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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 궁체 서예의 개척자 봄뫼 이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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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예라는 예술 장르는 중국의 한자에서 시원된 것이지만, 우리 글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그 의미를 다시 규정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자랑스런 한글이 있고, 오래 전부터 붓으로 한글을 써온 전통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서예라는 예술의 개념은 중국의 서체를 답습한 한문 서예보다는 한글 서예가 중심을 이루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세종때 한글이 창제되고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목판본에 한글이 등장하며 한글 글자체의 모본이 정립되었다. 이른바 훈민정음체라는 타이포그라피가 정립된 것이다. 훈민정음체는 궁중, 관으로 대변되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당대의 사회적 약자였던 하층 계급과 여성들 사이에선 다른 서체가 사용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는 한글을 인쇄하기 위하여 한자의 전서체를 본뜬 한글 서체를 사용하였다. 필사의 경우는 해서체를 따라오다가 17세기 말경부터 한문의 초서체와 비슷한 흘림글씨체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글씨의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채 한문의 서풍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것이 점차 한글의 특수한 글씨 모양에 알맞은 서체로 발전하면서 실용적인 새로운 형식이 생기고, 흘림체에도 뛰어난 시각미를 갖춘 독특한 궁체가 형성되었다. 

궁체는 글씨의 선이 부드러우면서도 곧고 맑으며, 단정하고 아담한 것이 특징이다. 궁체는 주로 궁중 나인들에 의하여 궁중에서 발전하여 왔기 때문에 '궁체'라는 이름이 생겼다. 궁체는 의식적으로 사용되거나 소설책에 단정하게 쓰이는 등서체(謄書體)와 일상 생활에서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장식적인 서간체(書簡體)로 구별된다. 

한글 서예는 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예술의 형식으로 자리잡기는 조선후기 이후이다. 한글을 서예 작품이라는 형식으로 남긴 개척자는 주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대표적인 이로는 남궁억, 김영진, 김충현의 남성 서예가들과 윤백영, 이각경, 이철경, 이미경, 이학 등 여성 서예가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왔다. 

2.
한글 궁체가 서예라는 예술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봄뫼 이각경(李珏卿)'이다. 그는 항일 민족주의로 무장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만규(李萬珪, 1889-1978)의 둘째 딸이다. 이만규에게는 네 딸이 있었다. 첫째는 임경(姙卿), 둘째는 각경(珏卿), 세째는 철경(喆卿), 네째는 미경(美卿)이다. 이중 각경과 철경은 쌍둥이였다. 이만규는 본래 경성의전을 나온 의사였지만 2년 동안 만 의사 일을 하고, 이후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 두고 교육학과 한글을 공부하였다. 그는 호를 '야자(也自)' 라 하였는데, 천자문의 마지막 글자(也)로서 자신(自)을 낮추고 겸손함을 표현하여 지은 호라고 한다.

이만규는 1889년 강원도 원성군(지금의 원주군) 지정면 근편리에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과 서예를 수학하다가 16세가 되던 해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였으나, 입학시기를 놓쳐 경성의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한국은 1905년 조약에 의해 일제에 의한 통감정치가 행해지던 시기로 이 때 이만규는 관동학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관동학회는 남궁억이 강원도의 문화향상을 위해 설립한 학회였는데, 이만규는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낭궁억은 한글에도 조예가 깊어 궁체에 바탕을 둔 한글 서예에 독보적인 실력을 갖춘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하였다. 이만규는 이곳에서 낭궁억의 감화를 받아 한글 서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만규는 학회를 통해 국권회복을 위해서 지식인을 중심으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해야한다는 시대적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11년 경성의학교를 졸업한 후 개성에서 의사 생활을 하던 중 1913년 윤치호의 권유로 송도학교에서 교육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는 일본이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사립학교에 대해 강한 통제를 하던 때였다. 1915년에는 개정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하여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반일 내용의 노래를 보급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되기도 하였다. 1925년부터 서울 배화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반일애국사상을 교육하였으며, 조선어학회 회원, 간사, 위원장을 맡아 국어 철자법을 통일하고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만규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한글을 사랑했고, 직접 한글 글씨를 쓰기도 하였으며, 궁체에 대한 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네 딸들에게 체본을 보고 글씨를 쓰는 방법에 대해 지도를 하면서, 대궐 안에서 상궁들이 쓴 글씨를 운현궁 등에서 빌어내어 직접 보고 쓰도록 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특히 이각경과 이철경은 뛰어난 재주를 보여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당시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였던 큰언니 임경(姙卿)도 막내인 미경(美卿)에게 글씨 지도를 할 정도로 네 자매가 모두 한글 서예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으며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이만규는 선각자적 교육열로 당시로는 드물게 네 딸을 모두 전문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첫째 이임경은 경성사범학교를 다녔고, 이각경은 이화여전 가사과를 다녔으며, 이철경과 이미경은 음악과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또한 서예를 본격적으로 한 이각경, 이철경, 이미경 3자매의 아호를 '봄뫼', '갈물', '꽃뜰'로 지어 주기도 하였다. '비단 땅', '비단 마음', '비단 글', '비단 글씨' 등 자매들이 사용한 아름다운 두인(頭印) 문구 또한 모두 이만규가 지어 준 것이다. 어느 하나 빠짐없이 우리 글을 사랑했던 이만규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들이다.

