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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미술전람회와 릴리안 메이 밀러의 작품 <조선식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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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미술전람회의 다각적 이해
1922년 일제에 의해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를 연구한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정책을 이해하려는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조선미술전람회를 일제의 문화정책을 대변하는 관전이라는 관점에서 주체적 민족주의에 반하는 정책이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연구 태도는 당대의 미술현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만드는 우를 범하게 된다. 실제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에서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연구에 치명적인 장애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제강점 36년이란 세월은 한 세대를 훨씬 뛰어넘는 긴 기간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이 되어 후대를 보고도 남는 긴 시간이다. 중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긴 역사에서 30년을 넘기지 못한 왕조가 하나 둘이 아닐 정도이다. 더욱이 한국의 36년이란 기간은 일제의 강점 밑에 살았던 식민 기간이었고, 한국 근대 문화가 유입되던 매우 중요한 근대기요, 개화기였다.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의 관전이라는 의미 이전에 당시 식민하에 있었던 한국의 미술 지망인들이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선망의 무대였다. 경제적 여유가 많거나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특수층의 자녀들은 일본에 유학하여 선진적인 미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유학하기 어려운 일반 국민들의 경우 조선미전를 통하지 않고서는 미술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다. 또한 조선미전은 한국에 거주하는 일부 미술인만이 참여하던 행사가 아니었다. 한국에 거주하던 한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 또는 일본 내지에 사는 일부 일본인들과 한국인들도 참여하는 범 국가적인 행사였다. 그래서 체제도 일본의 대표적 관전인 문부성전람회를 그대로 본받아 하였고, 심사위원도 일본 문부성전람회에서 활동하던 저명화가들을 초빙하였다. 한국인 작가들 중에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김용준, 이중섭, 이쾌대 등 선진적인 화가 일부만 출품을 꺼려했을 뿐 대부분의 화가들은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 박수근과 같이 한국미술사에서 민족주의적 색채를 강조하는 화가조차 전람회에 출품하여 당대의 스타 이인성과 같은 영예를 누리고 싶어 애를 썼다. 그만큼 조선미전은 당대 화가 지망생들이 꿈에 그리는 등용문이었다.

조선미전에 출품한 사람들은 한국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 수 이상의 일본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한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의 풍속에 동화된 한국 거주자들이 많았고, 이들은 주로 한국의 풍광이나 풍속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은 일본인들끼리만 어울린 지배자로서의 대표적인 일본인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한국인과 많은 교류를 나누며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한국 미술인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고, 한국인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많은 한국인 미술 지망생들 중에 일본인 미술가의 화숙에서 그림을 배운 이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다카기 하이스이나 야마모토 바이카이는 서양화를 가르쳤고, 가토 쇼린이나 마츠다 레이코, 가타야마 탄 등은 일본화를 한국에 이식하기도 하였다. 이옥순과 같은 여성은 가토 쇼린의 수제자였다. 사실 당대 화려하게 등장하였던 여류 정찬영의 경우도 한국인 이영일에게 배웠지만 이영일의 스승이 이케가미 슈호인 것을 생각하면 철저하게 일본화를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조선미전을 통한 미술가들의 활동은 식민지 하에서 일본인, 한국인 구분 없는 한국미술계의 중심적인 미술전람회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2. 조선미술전람회에 대한 연구 현황

조선미술전람회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총독부 주관의 '공모전'이라는 데 있다.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전람회와 달리 정부 기관에서 주관하는 영향력 있고 오래 지속된 공모전은 한 작가의 등단 모습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역사성 때문에 미술사적인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미전은 일제 강점 시절의 화가 대부분이 참여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한국 미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분석과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조선미전은 1922년부터 1944년까지 23회를 한 해도 빠짐없이 거듭되었다. 여기에 대한 자료는 도록으로 남아 있는데, 출품작 중 입선작 이상의 작품 목록과 작품의 흑백 사진이 실려 있다. 아쉽게도 도록은 23회 모두 출판되지 못하고 19회까지만 출판되었다. 20회부터 23회까지 4회는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경제적 어려움이 생겨 출판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수상 목록집은 남겨 놓아 당시 수상 현황은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다행히 조선미전 23회 전체의 수상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듯 일제강점기의 미술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이다. 그러나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연구 현실은 23회에 걸친 역사적인 조선미전에 대한 1차 자료 조차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각 회의 수상자와 수장자에 대한 정보, 작품의 사진과 작품의 제목 등이 정리되어 자료화되어 있어야 제대로 일제강점기 미술사 연구가 진행될 수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미술사학자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을 탓할 수 있다. 도록 19권을 모두 구하기 어려운 데다 연구된 기존 업적이 부족해 모두 새로 해야 하는 탓에 연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그러니 고생은 많고 결과물은 크게 생색이 나지 않으니 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한일 간의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침략자와 피지배 민족이라는 적대적 관점 때문에 연구를 꺼려하는 것이다. 조선미전이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에 따라 참여한 미술인의 반수 이상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정보가 부족한 일본인들을 연구하는 데 역부족을 느끼는 이유도 있다. 이런 이유로 편법으로 출품자 중 한국인만을 대략 정리하여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보니 한일 미술계 인물 모두가 참여하였던 전체 중 반만을 잘라 연구를 하게 되고, 그러니 연구가 반쪽밖에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당대 식민지 한국에선 한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참여하였는데, 일본인은 빼고 한국인 작가들만 정리하니 절름발이 미술사가 되었다. 결국 전체적인 모양새가 달라져 각 사건의 연계적인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라도 근대 미술 연구의 시작을 새로이 조선미술전람회의 자료 정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조선미술전람회의 탄생은 어떻고, 누가 가장 큰 역할을 했는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누가 심사위원을 맡았고, 이들이 한국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어떠하였으며, 한국인 화가들은 어떤 자세를 취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공모전에 수상한 작가들의 활동상을 일본인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공정하고 정확하게 정리해야 한다. 일본인 심사위원들 아래에서 그들의 심사는 정확했는지 알아야 하고, 나중에 한국에 살던 지도적인 한국인 화가와 일본인 화가들이 어떠한 방식과 신념으로 심사 참여를 했는지도 객관적 자료를 통해 밝혀야 한다. 이러한 의문의 해결을 통해서 일제의 문화정책이 조선미전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우리 미술계는 의문의 해결은 커녕 조선미술전람회 원본 전체의 자료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근대기의 연구는 요원한 게 사실이다. 더욱이 대개 학자들은 오래 전에 출판된 영인본 전람회 도록을 통해 연구하고 있는데, 이 영인본이란 것이 완전한 영인이 아니라 원본을 다시 편집한 것이라 그 과정에 오류가 많아 자료로서 완전치 못하다.

