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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근대 서양화단의 선구자 아사이 추(淺井忠)의 한국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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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근대화단의 아사이 추


혹자는 한국에 국민화가 박수근이 있다면, 일본에는 아사이 추(淺井忠, 1856-1907)가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아사이 추는 일본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근대 초기 화가이다. 그는 뛰어난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미술교육자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일본 서양화의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추앙받는 국민화가이다. 아사이 추는 에도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죽었다. 어려서 구로누마 가이잔에게 일본화를 배운 뒤, 서양화로 진로를 바꾸어 1876년 3월부터 도쿄에서 구니사와 신쿠로에게 서양화의 기초를 배운다. 1877년 11월 창립된 일본 최초의 미술학교인 고부미술학교(工部美術學校)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이탈리아에서 초빙된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폰타네지(Antonio Fontanesi, 1812-1882)의 지도를 받고 그의 화풍과 정신에 큰 영향을 받는다. 폰타네지가  2년 정도 활동하고 돌아가자 그 뒤 후임으로 온 교수에 대하여 불만이 생겼다. 아사이 추는 오야마 쇼타로 등과 함께 자퇴한 뒤 '십일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아사이 추는 1889년 동료들과 함께 일본 최초의 서양화 단체인 '메이지미술회'를 결성하여 서양화의 발전과 보급에 힘썼다. 이 무렵 후에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봄 이랑>, <수확> 등을 발표하였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종군화가로 참가하였으며, 귀국한 뒤 <뤼순전 후의 수색>을 발표하여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에서 2등상을 받았다. 1898년에 도쿄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2년 후 당시 문부성의 정책으로 해외로 나가 연구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는다. 그는 서양화 연구를 위해 190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와 파리 교외의 그레(Gres)에서 살면서 많은 작품을 그리고, 1902년 이탈리아, 독일, 영국을 거쳐 귀국한다. 돌아와 교토에 있는 고등공예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자신의 집에 '쇼코인 양화연구소'를 설립한다. 이 연구소는 점차 일본 근대 서양화의 본산으로 자리잡는데, 후에 '간사이 미술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초대 원장이 된다.

아사이 추는 그림 외에 도안⋅도기⋅칠기⋅염직물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서양화 외에도 어려서 배운 일본화를 취미삼아 그렸다. 초기 작품은 주로 전원이나 바닷가에 인물을 배치하고 갈색을 주조로 그렸다. 이는 젊은 시절 스승인 폰타네지의 장기인 바르비종파의 낭만주의적 화풍과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 작품은 구로다 세이키 등 하쿠바카이의 '무라사키파'에 대하여 '야니파'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1897년쯤부터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프랑스 유학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또한 그는 뛰어난 후배화가를 많이 길러냈는데 그의 문하에서 소화시대 일본 화단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야스이 소타로와 우메하라 류자부로 등 많은 화가들이 배출되었다. 한국과 많은 관련이 있고 후에 문화학원 미술과를 창설한 이시이 하쿠데이도 그의 제자였다.



2. 한국과 아사이 추와의 인연


아사이 추의 한국과 관련된 기록은 미술과 관련된 면에서는 뚜렷한 접촉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미술사적인 면에서 기억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까닭에 그가 한국과 관련된 미술사적 행위는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한일병탄 전인 1907년에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한국과 접촉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해외 열강들이 한국을 둘러싸고 호시탐탐 침탈을 노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더구나 유명한 화가들은 정치에 이용되어 활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은 더욱 높다. 아사이 추도 그럴 가능성이 많아 기록을 추적하여 보니 예상대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한국 풍경을 그린 두 점의 작품을 남기고 있었다. 그가 한국 풍경을 남기게 된 것은 아름다운 한국을 방문하여 풍경에 감동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국이 일으킨 전쟁에 종군 작가로 참여하여 한국을 경유할 때 본 것을 그린 것이다. 이 전쟁은 다름 아닌 '청일전쟁'이다. 청일전쟁은 1894에서 1895년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한국의 정치적 지배를 둘러싸고 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결국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그 결과 한국은 뿌리깊은 청국의 종주권에서는 벗어났으나,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의 대상으로 바뀌어 인적, 물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수난을 당하게 된다. 아사이 추는 이 전쟁의 종군 화가로 군대를 수행하하며 전쟁의 과정을 기록한다. 청일 전쟁에서 가장 큰 전투 중의 하나가 평양성 전투였는데, 이 때 아사이 추가 종군하여 평양의 풍경을 그림으로 담는다. 그 중 두 장의 그림이 도판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3. 아사이 추의  작품 <평양 연광정>과 <조선 대동문>


아사이 추가 남긴 한국을 그린 작품은 두 점으로 한 점은 <평양 연광정>이고, 다른 한 점은 <조선 대동문>이다. 모두 1894년에 제작된 것이다. 일본인 서양화가가 한국 풍경을 그린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들은 종군 화가로서 그린 것이라 다른 한국을 방문한 화가들이 그린 작품과는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인다. 개인적으로 또는 공무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 화가들이 그린 작품은 주로 유적지나 명승지 또는 한국민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사이 주의 작품은 명승지를 그렸지만 유적을 둘러싼 주변 분위기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다. 연광정과 대동문이라는 명승 유적이지만 고즈녁한 분위기보다는 전쟁의 상흔이 가득하여 을씨년스럽기끼지 하다.


아사이 추 <평양 연광정>


아사이 추 <조선 대동문>


연광정 주변으로는 대동강 안팎으로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말이 여러 마리 있는 것으로 보아 군대와 관련 있는 인물들로 보인다. 펜으로 선묘를 하고 수채를 이용하여 맑은 색감을 만들었다. 전쟁이라는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전쟁 상황과 달리 평화롭게까지 느껴진다. 안정된 구도에 맑은 색채를 선호하는 작가의 품성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대동문 주변의 상황은 전쟁의 모습이 더욱 완연하다. 문 앞에 민간인 몇이 짐을 나르고 있고, 그 사이로 일군의 일본 군인들이 총을 메고 가거나 말을 타고 줄지어 문을 통과하고 있다. 전쟁이 우세하여 북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의 오른 쪽으로 말인듯한 짐승 두 마리가 죽어 넘어져 있는데, 전쟁의 피해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마리 짐승의 죽음으로 전쟁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도 연광정을 그린 것과 마찬가지로 숙련된 화가의 안정된 구도도와 맑은 색채 감각이 전쟁의 상흔을 잊게 하는 면이 있다. 두 점 모두 세련된 감각이 살아 있어 종군 화가의 기록적인 성격 못지 않게 예술적 감성도 느껴지게 한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8.06.2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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