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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마모토 바이카이(山本梅涯) <조선 사찰 풍경>의 서글픈 운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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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체불명의 산수화 한 점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하지만, 그림 내용과 화제 글씨, 낙관 등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정체불명의 동양화 작품 한 점이 있다. 언뜻 보면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이 그림을 그리고, '매애(梅涯)'라는 사람이 화제를 쓴 것으로 이해가 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의문시 되는 부분이 여럿 나타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좌측 위쪽에 조석진의 작품 제작 내력을 쓴 글과 '매애'라는 사람의 화제가 적혀 있다. 그런데 화제의 내용과 구성이 서로 조화롭지 못하여 일반적인 합작도와 비교할 때 자연스럽지 못하다. 

    
<조선 사찰 풍경>



보통 합작도는 그림을 그리고 화제를 나중에 쓰는 게 일반적이다. 화가는 그림을 그린 후 그림의 한 쪽에 수결과 인장을 찍는다. 그 후에 화제를 쓰는 사람이 공간을 조절하여 화제를 쓴다. 화제를 쓰는 사람이 화가의 수결까지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림을 그린 후 화제를 그림의 좌측 위 중심에 먼저 쓰고, 그린 이는 나중에 그린 내력을 옹색하게 추가하고 있다. 현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분석해 보면 "1925년 초봄에 소림 조석진이 봉운사(奉雲寺)를 그린 작품으로 매애라는 이가 정판교의 시를 화제로 쓴 작품"이라는 의미의 화제들이다.     

"을축년(1925년) 초봄에 봉운사를 소림 조석진이 그리다.“     
乙丑 早春 奉雲寺 小琳 趙錫晉 畵


이렇다면 이 그림은 분명 조석진이 그린 것이라야 한다. 1925년 초봄에 조석진은 매애라는 친구와 함께 봉운사라는 절에 놀러가 먼저 그림을 그리자 매애가 화제를 쓰고 인장을 찍는다. 조석진은 마침 인장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 집에 돌아와 그날 일을 추서하여 적고 자신의 인장을 마지막으로 찍는다. 이러한 해석은 그럴 듯한 일이면서도 무언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특히 조석진이 추서한 자리는 작품을 하는 사람이라면 글씨를 쓸 만한 공간이 되지 못한다. 조석진처럼 중국까지 유학 가서 공부하고 온 화원 신분인 화가가 이런 좋지 않은 구성을 할 리가 없다. 나중에 추서할 것이라면 그림 아래쪽에 년도, 장소, 이름만 간단하게 쓰고 인장만 찍으면 될 일이었다.


2. 그림과 화제, 수결과 인장 구성의 문제점

그렇다면 이러한 화제 및 전체적인 구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먼저 그림을 보면 조석진의 그림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의 일반적인 필치와는 다른 면이 보이고, 채색 또한 감각적인 면에서 조금 다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색감도 화사한 느낌이 더하다. 당시 중국, 한국, 일본의 그림이 비슷한 면이 있지만, 각국의 그림이 조금씩 체질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이 그림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에서 공부한 조석진의 필치와는 달리 일본의 새로운 형식인 신남화의 느낌이 많이 난다. 또한 조석진이 쓴 화제는 위치도 어색할 뿐만 아니라, 글씨의 필체도 비슷한 듯하지만 실제 그의 글씨보다 더 투박하고 솜씨가 뒤떨어진다. 인장은 더욱 보기에 불편하다. 전각 솜씨도 수준이 떨어지고 사용한 인주 또한 당시 명가들이 사용하던 좋은 인주도 아니다. 더욱이 인장의 크기도 매애의 인장에 비해 너무 커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삐딱하게 찍힌 이 인장은 고급 미술 문화를 습득한 조석진의 행동으로는 나올 수 없는 일이다.

    
현재 모습과 조석진의 흔적을 지운 모습


이 작품은 오히려 어설픈 조석진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매애(梅涯)'라는 이의 화제만 남겨 놓으면 '매애'라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화제를 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구성을 보인다. 그렇다면 '매애'라는 이는 누구일까? 일제강점기에 이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린이라면 상당한 수준의 작가일 텐데 그는 누구일까? 그림 속 '매애'라는 수결은 한자의 의미 특성으로 보아 분명 '호(號)'일 것이다. 화제 아래에 찍힌 인장 두 과를 보면 첫 번째 백문방인 인장에 '산본(山本)'이라는 글씨가 보이는데, 이는 분명코 일본 사람들의 성씨인 '야마모토(山本)'이다. 그렇다면 일본인 화가들은 성과 호를 합쳐 화가의 필명으로 쓰니 '산본매애(山本梅涯)', 즉 '야마모토 바이카이(山本梅涯)'라는 화가이다. 그는 누구일까?

