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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진왜란 이후에 시작된 이마리 도자기 전문미술관 - 도구리(戶栗)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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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부터 교류가 시작된 동과 서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두 세계를 이어준 것은 3대 교역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크로드라도 훨씬 유명해진 비단이 단연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도자기이고 세 번째가 차입니다. 한국은 이 세 가지 빅 머천다이즈 교역과 무관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은 세 품목 교역에 모두 참가했습니다. 일본이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국가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교역에 있어 일본은 중국과 순서가 다릅니다. 중국은 비단, 도자기, 차의 순서로 교역품이 개발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도자기가 먼저였고 뒤이어 차와 비단(생사)이 이어집니다. 


초기 이마리산 백자 각항아리, 17세기 전반 높이 19.3cm

첫 번째인 도자기 교역에서 조선은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도기는 만들었지만 자기는 만들지 못했습니다. 도기는 독일맥주의 조키 같이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을 말합니다.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가 납니다. 반면 자기(磁器)는 고온에서 흙 자체가 유리질로 변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두드리면 ‘탱’하는 금속음이 납니다. 일본은 그때까지 이런 소성(燒成) 원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백자의 언덕 공원 모습(위키자료 사진)

이 벽을 뚫어준 사람이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끌려갔습니다. 1616년 어느 날 규슈 아리타(有田)의 이즈미야마(泉山)란 곳에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백토(白土)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그 근처에 가마를 만들어 백자를 구웠습니다. (현재 백자의 언덕(白磁ヶ丘) 공원이 돼 있습니다)

도자기 제작에는 분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상품을 도공 집단의 우두머리로 보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가 만든 백자는 산화코발트 안료를 바른 청화백자였습니다. 이것이 일본 백자의 시작입니다.


초기 이마리산 백자청화 화훼문 각병, 17세기전반 높이 24.0cm

이렇게 만들어진 일본산 청화백자는 17세기 중반부터 유럽에 수출하게 됩니다. 청은 명을 멸망시킨 뒤(1644년) 중국 남부해안의 반청 세력을 견제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연안 지방의 주민을 내륙으로 이주시키고 해상교역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 불똥이 중국도자기를 유럽에 가져가 팔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 튀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수출이 시작되자 아리타에서는 중국도자기의 수준을 따라잡기 위한 맹렬한 노력이 전개됐습니다. 결국 중국의 채색도자기 기술을 손에 넣었습니다.  이마리 도자기는 이때부터 19세기말 만국박람회 시대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상품 중 하나가 됐습니다. 

이들 도자기의 수출항이 바로 이마리(伊万里)입니다. 그래서 아리타 일대에서 만든 도자기를 통 털어 이마리 도자기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마리 도자기가 일본을 대표하지만 실은 조선 도공의 헌신 위에 중국 기술이 얹혀 발전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마리 도자기를 보여주는 미술관으로는 아리타초(有田町)에 있는 사가현립 규슈도자문화관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도쿄 시부야에도 이를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도구리 미술관입니다. 

시부야는 하루 유동인구가 1천만 명을 넘는다고 해 일본 넘버원으로 손꼽히는 번잡한 곳입니다. 하지만 분카무라 미술관 뒤쪽의 작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술관은 그 주택가 한 가운데 있습니다.

미술관 자리는 원래 사가(佐賀)번의 에도 저택터입니다. 사가의 번주 나베시마(鍋島)는 부국강병책의 하나로 아리타에 번 직영의 가마를 운영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구운 도자기를 이마리 도자기와는 달리 나베시마라고 부릅니다.


이런 인연이 있는 곳에 1987년에 미술관을 설립한 사람은 도구리 도오루(戶栗亨 1926-2007)입니다. 그는 야마나시(山梨) 토목건축업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도쿄에 나와 성공했다고 전하지만 어떤 학교를 나와 어떤 사업을 해서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때 동향선배인 오사노 겐지(小佐野賢治 1917-1986)를 도왔다고 합니다. 겐지는 일찍부터 하와이 호텔업에 진출하는 등 한때 호텔 왕으로 불렸던 사업가입니다. 하지만 암흑세계와도 연관돼 있어 이미지가 좋지는 않습니다.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든 록히드 사건에도 관련됐던 인물입니다. 도구리는 그의 사업을 도우며 주식투자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로비 소파에서 본 정원

미술에는 젊은 시절부터 민예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전쟁 이후 사회가 급속히 서구화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자라나는 세대들이 일본 전통문화를 보여주자고 옛 생활도구 등을 수집했습니다. 민예관 같은 것을 꾸밀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도자기로 바뀐 것은 1965년 무렵입니다.

