 거쳤던 라파엘 코랑 화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감미로운 묘사 위주의 코랑 화풍과는 맞지 않아 장 폴 로랑스의 아틀리에로 옮겼습니다. 그의 투박하고 거친 듯이 보이는 화풍은 여기서 가꿔졌습니다.


나카무라 후세츠 <잠난정도(賺蘭亭圖)> 1920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소장

파리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 조각가 로댕을 방문해 데생 한 점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학시절 그는 중국서 구한「용문이십품」과 당나라 손과정(孫過庭)의「서보(書譜)」복각본을 가져갔습니다. 손과정은 당나라 서예가이자 이론가입니다. 그가 서예 이론을 행서로 써 놓은 것이「서보」입니다. 

그는 낮에는 서양화를 그리고 밤에는 이를 펼쳐놓고 글씨를 베껴 썼습니다. 말하자면 파리유학은 서양화가로서 그의 입지를 굳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서예가 나카무라 후세츠의 기반을 구축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카무라 후세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삽화 1905년,

귀국해서는 아사히신문사에 삽화 화백으로 입사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아사히에 연재한 ‘나는 고양이로서이다’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틈틈이 여러 전시에 출품해 화명을 다졌습니다.


나카무라 후세츠 <용면첩(龍眠帖)> 1908년

서예가로 이름을 떨친 것은 1910년입니다. 이 해 과로로 신경쇠약에 걸렸습니다. 아무일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대로 이소베 온천에서 휴양했습니다. 이곳에서 쓴 것이 <용면첩(龍眠帖)>입니다. 내용은 북송의 문인 소식(蘇軾)이 친구 이공린(李公麟호가 용면)이 그린 <산장도(山莊圖)>를 보고 시 20수를 읊었는데 그것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이 첩의 글씨는 아이들 글씨처럼 삐뚤빼뚤합니다. 바탕은 육조 해서입니다만 작가 개성이 그대로 노출된 글씨입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글씨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출판을 재촉해 실제로 간행된 서첩은 큰 주목을 끌며 서예가로서의 이름을 날리게 됐습니다.


나카무라가 휘호한 나카무라야(中村屋)간판

이후 그는 한편으로 서양화가로 삽화가로 활동하면서 종종 휘호 청탁에도 응했습니다. 유명 일본술 니혼사카리(日本盛)의 상표도 썼고 신주쿠의 유명 카레집인 나카무라야(中村屋)의 간판도 썼습니다. 이런 일을 하며 동시에 컬렉션을 늘려갔습니다. 본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소장품 구입비는 모두 월급  서양화 작품값 그리고 서예 윤필료(潤筆料)로 충당했습니다.     


왕헌지 <지황탕첩> 동진 25.3x24.0cm

이곳의 진필 컬렉션 중 유명한 것은 왕헌지와 안진경의 글씨입니다. 왕헌지는 서성(書聖)인 부친 왕희지와 함께 이왕(二王)으로 불리는 동진의 서예가입니다. 전하는 글씨는 전혀 없고 당나라때 모본도 한 두점 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중 하나가 <지황탕첩>입니다. ‘신부가 복용한 지황탕의 효력이 없다’는 등의 내용으로 북송 황실 컬렉션이었습니다. 그후 민간에 나왔다가 청나라 때는 조선인 수장가 안기(安岐 1683-?)의 컬렉션이기도 했습니다.


안진경 <자서고신첩> 당 780년 29.8x220.4cm  

<자서고신첩(自書告身帖)>은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해서로는 유일한 진적입니다. 고신은 사령(辭令)의 뜻입니다. 72살 때 태자소사(太子少師)라는 명예직을 제수받자 자신이 직접 자기 사령장을 써 보인 것입니다. 이 첩에는 훗날 이 첩을 본 북송의 채양, 남송 미우인, 명 동기창, 청 건륭제 등의 발문이 달려있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 물건이 처음 일본에 들어왔을 때 재벌집 미쓰비시에 먼저 소개됐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맞지 않아 돌아 나왔습니다. 이후 몇 군데를 거쳤으나 임자를 만나지 못하고 결국 후세츠의 손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1930년의 일로 가격은 700엔이었습니다. 샐러리맨 수장가 후세츠는 이를 몇 개월 분할 지불했다고 전합니다.
 
진필본도 그렇지만 탁본과 법첩 컬렉션은 일본내에서도 몇 손가락에 손꼽힙니다. 특히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다카하시 기쿠지로(高島菊次郞 1875-1969)컬렉션과 미쓰이 신마치집안 9대당주 미쓰이 다카카타(三井高堅 1867-1945)의 수집품과 나란히 일본 3대 탁본컬렉션으로 간주됩니다.


