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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전통상인 名門집안에 대대로 전해내려온 유물들 - 미쓰이(三井)기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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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대재벌은 말할 것도 없이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 스미토모(住友)입니다. 이들의 서열로 보면 미쓰비시가 넘버원이지만 역사는 반대입니다. 1673년 에도에 에치고야(越後屋)라는 포목점을 낸 미쓰이가 가장 오래됩니다. 미쓰비시는 메이지 유신이후에 재벌로 성장했습니다.(제2차 대전 이후 재벌이란 말은 그룹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들 각 그룹이 세운 미술관을 보면 또 순서가 다릅니다. 1960년에 교토에 설립된 스미토모의 센오쿠학코칸(泉屋博古館)이 제일 먼저입니다. 그 다음이 미쓰비시입니다. 2대 총수 이와자키 야노스케(岩崎弥之助)의 호를 딴 세카이도문고(靜嘉堂文庫)가 1970년에 설립됐습니다. 여기서는 1977년부터 미술품을 공개했으나 정식 개관은 1992년입니다.
 

미쓰이 문고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문고는 가장 먼저 설치됐지만 미술관은 가장 늦었습니다. 미쓰이문고는 1918년에 설립됐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자료를 국가에 넘기고 활동을 접었습니다. 그후 일본 경제가 부흥되자 이를 다시 인수해 1965년에 정식으로 재출범했습니다. 이때 문고를 위해 시나가와의 옛 미쓰이집안 별장터에 새로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10여만 점에 이르는 이곳 소장 자료는 대부분 사회나 경제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1층 입구 

이 문고에 미술품을 다루는 별관이 세워진 것은 1985년입니다. 박물관 유사시설로 등록됐습니다. 이런 독특한 지위인 것은 미쓰이 집안에서 대량의 미술품을 기증 받은 때문입니다. 개관 전해인 1984년 미쓰이 기타(北)집안의 11대 당주인 미쓰이 다카키미(三井高公 1895-1992)는 회화, 서예를 비롯해 차도구, 장신구, 노(能)가면 등 1040점을 기증했습니다.


미쓰이문고 별관

미쓰이에 관련된 미술품을 한 자리에 모으자는 취지였습니다. 이래서 별관 설립되었고 이후 여타 미쓰이 집안이 동참했습니다. 신마치(新町) 집안, 무로마치(室町) 집안, 미나미(南) 집안이 잇달아 기증했고 뿐만 아니라 친척, 관계사 사장 등도 기증하면서 미술품이 늘어났습니다.

오늘날 니혼바시의 미쓰이본관 건물 7층에 있는 미쓰이 기념미술관은 2005년 분관설립 20주년을 맞아 세워진 것입니다. 이곳 소장품은 미술품 3700점, 우표 13만점에 이릅니다. 이들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부를 제외하고 각 집안에서 수백 년 동안 전래돼 오던 것들이란 것입니다. 미쓰이는 상가 집안으로 3백년 넘게 맥을 이어왔습니다.   

미술품을 기증한 집안이 여럿인 까닭은 설립자인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 1622-1694)에 자식 복이 많은 때문입니다. 미쓰이그룹 관련집안은 현재 11집을 꼽습니다. 직계가 6집에, 방계가 5집안입니다. 시작은 물론 미쓰이 다카토시입니다.


마쓰자카(松板) 출신인 미쓰이 다카토시는 술과 된장 등을 파는 상가 집안의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14살 때부터, 가업을 이어받은 큰형 밑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상재가 탁월했습니다. 형의 견제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미쓰이의 시작은 1673년 형이 죽은 뒤 독립해 에치고야(越後屋, 오늘날 미쓰코시(三越)백화점의 전신입니다)를 에도에 연데서 출발합니다. 그는 에치고야에서 당시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새로운 장사법을 선보였습니다. 


‘현금 외상사절’의 간판이 보이는 호쿠사이(葛飾北齋)의 판화

당시 포목점 장사는 다이묘(大名) 거래가 가장 컸습니다. 이 다이묘 거래는 외상 거래가 기본입니다. 결제는 우리 팔월추석과 같은 명절 때인 매년 8월과 12월에 몰아서 했습니다. 그런데 에치고야에서는 다이묘든 누구든 일체의 외상이 없는 현금거래를 표방했습니다.

당시 다이묘 외상은 떼먹히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상인들은 애초부터 얼마를 더 얻어 값을 불렀던 것입니다. 에치고야는 외상이 없으니 자연히 값을 낮춰 팔 수 있었습니다. 에치고야의 이런 장사법은 다이묘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도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당시 우키요에(浮世繪) 판화 속에도 ‘현금, 외상사절(現金掛値無)’이란 말이 새겨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박리다매뿐만 아니라 소비자중심주의 판매도 시도했습니다. 옷감을 잘라 판 것입니다. 당시 포목점의 판매는 단(反, 중국의 단(端)이 변형된 것입니다)이 기준이었습니다. 적은 양은 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잘라 팔기를 하자 소비자는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어 그만큼 덕이 됐습니다.