이때 사정도 정확하지 않은데 본인의 말로는 주변 친구들의 조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무렵부터 이마리 도자기를 모으기 시작해 개관 때까지 20여년간 1,700여점을 모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자신이 직접 관장을 맡아 운영하며 소장품을 늘려 현재는 7천여 점이 넘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마쓰오카(松岡) 미술관과 나란히 도자기전문미술관으로 유명합니다. 다른 두 곳과 다른 점은 일본의 이마리에서 시작해 영향 관계에 있는 중국과 한국으로 시야를 넓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도자기 컬렉션은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1994년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일본에 있는 중국도자기의 이름난 명품을 한 자리에 모은 특별전이 열렸습니다. 이 때 문을 연지 얼마 안 되는 도구리미술관 컬렉션이 10점 이상 포함돼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삼채 말, 당(8세기) 높이 67.3cm

대표 수장품 가운데 우선 거론돼야할 것이 삼채(三彩) 말 도자기입니다. 삼채는 녹색, 갈색, 크림색 등의 조합된 도자기입니다. 당나라 때 제작돼 흔히 당삼채라고 합니다. 이들은 대개 부장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05년 변경-낙양간 철도가 부설되면서 당나라 분묘가 파헤쳐지면서부터입니다. 높이가 67.3cm이나 되는 삼채 말상은 크기도 크려니와 크림색 몸체 위에 백토를 발라 흰 반점을 묘사했을 정도로 정교합니다. 


전청유(澱靑釉)병, 북송~금(12세기) 높이 31.4cm 

북송 5대 가마 중 하나인 균요(鈞窯)에서 제작된 전청유 병(澱靑釉 甁)도 시대를 대표하는 명품입니다. 전청유는 투명한 유약과 달리 불투명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목 중간부분이 살짝 가늘어진 독특한 형태입니다. 이 병의 외형은 영국의 도자수집가로 유명한 퍼시벌 데이비드경의 컬렉션에 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영국 것은 몸 전체에 붉은 반점이 있어 이쪽이 훨씬 더 기품이 있어 보입니다. 


청화백자 모란당초문 능화반, 원 지름 46.3cm

원나라 청화백자를 대표하는 것으로 쟁반 형태의 청화 모란당초문능화반이 있습니다. 원나라 때 이슬람 세계에 수출된 도자기는 대개 크기가 큽니다. 이 쟁반 역시 모두가 둘러앉아 먹는 식기 용도로 주문된 것이어서 크기가 엄청나게 큽니다. 코발트의 발색이 짙은 것이 원나라 청화의 특징입니다. 원 제국 멸망이후 중국 자체의 산화코발트를 쓴 것은 이렇게 짙지 않습니다.


청화 금기서화문 대호, 명(15세기) 경덕진민요 높이 35.6cm

명대 청화를 대표하는 것이 백자청화 금기서화문 항아리입니다. 금기서화(琴棋書畵)는 거문고, 바둑 그리고 서화를 가리킵니다. 이는 북송 이래 문인들의 취미와 교양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괴석으로 칸을 나누고 각 면에 금기서화의 내용을 하나씩 그렸습니다. 이 도자기는 경덕진 가마 중에서 궁중용과 무관한 민요에서 만든 것입니다. 중국산 산화코발트, 즉 토청(土靑)을 사용해 색이 짙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일본 고미술 상인들 사이에는 이처럼 집안 풍경에 구름이 그려진 도자기를 운당수(雲堂手)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분채 인물문 반, 청 경덕진 관요 지름 20.8cm

상당수의 궁중도자기 컬렉션 중 눈길을 끄는 것이 분채 인물문 반(粉彩人物文盤)입니다. 서양의 법랑에 쓰는 칠보 에메랄드 안료를 도자기의 그림용으로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이는 색을 여러 번 겹쳐 쓸 수 있습니다. 또 그러데이션을 비롯한 회화와 같은 정교한 표현도 가능합니다. 중국도자기에 보이는 화려한 그림 표현은 이 분채로 인해 가능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초기의 사례입니다. 서양인물과 그러데이션된 옷 색깔이 보입니다. 대접 뒷면에는 ‘대청옹정년제(大淸雍正年製)’라는 명문(銘文)이 있습니다.       


청자음각 연당초문 병, 12세기 높이19.4cm

한국도자기의 수량도 제법 됩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청자음각 연당초문 병과 조선시대 민요에서 제작된 호랑이문 항아리입니다. 청자 병은 입 주위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입니다. 남송시대 용천요(龍泉窯)에서는 이런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용천요 청자는 목 주변에 물고기나 봉황처럼 보이는 손잡이를 단 것이 대부분입니다. 외형은 영향을 받았지만 음각으로 문양을 넣은 것은 고려 독자의 모습입니다. 중국 청자에는 문양이 들어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백자청화 호문 항아리, 18세기 높이 41.0cm 아타카 데루야 기증

호랑이 항아리는 18세기 민요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민화풍의 우람한 호랑이가 눈길을 끕니다. 자세히 보면 호랑이와 범의 문양이 합쳐져 있습니다. 이 항아리는 아타카 데루야(安宅昭彌 1934-2015)가 기증한 것입니다. 그는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컬렉션을 이룬 아타카 에이이치(安宅英一)의 아들입니다.   

