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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화가 김응원의 일본행을 알려주는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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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초의 명인 소호 김응원

소호(小湖) 김응원(金應元, 1855-1921)은 조선 후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까지 활동한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중요한 서화가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이하응, 윤영기, 조동욱 등과 함께 조선 후기 이후 난초 그림을 잘 그린 4대가 중의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어려서의 출신에 대해서는 더욱 알려진 바가 없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하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치는 않다. 대개 전하는 바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오르기 전에 특별하기로 유명한 자신만의 묵란을 즐기며 은신할 때부터 어린 종복으로 따라다녔다고 한다. 김응원은 그 뒤에도 계속 개인 수종으로 대원군을 모시며 스스로 석파란법을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 그의 그림의 기법을 보면 대원군의 영향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다.
 


김응원 <석란> 창덕궁 벽화


대원군이 재야에 묻혀 지낼 때, 그의 묵란 그림은 애호가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많은 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자 주문하였다. 그런데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자 주위의 묵란 요청을 모두 응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대필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는 스승이 아프거나 시간이 되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면 스승의 그림을 가장 가까이 그릴 수 있는 제자가 대필하여 그리고 스승의 낙관을 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때 대필한 이가 윤영기, 나수연, 김응원 등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대원군의 난 그리는 법을 익혔는데, 윤영기와 나수연은 평생 대원군의 난법을 따랐지만 김응원은 점차 새로운 것을 익혀 자신만의 새로운 난법을 개발하였다. 초기 김응원의 묵란은 대원군의 난법을 충실히 추종한 바탕 위에 이루어졌다.

김응원이 서화가로서 이름을 드러내게 된 것은 일제의 강점이 이루어진 1910년 이후부터이다. 이때는 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10여년이 흐른데다 한일합병으로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경성 권번 기생의 도화 선생을 하며 화명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1911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학원으로 평가받는 서화미술회 강습소가 개설될 때에 조석진, 안중식 등과 함께 지도교사가 되어 묵란법을 가르치며 미술계의 중심 인물 중의 한 명으로 자리잡는다. 그의 난초 그림은 당대 최고였는데 많은 이들이 본받고자 하였다. 김은호, 오일영 등 서화미술회 출신들의 난초 그림에 김응원의 필치가 나타나는 것은 사제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1918년에는 전통적 화법을 따르는 서화가들과 신미술 개척자들이 모여 '서화협회'를 창립할 때에도 조석진ㆍ안중식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창덕궁에 벽화로 그린 대작 난초 그림으로 웅장하고 환상적인 구도를 자랑한다. 한편으로 그는 난초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도 잘 썼는데 행서와 예서를 잘 썼다. 그 중에서도 예서는 결구에 회화적인 맛이 있어 서예가들 못지 않게 많은 이들이 선호하였다. 특히 일본인들이 그의 작품을 좋아하여, 많은 주문을 받았다. 


2. 김응원의 인상적인 두 제자

김응원은 서화미술회의 지도교사를 하며 화명을 쌓지만 그 외에 다른 두 가지 활동으로 화가로서의 명성을 견고히 한다. 하나는 일본제국주의의 초대 정무총감으로 온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에게 난초를 가르치게 된 일이다. 이 일은 김응원이 일본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둘째는 경성에 있던 대정 권번의 도화 선생을 한 것으로, 이곳의 기생들을 가르쳐 이들 중 여러 명이 화가로서도 명성을 얻게 된다. 이 곳을 중심으로 만난 명사들과의 인연도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야마가타 이사부로


1) 일본인 제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1858-1927)는 한일병탄이 이루어지고 초대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일본인 고급 관료이다. 1910년에 부임하여 1919년 3.1운동으로 물러날 때까지 10여년을 지냈다. 정무총감은 조선 총독 아래에서 군사통수권을 제외한 행정, 사법을 통괄하던 직책으로 부통감에 해당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최고급 관료였다. 그는 일본이 한국에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20년 이후에는 일본 간토 지역의 총독, 추밀원 고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대사를 역임하는 등 관료로서 승승장구 하였다. 그의 활동으로 유명한 것은 한국병합을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한국 거류 각국 영사에게 통고한 일이다. 일제는 당시 먼저 통감부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와 신문기자들에게 한국 강점을 공포하고,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에게 공훈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병합을 공식화했다.


야마가타 이사부로 <묵란> 


한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선 관료였던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한국의 사군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마음의 수양을 위해서였다. 그는 경성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공부하는데, 이 때 스승으로 삼은 이가 김응원이었다. 그의 그림 실력은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러서 전문 화가들의 수준에 모자라지 않았다. 김응원이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1922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미술전람회가 생기고, 2년 후에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 남화가 구보타 텐난(久保田天南, 1872-1940경)이 조선남화원을 설립한다. 이 모임은 전문화가의 양성보다는 회원들의 마음 수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주로 일본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전국적으로 300여명쯤 되었다. 한국인도 수십 명이 회원으로 관계하였다. 이들 한국인 대부분이 총독부 아래에서 관료 생활을 하던 이들이었다. 야마가타 이사부로는 조선남화원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후원하였다. 조선남화원이 전국 규모가 되고 전시회를 열고 호화로운 도록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야마가타 이사부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2) 홍월(虹月) 오귀숙(吳貴淑)

