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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미즈 도운(淸水東雲)의 최제우·최시형 참형도(慘刑圖)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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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최시형 참형도(慘刑圖)

글/ 황정수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은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해월(海月)로 최제우와 같은 고향인 경주 출신이다.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며 살던 그는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 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아 도통을 승계 받았다.

그는 최제우가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곳에서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고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최제우의 기일(忌日)에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동학의 교세도 만만치 않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여러 차례 전개하여 나갔다.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임을 이유로 교세확장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고부군청을 습격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진력을 다하였고, 향아설위(向我設位)·삼경설(三敬說)·이심치심설(以心治心說)·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양천주설(養天主說)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다.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최시형 참형도(慘刑圖)> 


<최시형 참형도>는 <최제우 참형도>와 쌍을 이루는 작품이다. <최제우 참형도>와 크기도 같고 채색 방식도 거의 같다. 단지 내용과 구성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처형 장면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최제우는 칼로 목을 자르는 참형을 당하였고, 최시형은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을 당하였다. 또한 최제우는 혹세무민의 죄로 조선 관군에 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나, 최시형은 일본군이 개입된 관군에 잡혀 일본군 앞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치욕을 당한다. 두 점의 기록하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최제우 참형도>가 처형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며 거리를 두고 그린 것에 비해, <최시형 참형도>는 처형 장면을 앞으로 당겨 그려 그 생생함을 더욱 강조하였다. 너무도 생생하게 포승줄에 묶여 교수를 당하는 모습을 섬뜩할 정도로 처절하게 그리고 있다. 퇴색한 듯한 느낌이 드는 나무 짝들을 배경으로 가람판도 없는 의금부의 교수대의 광경이 음산하기 이를 데 없다. 줄에 걸려 생명의 온기를 잃은 최시형의 휑한 눈동자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처형을 집행하는 전형적인 조선 서민 복장을 한 두 사람이 조선인임이 최시형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 했던 인내천 사상과 부조리하게 겹쳐지며 애잔함을 느끼게 한다. 이들을 바라보는 두 명의 조선인 관원과 세 명의 일본 군사들의 모습에서 최시형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주체가 일본임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조선인 관원은 부채를 들고 있는데, 그 모습에서 최시형의 죽음에 마주해서 비통함을 느끼지 못하는 당시 조선 관원들의 친일적인 모습이 생각나게 한다. 또한 일본 군사들의 허리에 찬 기다란 칼에서 최시형의 죽음이 이들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한다.         


<최시형 참형도> 부분도


그림 곳의 중앙에 포치된 최시형의 죽어가는 얼굴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현실을 대변하는 표상이다. 늙고 지친 민족주의자가 맞이하는 최후의 순간은 당시 열강들의 야욕에 갈 길 몰라 하는 대한제국의 부끄러운 현실과 겹쳐지는 보는 이의 가슴을 힘들게 한다. 동학놈민전쟁도 실패로 끝나고, 지도자인 최시형·전봉준도 죽음을 맞이하는 조선의 정신은 곧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피폐될 것이라는 예시가 느껴지는 장면이다.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는 조선인을 위한 민족정신이 담겨있는 정신사적 단체 행동이 실패하였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의 쓰라린 기억을 한국인 화가의 손이 아니라 일본인 화가의 손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억울한 일이다. 이 작품이 그동안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숨겨져 있었던 것도 어쩌면 해방 후 이러한 사실이 부끄러워 떼어져 처박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다시 이 그림을 마주 대하는 것도 편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이 의미가 있는 것은 당시 동학과 관련된 특별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과 전에 걸려 있던 작품을 가시 그렸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미즈 도운의 당시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오는 화풍의 모습을 처음으로 실제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할 수 있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06.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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