이런 새 기법이 큰 성공을 거두며 10년이 안 돼 대부업에도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에도막부의 어용(御用)대부업자가 됐습니다.(이것이 훗날 미쓰이은행으로 발전했고 대부업을 하던 곳에 세워진 미쓰이 본점에 미쓰이기념미술관이 들어간 것입니다)


마루야마 오쿄 <곽자의축하도> 1775년 118.0x58.5cm 기타 집안 기증

그는 73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11남5녀를 남겼습니다.(아들 하나는 서자입니다) 죽기 전에 그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물론 서로 돕고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싸우지 말라는 평범한 말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재산을 나누지 말고 몫돈인 채로 사업을 벌여 이익을 공동으로 나누라’고 한 것입니다.

가업을 물려받은 장남 다카히라(高平 1653-1737)는 이를 발전시켜 미쓰이 집안을 11집으로 정하고 총이익금에서 사업자금을 제하고 남은 돈을 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룰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1900년에 ‘미쓰이 가헌(家憲)’으로 성문화되기도 했습니다.

미쓰이의 11집안은 아들 6 집안과 딸 4집안 그리고 장남의 장녀 집안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들은 근대 들어 동족회를 만들어 미쓰이 재벌을 지배하게 됩니다. 아무튼 미쓰이 문고 별관 설립의 계기가 된 장손 기타(北) 집안에 따라 미술품을 기증한 신마치, 무로마치, 미나미는 이들 형제의 세째, 넷째, 다섯째 집안에 해당합니다.  


양해 <육조파경도> 남송 지본수묵 72.8x31.6cm 신마치 집안 기증

이들 집안 기증품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다도구입니다. 중국미술은 다회 때의 감상품이 중심을 이룹니다. 대표적인 것은 남송의 궁중화가 양해의 <육조파경도>입니다. 양해는 감필체의 명수입니다. 붓 사용 횟수를 가급적 줄이며 빈 부분만큼을 상상을 끌어들이는 기법입니다.


내용은 당나라 때 나무꾼 출신의 6조 혜능이 선이란 문자를 필요치 않는다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진수를 보여주는 일화를 그린 것입니다. 이는 무로마치 시대 3대 장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 1369-1394)이 소장했던 것으로 그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자 화병, 남송~원 높이 16.8cm 무로마치 집안 기증

긴 원통처럼 생긴 청자화병 역시 유래가 깊은 물건입니다. 이는 12-13세기 무렵 중국 용천요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뒤쪽에 고리가 달려 있어 나무 기둥에 걸어 쓰도록 했습니다. 센노리큐(千利休)의 제자가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후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절에 들어간 뒤 다카토시의 넷째 아들인 무로마치 미쓰이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기비 탁본, 23.4x14.2cm 신마치 집안기증

다도구 이외에 중요한 소장품은 중국 비탁본입니다. 이는 셋째 집안의 10대가 죽은 뒤 기증됐습니다만 실은 그의 부친이자 미쓰이은행사장을 지냈던 9대 다카카타(高堅 1867-1945)이 수집한 것입니다. 그는 190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정력적으로 고탁본을 수집했습니다.

그의 수집을 도운 사람은 가와이 센로(河井筌廬 1871-1945)입니다. 전각가인 그는 탁본 감식의 제일자로 손꼽혔습니다. 인감 전문으로 유명한 교토의 도장사집안 출신이지만 실무용 도장보다 전각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메이지 천왕의 인장을 새긴 시노다 가이신(篠田芥津) 문하에 들어갔습니다.


우세남필 공자묘당비 탁본, 28.3x16.8cm 신마치 집안 기증

그리고 당시 상해에 있던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무작정 서신을 보낸데 답이 오면서 그는 이른바 통신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해로 건너가 마침내 오창석을 만나 그가 죽을 때가 교류를 지속했습니다. 오창석도 그의 재능을 인정했습니다. 오가 전각연구그룹인 서냉인사(西冷印社)을 만들었을 때 그를 설립 멤버로 끌어들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가업을 동생에게 물려준 뒤 신마치 미쓰이집안의 9대 당주 다카카타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컬렉션을 도왔습니다. 그의 수집품은 호를 따 청빙각본(聽氷閣本)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에는 중국에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본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저수량필 맹법사비 탁본, 25.1x12.3cm 신마치 집안 기증

대표적인 것인 청나라 문인 이종한(李宗瀚 1770-1832)가 소장하고 있던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맹법사비(孟法師碑), 안재사비(安才寺碑) 등의 탁본입니다. 이는 원비가 망실되고 전하는 유일한 탁본들로서 흔히 서예계에서 ‘이씨4보’로 손꼽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공자묘당비와 맹법사비는 당초 3대명필로 손꼽힌 우세남(虞世南)과 저수량(褚遂良) 글씨입니다.


