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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후기 익산 출신 문인화가 소초(小樵) 정래봉(鄭來鳳)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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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초(小樵) 정래봉(鄭來鳳)이라는 화가는 조선시대 미술사에서 많이 알려진 화가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작품이 비교적 많은 편이고, 그 수준 또한 높은 경지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하는 그의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가장 많은 것이 사군자 계열의 작품이다. 매란국죽 어느 화목할 것 없이 뛰어난 솜씨를 보이며, 괴석(怪石) 그림에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다른 하나는 산수화이다. 그의 산수화는 일반적인 문인화풍의 간결한 내용에서부터 매우 복잡하고 활기 넘치는 화려한 풍경까지 다양하다. 또한 그림에 덧붙여지는 화제 글씨는 추사 김정희 계열의 필치를 보이는 단정한 글씨를 썼다.

정래봉이 전혀 미술사에 이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위창 오세창 선생이 저술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그의 부친인 정석계 조에 이름이 등장한다. 박규수의 《환재집》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생(鄭生) 석계(石溪)는 화법을 깊이 연구했고,  
 그의 아들 정래봉 역시 그림에 능했다.(환재집)"

鄭生石溪 深究畵法 其子來鳳 亦能畵(瓛齋集)

이를 통해 정래봉의 아버지는 18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정석계(鄭石溪)란 사람으로 그림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석계'는 호로 보이는데, 이름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화명이 높은 지방작가로 보인다. 박규수 또한 서예에 능했고, 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만큼 그의 눈에 '화법을 깊이 연구했다'는 평가를 한 것은 정석계의 그림 수준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박규수가 실학자이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정석계의 그림 또한 김정희의 정신 세계에 맞닿은 그림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이제껏 정석계의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정래봉의 사승 관계는 전해지는 바가 없다. 아버지가 화가였음을 고려하면, 필시 아버지에게 그림을 먼저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현재 전하는 그림들을 고려하여 그의 화계를 추정해보면, 정석계는 김정희 주변 어느 화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하고, 정래봉은 이를 이어 받은 듯 하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김정희의 제자였던 우봉 조희룡의 예술세계에 영향을 받은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근거는 그의 화풍과 예술에 대한 인식이 조희룡에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사군자는 매란국죽 골고루 있는데, 난초와 매화 그림은 특히 조희룡의 영향이 많이 느껴진다. 간일하면서도 격조가 있는 것은 청나라 문인화의 영향을 받은 김정희 학파의 범주 안에 있다. 그의 산수화 또한 필치의 활달함이나 화려한 구성 등이 조희룡의 영향이 느껴진다. 화제 글씨 또한 추사체의 영향이 진하게 느껴진다. 글씨의 결구 등에서 조희룡의 서법의 흔적이 깊이 배어 있다.


또 하나 정래봉의 회화 세계에서 매우 특별한 것은 '다양한 인장의 사용'이다. 필자가 확인한 2권의 화첩과 1개의 병풍은 모두 60정 정도의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작품에 쓰인 인장 중 같은 것을 쓴 것이 거의 없다. 정래봉은 인장 사용에 있어 같은 인장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결벽을 느낄만큼 새로운 것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장 하나 하나는 모두 비슷한 형식이고, 비교적 높은 수준의 전각 솜씨를 보인다. 이를 보면 경제적 여유가 많아 많은 인장을 보유하고 있었거나, 본인이 전각에 능하였거나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인장벽' 또한 조희룡 등 청나라를 공부한 선대 스승들의 영향일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정래봉의 출생지나 활동 근거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단지 19세기에 활동한 화가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의 많은 작품 중 몇 작품에 쓰인 인장의 문구가 그의 근거지가 어디임을 알려준다. 사군자에 찍힌 인장의 문구는 '익산인(益山人)' 또는 '익산소초(益山小樵)'이다. 이는 그가 전라북도 익산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한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그의 작품 상당수가 주로 전주 주변 지역에서 발굴되는 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계속)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08.1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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