3.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릴리안 메이 밀러의 작품 <조선식 정자>


릴리안 메이 밀러


조선미술전람회의 도록을 보다 생각치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속에는 한국인과 일본인 작가 뿐만 아니라 제3국의 외국인 중에도 출품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파란 눈의 외국인도 있고, 중국 여성도 출품한 적이 있었다. 모두 외교관의 가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출품자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릴리안 메이 밀러(Lilian May Miler, 1895-1943)이다. 근래에 그가 남긴 일제강점기 한국 풍경과 풍속을 목판화로 작업한 것이 자주 소개된 유명한 작가이다. 그동안 우리 미술계에서는 그를 단지 일제강점기에 한국 풍경을 우끼요에식 목판화로 해석한 이색적인 미국인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는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출품하여 입선한 한국 근대미술사에 참여한 한 일원으로서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을 가진 일본화풍의 수묵화를 그린 정통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이런 사실 조차 미술사에 보고가 되지 않은 것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자료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여 미술사 연구자 사이에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릴리안 메이 밀러는 미국 외교관의 큰 딸로 도쿄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일본화를 수학하였다. 그녀는 일본의 우끼요에가 새로운 형식의 목판화로 변화한 신판화에 매료되어 시마타(島田)공방의 가노 도모노부(狩野友信) 문하에서 일본의 판화를 습득한다. 그 후 미국의 바사 칼리지(Vasser College)로 유학을 가 미술공부를 한 후 미국 체류 8년 만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다. 당시 아버지가 경성 주재 미국영사로 임명되자 한국으로 건너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머무른다. 그는 경성에서 우연히 경복궁 향원정이나 비원의 정자들을 보고 한국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뒤 한국의 금강산, 대동강 황포돗대, 한강 나루터, 혜화문, 농촌풍경, 촌부의 모습 등 민중의 삶의 모습을 스케치로 남기고 이를 판화로 제작하였다. 또한 서양인 최초로 경성에 자신의 판화 보급을 위한 화랑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요꼬하마와 뉴욕에도 전문 매장을 설립하였다. 1929년 보스톤에서 열린 <서울의 릴리안 밀러> 전시회에서 조선과 일본의 삶을 주제로 한 작품28점을 발표 다수의 금강산 풍경과 농촌 풍경을 선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릴리안 밀러의 코리아 판화>라는 안내서를 제작하며, 국내외에 판화 보급에 힘쓰기도 하였다.


릴리안 메이 밀러 <조선식 정자> 1923년

릴리안 메이 밀러가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은 <조선식 정자>라는 제목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목판화가 아니라 한국 고궁의 정자를 수묵으로 그린 남화풍의 그림이다. 소나무 두 그루를 화면 앞으로 당겨 그리고 그 뒤로 조그만 정자 한 채를 숨기듯 은은하게 그렸다. 근경 만이 강조되고 중경, 원경이 생략되는 방식의 표현 기법은 당시 한국과 중국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방식이다. 이와 같은 구도는 릴리안 메이 밀러가 1920년에 작업한 목판화 <황포 돛배>에서도 유사하게 보이는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우끼요에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 방식인데, 서양의 반 고흐 같은 작가에게 차용되어 새로운 인상파 기법으로 자리 잡는다.


릴리안 메이 밀러 <황포 돛배> 1920년 목판화


한편으로 이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목판화 작가 밀러에 대한 선입견을 넘어서는 새로운 자료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의 동적인 동세가 잘 나타나는 목판화 작품들은 단지 판화 기법의 기교적인 우수성에만 미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원화를 능숙하게 다루는 데서 오는 작품의 완성도에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목판화를 하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른 일본화풍의 동양화가이었다. 이런 사실은 조선미술전람회 도록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생각치 못하고 잊혀지거나 파묻혀 넘어갔을 특별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미술사의 연구에서 1차적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8.06.1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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