김응원이 권번에서 가르친 제자 중에 가장 유명하게 된 이는 홍월(虹月) 오귀숙(吳貴淑, 1900-미상)이다.  그는 기생조합인 대정권번에 오산홍(吳山紅)이라는 이름으로 기적을 두었는데, 연농(硏農), 홍월(虹月)을 아호로 삼았다. 1920년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묵란화로 수차례 입선하여 '서화기(書畵妓)'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려 유명하게 되었다. 그가 서화로 유명하게 된 것은 김응원에게 묵란을 배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김응원뿐만 아니라 김규진에게도 배우지만, 기본은 김응원의 영향이 가장 많았다. 김응원이 세상을 떠나자 김용진에게 배워 점점 그림의 기법이 변하였다. 초기에는 김응원의 영향이 강해지다 점차 김용진이 추종한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의 화법에 영향을 받았다. 


오귀숙, 이한복 <석란>


오귀숙은 1905년을 전후하여 인천에서 출생하여 인천 영화여학교에서 3년간 수학한다. 어린 시절 부친의 사망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학교를 중퇴하고 열네 살 때부터 기생 수련을 받았다. 처음에는 소리에 재주를 보였으나 점차 그림을 배우며 1920년대에는 기생 서화가로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기생들은 주로 ‘앉은자리 그림(席畵)’이라 하여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재주를 선보일 수 있었던 화목인 사군자 수련을 하였다. 그의 그림은 날로 좋아져 1920년대 후반에는 서화 수련을 위해 도쿄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서화에 전념하였다. 이렇게 유학까지 한 데에는 단골 고객으로 가까이 지냈던 이한복 등 일본통 서화가들의 권유도 많이 작용하였다. 그만치 그는 서화에 인정을 받은 특별한 기생이었다. 실제 당대 여러 일류 서화가들은 명월관 등에 모여서 오산홍을 불러 주연과 함께 서화를 즐기기를 자주하였다. 특히 오귀숙은 조선미술전람회 제3회에 <란>(1924), 제4회 <춘란>, <추국>(1925), 제5회 <묵란>(1926)을 출품하여 연속 입선하면서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중국 근대 서화가 오창석의 문인인 화가 방명(方洺)이 경성을 방문하여 오귀숙의 작품을 구입한 것이 군중에 회자되며 화명을 높였다. 특히 일본인 유명 서화가이자 조선미술전람회의 서·사군자부 심사위원인 다구치 베이호(田口米舫)에게 극찬을 받으며 '홍월(虹月)'이라는 아호를 받았고, 이후 도쿄에서 유학을 하게 된 것도 그의 문하생으로 연구를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3. 김응원의 귀한 사진 한 장

김응원의 활동이 다양하고 유명하였음에도 그의 행적에 대한 개인적인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어 비해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동안 그가 그린 난초 그림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당대 화가 중에서 남긴 숫자로는 가장 많을 것이다. 그만치 당대에 인기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더욱이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그림을 받을 정도로 관심도 많았고 교류도 많았다. 일본인들은 자료 남기기를 좋아 하는데, 이렇듯 저명한 서화가이었음에도 사진 한 장 조차 남아있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그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풀어보고자 하였다. 이곳 저곳 자료가 있을 만한 곳을 수소문 하였다. 그러나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헤매던 중 아주 우연히 매우 귀한 자료 하나를 보게 되었다. 바로 김응원의 장년 시절 행적을 알 수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김응원의 사진으로 확인되는 것으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김응원이 일본에 갔을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같이 있는 이들이 모두 일본인들이고, 집과 주변 환경이 일본 냄새가 강하게 나기 때문이다. 뒷면에 촬영 시기와 인물의 이름이 적혀 있다. 촬영시기는 1903년이며, 촬영자는 등생승장(藤生勝藏)이라는 사람이다. 사진관은 아티스틱 포토그래퍼(artistic photographer)라는 곳이다. 이 사진관은 당시 경성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일본에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 근대 미술사에 김응원의 일본행에 대한 보고가 없었는데, 이 사진으로 미루어 김응원이 일본을 방문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이 유난히 일본에서 많이 발견되고, 일본인에게 그려준 것이 많은 것도 그가 일본을 방문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에서 세번째 사람이 김응원이며, 한복이 아닌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키는 보통 사람보다 큰 편이었으며, 이마가 넓고 체형은 다소 건장한 편이다. 비교적 넉넉한 품성이 느껴지는 인상이다. 뒷면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진 뒷면



제일부겸이(齊一復謙二)(?)
전양욱태랑(田陽郁大郎)
김응원(金應元)
전양보(田陽保)
가등진사랑(加藤晋四郎)
장수량작(長又良作)
전촌직차랑(田村直次郎)
성야용(星野勇)

등생승장 (藤生勝藏) 촬영
1903년 5월(明治三十六年五月)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8.10.2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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