찬보자비 동진 405년 27.4x16.4cm

그중 유명한 것이 동진 때 세워진 찬보자비 탁본입니다. 운남성(당시 건녕) 태수였던 찬보자(爨宝子 380-403)의 공덕을 기린 내용입니다. 이 탁본은 1880년 금석학자이자 서예가인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청국공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오면서 가져온 것 중 하나입니다. 이때 그는 1만점 가까운 탁본, 법첩을 가져왔다고 전합니다. 이  자료로 인해 메이지 초기의 일본 서단은 큰 충격을 받으며 중국서예 학습 붐이 크게 일었습니다.


찬보자비 탁본은 그가 교류하던 서예가이자 정치가인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1828-1905)에게 주고 간 것입니다. 이 비의 글자체는 해서와 예서의 기운이 섞여 있는 것으로 글자체의 연구에 많은 시사점을 주는 자료입니다. 물론 후세츠의 서예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광개토대왕비 고구려 414년 540.0x147.6(1면) 535.0x129.2cm(2면)

탁본 속에는 광개토대왕비 탁본도 들어 있습니다. 1890년경 뜬 것으로 물과 아교를 넣어 반죽한 석회를 비면에 바르고 탁본을 뜬 이른바 석회탁본입니다.
 
그 외에 고사경도 800점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청말 신강(新疆) 포정사였던 왕수남(王樹枏)이 수집품을 인수한 것입니다. 이 방면 연구자들에 의하면 영국박물관의 스타인 컬렉션과 프랑스국립도서관의 페리오 컬렉션에 비해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무정기 갑골과 탁본, 은(기원전 13세기) 25.3x25.5cm

소장품은 종이 위에 쓰인 것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서예에 관련된 모든 자료의 수집이었습니다. 당연히 갑골부터 시작해 옥기, 청동기, 와당 그리고 시대를 내려와 석비, 석경(石經) 그리고 명문이 있는 불상까지 수집했습니다. 


소극정 서주(기원전 9세기) 높이 28.9cm 섬서 부풍현 법문사 임촌 출토

갑골은 은허에서 약 10만 편이 발굴됐습니다. 그중 1만 편 정도가 일본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 소장품은 500여 편입니다. 이는 일본 개인컬렉터의 수집으로는 최대입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은나라 무정(武丁)시대에 점을 친 것입니다. 소 견갑골을 쓴 이 갑골문은 폭이 25cm나 되는 대형입니다.



소극정 명문과 탁본

갑골 이외에 중요한 고대유물이 청동기입니다. 특히 소극정(小克鼎)은 기원전 9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는 1890년 섬서성 부풍현의 법문사부근 임촌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합니다. 청말의 대표적인 소장가였던 단방(端方 1861-1911)의 구장품입니다. 솥 안쪽의 글, 즉 명문(銘文)은 극(克)이 주왕의 명을 받아 낙양 부근의 군대시찰 임무를 완수한 것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내용입니다.


영수2년3월 병, 후한 156년 높이 23.5cm

명문이 든 서예자료 중에는 중국에 없는 것도 있습니다. 글자가 가득 적힌 후한시대의 항아리입니다. 이는 자기 이전의 저화도 도기입니다. 여기에는 빙 둘러가며 150자 가량의 글자가 적혀있습니다. 한 가운데 영수(永壽)2년3월이라는 큰 글자가 있습니다. 영수2년은 156년입니다. 흑칠로 쓴 글자는 예서가 초서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예사의 귀중한 자료로 손꼽힙니다. 이는 191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합니다.


희평석경 잔석(춘추공양전) 후한 희평4년~광화6년(175-183) 9.2x14.7cm

경전을 돌에 새겨 대학 문밖에 세워둔 것이 석경(石經)입니다. 석경은 1922년 낙양에서 발굴됐습니다. 출토품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나카무라 소장품은 중국인 학자 백견(白堅 1883-?)이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이는 『논어』가 새겨진 일부와 『춘추공양전』이 새겨진 일부입니다. 모두 해서로 쓰여 있습니다.   


기념관 1층 전시실

이 박물관은 구립이 된 이후 일반에게 서예를 친근하게 소개하는 다양한 기획을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별도로 설립자의 뜻을 이어 나카무라 후세츠 기념관에서는 소장품 중심의 연4회 특별전을 개최합니다. 아울러 금석자료 중심의 본관은 연중상설 전시합니다.(y) 

<참고>
東京都台東区根岸2丁目10-4
http://www.taitocity.net/zaidan/shodou/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9.19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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