3.
이각경은 1914년 개성에서 이철경과 쌍둥이로 태어난다. 5세 되던 1918년 4월에 개성의 한 유치원에 입학하며 한글 서예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음 해 3월 독립만세운동으로 집안 남자가 모두 검거되고 교문이 닫히는 사건이 생긴다. 어쩔 수 없이 1년 동안 부친의 고향인 간현리에 내려가 있게 되었다. 이 동안은 붓글씨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에 개성의 호수돈보통학교에 조기 입학하여 다니다, 5학년 때 부친의 전근으로 서울의 배화보통학교로 편입한다. 그리고 14세 되던 1928년에 서울에서 입학이 가장 힘들었던 경성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에 동생 철경과 함께 입학한다. 1학년 때 부친의 서가에서 언문체법을 발견하면서 각경은 이 체본에 나타난 언문 글씨의 조형적 아름다움에 관심이 쏠려 한글 쓰기에 전념했으며, 모친이 언문편지를 쓰는 멋있는 모습에 도취되어 더욱 한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각경은 한글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구성의 미를 스스로 깨닫고 조화미와 생동감이 돋보이는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고, 계속 스스로 연마하면서 궁체의 필법을 체계화시켰다. 그러한 사실은 동생 철경이 훗날 술회한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초기에는 궁중여인들의 글씨나 정경부인들의 글씨를 옥한문체(玉漢文體)인 잔글씨 그대로 모방하여 익혔다. 한문옥법(漢文玉法)을 익힌 솜씨로 한글글씨의 요령을 분석하며 익히는 과정에서 자획의 구성 요령을 터득하였고, 큰 글씨로 키워서 시도하였다.”고 한 것은 언니 각경에게도 적용되는 당시 한글 학습법이었다.

이각경은 경성여고보 2학년을 수료하고 아버지가 근무하는 배화여고보로 전학한다. 여고보를 졸업한 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입학한다. 본래 음악과를 가려고 했으나 자신의 적성이 이과에 있음을 알고 가사과를 택한 것이다.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 영양학을 전공하고 돌아온다.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마침 여운형의 눈에 들어 비서 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마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비를 만드는 일이 이루어지는데 여운형이 깊이 관여하게 된다. 여운형은 이각경을 추천하여 비문을 쓰게 한다. 당시 여성이 비문을 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라 당시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이 일로 이각경은 유명세를 타며 일약 당대 최고 수준의 여류 서예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45년에 건국부녀동맹이 결성되는데 이각경은 동맹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한다. 또한 같은 해 조선아동문화협회를 결성하는데에도 참여하여 공저로 <그림한글책>도 다시 내기로 한다. 194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지도 아래 '한글서도연구회'를 창설한다. 일찍이 이충무공 비문을 썼으며 중등학교 습자책을 발간한 경력이 바탕이 된 조직이었다. 이제 한글 궁체 글씨의 제일인자로 자리잡게 된 이각경은 첫 사업으로 초등용 습자책 <어린이글씨체첩>과 중등용 습자책 <가정글씨체첩>을 발간한다. 임시사무소는 서울 종로 영보빌딩에 있는 을유문화사 안에 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전국교원강습회를 열기도 하였다.