도구리 미술관은 이마리 도자기의 대표작은 여럿입니다. 가장 초기의 이마리 가운데는 눈길을 끄는 것은 토끼문양이 든 청화접시입니다. 이 접시에는 토끼가 유백(留白)기법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주변을 칠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부분을 희게 돋보이게 하는 기법입니다.


백자청화 취묵백토문(吹墨白兎文) 접시, 17세기전반 이마리 지름 21.0cm

여기에는 토끼처럼 오린 종이(紙型)을 놓고 대통으로 청화안료를 뿜어 달무리처럼 보이는 효과를 냈습니다. 이렇게 청화를 불어서 입히는 것을 일본에서는 후키즈미(吹墨)라고 합니다. 생동감 넘치는 토끼 문양은 달 속의 옥토끼라는 운치 있는 일화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불로 장생의 상징한다고 여겼습니다. 중국 경덕진의 민간 가마에서는 이렇게 청화로 토끼 문양을 넣은 것을 한때 대량 생산했습니다.

이 접시는 그 영향을 받아 일본화시킨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접시 한쪽에 보이는 춘백토(春白兎)라고 쓴 글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이마리 도자기가 세계적인 도자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청화 이외의 안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이 역시 중국 영향입니다. 청화는 유약을 바르기 전에 문양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운 뒤에 붉은 색, 녹색, 노란색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다시 한 번 낮은 온도(低化度)에서 구으면 채색화와 같은 다양한 색을 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색을 넣은 도자기를 일본에서는 이로에(色繪) 도자기라고 합니다.


이로에 화조문 윤화(輪花)접시, 17세기말 이마리(가키에몬 양식)  지름 22.0cm 

아리타에서 붉은 색 안료를 가지고 처음 이로에 도자기를 시도한 사람이 사카이다 가키이몬(酒井田柿右衛門 1596-1666)입니다. 그 후 붉은 색에 더해 다른 여러 색을 사용하는 방법이 개발됐면서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가키에몬 도자기는 따듯한 계통의 색을 사용한 것이 특징입니다. 주제도 일본 그림에 많이 보이는 대나무에 호랑이, 매화에 새, 단풍에 사슴 등이 보통입니다. 이로에 화조문 윤화접시도 그와 같은 특징이 고스란히 보입니다. 


이로에 사자모란국매문 항아리, 17세기말 이마리 높이 74.6cm

색의 사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화려하게 금분을 쓴 도자기가 있습니다. 이를 일본에서는 긴란테(金欄手)라고 합니다. 이로에 도자기의 포인트가 될 부분에 금분으로 장식을 하고 역시 낮은 온도에서 한 번 더 구은 것입니다.이를 대표하는 것이 높이 74.6cm의 이로로에 사자모란문 항아리입니다. 도자기는 어느 크기 이상이 되면 자체 무게로 인해 가마 속에서 구워질 때 주저 앉아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대형 제작에는 정교한 제작 기술이 뒤따라야 합니다. 17세기말 들어 다시 수출을 시작한 중국 도자기와 겨루기 위해서 이마리에서는 엄청난 기술 향상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형 항아리는 그를 말해주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색회 초지문 접시, 18세기초 나베시마 지름 20.4cm
색회 비사문구갑문 접시, 18세기초 나베시마 지금 20.1cm

이마리 도자기 가운데 별칭으로 불리는 나베시마(鍋島)는 사가번의 직영가마에서 17세기 후반부터 구운 것입니다. 이는 번주 사용품이나 장군가나 각 다이묘에의 증답품으로 제작됐습니다. 그런 만큼 정교하고 또 일본적 멋을 담은 것이 많습니다. 나베시마에는 규격화된 치수의 접시가 특히 많이 보이는 것도 특징입니다. 문양은 기하학적 문양이나 직물문양 등이 자주 보입니다. 

도구리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 이외의 유물은 1층 로비에 있는 화상석 정도입니다. 이는 산동성 문상현 손가장에 있던 후한 시대의 분묘에서 출토됐다고 전합니다. 이 미술관은 분기별로 전시품을 교체하며 이 기간은 휴관합니다.(y) 

<참고>
東京都渋谷区松濤1丁目11−3
http://www.toguri-museum.or.jp/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17.05.2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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