미시마 다완(명 니토쿠미시마) 지름 14.5~14.8cm 기타 집안 기증  

다도구는 무로마치 집안에서 기증한 것이 많은데 엽기적 일화가 전하는 이도다완도 이집 기증품입니다. 명은 십문자(十文字)입니다. 이 다완을 담은 상자에는 1727년에 쓰인 글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 1544-1615)가 원래 다완이 너무 커서 열십자로 잘라 줄였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오리베는 찌그러진 구츠가타(沓形) 다완을 일부러 만들게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무로마치 집안의 제1대인 다카토모(高伴)이 18세기초에 입수한 것으로 전합니다.


오이도 다완(명 십문자) 지름 14.1~14.8cm 무로마치 집안 기증

장손인 기타 집안도 무로마치 집안만큼 다도구를 많이 기증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후루미시마(古三島) 다완입니다. 미시마는 조선 전기에 민간가마에서 제작한 분청사기중 일부를 말합니다. 작은 연속홈 문양이 있는게 보통입니다. 미시마에 대해서는 미시마신사의 책력을 닮았다는 설에서 지명설까지 분분하지만 아직까지 정설은 없습니다.

이는 센노리큐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주변에서 찻통 주머니를 만드는 장인인 니토쿠(二德)에게 주어 일명 니토쿠 미시마라도 불립니다. 이 다완은 1579년의 다회기록에도 보일 정도로 유래가 깊습니다. 이후 고베 히메지번의 사카이 집안에 들어갔습니다. 1923년 이집안 물건이 경매로 나왔을 때 7만6,200엔에 기타 미쓰이 집안에서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노 다완(명 우노하나가키) 지름 10.4~11.6cm 무로마치 집안 기증 국보

일본 다완으로 유명한 것은 국보 시노(志野)다완입니다. 이도다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이 다완은 국보로 지정돼 있는 일본다완 2점 중 하나입니다. 이는 오늘날 기후 지방인 미노(美濃)산으로 도기 위에 불투명 백토유를 발라 구운 것입니다. 에도시대 목재상으로 유명했던 후유키(冬木) 집안에 전해오던 것을 1887년 무로마치 집안의 11대 다카야스(高保)가 입수한 것입니다.


마루야마 오쿄 <설송도> 에도 각 156.1x362.1cm 기타 집안 기증 국보

일본 회화로 유명한 것은 에도초기의 화가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 1733-1795)가 그린 <설송도> 병풍입니다. 가지마다 눈을 한 아름 이고 있는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소나무 세그루가 내용입니다. 달 대신 달무리를 그려 달을 나타내는 유백법(留白法)은 먹색만을 사용하는 수묵화에 종종 등장하는 기법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면적으로 그리고 복잡 무쌍하게 구사된 사례는 전무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이 그림은 오쿄가 자신의 파트런이던 기타 집안을 위해 그린 것입니다.

교토의 사생파로 유명한 그는 기타 집안의 4대, 5대, 6대로부터 후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5대 다카키요(高淸)의 지원을 받던 1786년 무렵에 그린 것으로 전합니다.(미쓰이 기념미술관이 개관될 때 이 병풍을 위한 특별전시실을 별도로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작자미상 <주라쿠타이도> 모모야마 156.0x333.0cm 신마치 집안 기증

그 외 또 유명한 그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저택을 그린 <주라쿠타이도(聚樂第圖)>입니다. 도요토미는 1686년 귀족 최고지위인 관백(關白)을 제수받자 집무실겸 저택으로 취락제를 지었습니다. 호화롭게 지어진 이곳에는 당시 천왕이 두 번이나 행행을 했을 정도입니다. 그는 후계자로 지목한 조카에게 일부를 양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실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이 조카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자실하게 하고 맙니다. 그리고 집도 모두 파괴해 버리고 자신은 오사카성으로 옮겨갔습니다. 약 9년 동안만 존재했던 이 집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병풍은 그런 가운데 생생하게 옛 모습을 보여주는 일급자료로 손꼽힙니다. 안쪽에 우뚝 솟은 누각이 중심 건물인 혼마루(丸本)입니다.


미쓰이 기념미술관은 상설전시는 없습니다. 연간 3-4회의 특별전시가 열리며 전기 교체기에는 휴관합니다.(y)


<참고>
東京都中央区日本橋室町2−1−1          
http://www.mitsui-museum.jp/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4.23 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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