열심히 한글 서예 보급에 노력하던 이각경에게 돌이킬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은 한국 한글서예계에는 재앙과 같은 비극적인 일이었다. 1948년 4월, 이각경의 아버지 이만규는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하러 평양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때 이만규는 두 딸은 데려가고 두 딸은 남쪽에 남겨둔다. 아버지를 따라간 딸이 첫째 이임경과 둘째 이각경이다. 아버지가 데려간 것인지, 스스로 따라 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딸 이각경이 어떤 사회적 의식을 갖고 따라 나섰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 유학하였고 여운형의 비서까지 할 정도로 정치적 입지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분히 본인의 의지로 아버지를 따라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후 이각경은 북쪽에서 한글 서예가로 크게 이름을 날린다. 북한의 공식적인 출판물에 궁체가 많이 사용되고, 구호를 적은 선동적인 글씨들이 주로 궁체를 사용하는 것도 이각경의 노력과 많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각경은 평양 예술학교 교수로 있으며 많은 제자를 양성한다. 1955년에는 <조선여성사>라는 책을 내기도 하는 등 사회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후 활동이 줄어들며 점차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1987년 미국에 사는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 심훈의 아들이 북한을 방문하였을때 이각경이 다시 등장한다. 이만규와 심훈이 사돈 관계였기 때문에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때 이각경은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란 시를 한글 서예로 적어 선물로 전달한다. 그동안 이각경은 여전히 글씨를 쓰고 있었다. 사진 속의 글씨를 보면 과거의 솜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이각경은 적어도 1987년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여전히 한글 서예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4.
이각경의 한글 글씨 작품은 전해지는 것이 매우 적은 편이다. 사실 그동안 이각경이라는 이가 한글을 썼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작품을 본 적은 없었다. 단지 그가 출판한 한글 서예 관련 출판물을 통해 그의 글씨 솜씨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그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없어 볼 방도가 없었다. 필자가 30년 동안 미술계 쪽에 있으며 수도 없이 많은 한글 작품을 보았는데, 단 한 점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인 이철경과 이미경의 솜씨를 보며 비슷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30여 년 동안 찾았으나 보기 힘들었던 이각경의 글씨가 한 미술품 경매회사에 출품되었다. 경매 마지막 날까지 가슴 조아린 끝에 겨우 입수할 수 있었다. 월북하여 작품이 거래된 흔적이 없고, 오랜 세월 잊혀진 이름이 된 까닭에 생각보다는 금전적인 출혈을 심하지 않게 구매할 수 있었다. 


이번에 발견한 이각경의 종액 한글 글씨는 1935년 21세 때의 작품으로 조선시대 이조년의 시조 등 다섯 편의 시조를 한 장의 종이에 나열하듯 쓴 것이다. 지금 시대 같으면 시조 한 편을 한 장의 종이에 미술품 개념으로 조형적 구성을 하며 썼을텐데, 이 작품은 그러한 고려없이 단순하게 차례로 나열하며 쓴 느낌이다. 한글 서예가 기틀을 잡기 전의 시대적 상황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일제강점기에는 미술품으로서의 한글 서예가 정립된 시기는 아니었다. 당시 남궁억 선생이 시조를 궁체로 쓰되 한문 서예 형식으로 하고 낙관을 한 경우가 있었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활동한 춘전 김영진 같은 이는 한글 사서삼경에서 한 부분을 따다 궁체로 쓰는 정도가 한글 서예였다. 이각경은 소재를 취함에 있어 남궁억 선생의 틀을 모범으로 삼아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버지 이만규와 남궁억과의 사제 관계 등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번 1935년에 쓴 글씨를 보면 해방 이후에 이철경, 이미경 자매의 글씨와는 조금 다른 듯한 인상을 느낄 수 있다. 당시 이각경의 글씨는 원숙한 맛이 떨어진다. 젊어서 그런지 강단은 있지만 다분히 거친 면이 있다. 당시 궁중에서 서사 상궁들이 책을 베끼며 쓰던 필체에 가깝다. 한편으론 당시 실용어이던 궁체가 현대 서예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 초기 형태의 모습이라 현대 한글 궁체에서 보는 세련된  맛이 적고 당시 궁체의 날 것 그대로가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그런 것을 보면 갈물과 꽃뜰의 글씨는 이후 현대에 맞게 좀더 부드럽고 원만한 필선과 안정적인 결구에 관심을 두고 조금씩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18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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