그림 내용이 절의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니 제목은 <조선 사찰 풍경>이라 하기로 한다. 그림 속의 절이 분명 한국 불교의 절 풍경이니 한국과 관련된 화가임에 분명하다. 그러면 일제강점기 일본인 화가 중 한국에서 활동한 화가들 중에서 찾으면 그 정체를 알 수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당시 자료들을 찾으니 어려울 것 같았던 숙제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야마모토 바이카이'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유명하고 한국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와서 활동하였던 유명한 화가였다. 더욱이 경성에 '양화속습소'라는 서양화 강습소를 차렸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 강습소였다. 그러니 야마모토 바이카이는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서양화의 정착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3. 야마모토 바이카이(山本梅涯)의 생애

야마모토 바이카이는 어떤 화가이었을까?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그의 삶을 더듬어 본다. 한일 합방이 일어난 이듬해인 1911년, 매일신보에는 한국 근대 미술사의 중요한 사건인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일본의 유명한 양화가 산본매애(山本梅涯)씨가 연필화, 수채화, 유화 등을 교수하기 위하여 초음정(初音町) 15번지에 양화속습소(洋畵速習所)를 설치하고, 왼쪽과 같은 취지 및 개칙을 제정하였는데, 조선 신사숙녀 및 일반학생 중 사계에 뜻이 있는 자는 신속 입회 강습함이 가하다더라."

야마모토 바이카이는 1911년 봄, 경성 초음정(初音町) 15번지(지금의 오장동)에 한국 최초의 서양화 강습소인 '양화속습소'를 설립한다. 이제껏 한국에는 어떠한 서양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도 없었다. '양화속습소'는 자신의 아틀리에이면서 동시에 그림을 가르치는 학원과 같은 곳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문광고를 통해 남녀 학생을 모집해 연필화, 수채화, 유화를 지도한다고 하였다.

야마모도 바이카이는 일본 혼슈 남서부 야마구치현 출신으로 교토에서 마루야마 시조파의 중심  인물인 고노 바이레이(幸野梅嶺, 1884-1895) 문하에서 그림을 배운다. 고노 바이레이는 마루야마 시조파의 적통을 잇고, 후에 교토회화미술학교를 설립하는데 많은 역할을 한 거물이었다. 이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경험을 쌓는다. 교토에서 비로소 일본화의 참 맛을 느낀 야마모도 바이카이는 29살이 될 때까지 일본화로 미술계에 몸을 담는다.

29살이 되어 일본화의 한계를 느끼고 처음으로 서양화를 배운다. 3년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32살 때 처음으로 서양화 공부를 위해 해외로 진출하기를 시도한다.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 지방에서부터 남부 지방으로 여행하며 3년간 그림 공부를 한 후, 유럽으로 유학하고자 하였으나 러일전쟁이 일어나 가지 못한다. 중국 광동으로 가서 양광사범학교와 술선소학교 등 주변 7개 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후 방콕, 태국, 사이공, 베트남, 싱가포르, 랑군, 캘커타, 세이론섬 등 동남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림을 가르치며 공부를 한다.

동남아를 돌아다니며 미술을 가르치며 공부를 하던 그는 다시 유럽 유학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에 있는 해머스미스 아트스쿨에서 2년간 공부한다. 학교에 다니며 시간 날 때마다 유럽대륙과 아일랜드 등 서양미술을 만들어낸 유럽 정서가 가득한 여러 지방을 다니며 회화와 관련된 지식을 습득했다. 유럽 유학을 끝내고서도 광대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1908년에는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그림을 공부를 시작한다. 그림 공부를 세계 전역을 돌아다닐 만큼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1909년에야 기나긴 미술 유학을 끝내고 고향인 야마구치로 귀국한다. 그러나 타고난 방랑벽이 있었는지 바이카이는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909년 6월에 다시 한국의 부산으로 건너오게 된다. 이후 경성으로 올라온 그는 1911년 1월에 한국 최초의 서양화 강습소인 '양화속습소'를 설립한다.
1922년에 조선미술전람회가 생기자 창설에 많은 기여를 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의 상징적 존재로 동양화부와 서양화부에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이후의 행적은 추적하기 어려워 알 수 없으나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등의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보면, 적어도 1932년까지는 한국에 머물며 안중식·오세창 등 미술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내다 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계속)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12.1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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