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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미즈 도운(淸水東雲)의 최제우·최시형 참형도(慘刑圖)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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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참형도>

글/ 황정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각지의 반란, 외국의 간섭, 정치의 문란,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다. 종래의 종교는 이미 부패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민중의 신앙적인 안식처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1860년 최제우는 새로운 종교인 동학을 창건한다. 그는 경주 출신으로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였다. 그는 ‘동학(東學)’이라 이름 짓고 종래의 풍류 사상과 유·불·선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을 전개한다. '인내천'의 원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과 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동학은 조선의 지배논리인 신분·적서제도 등을 부정하는 현실적·민중적인 교리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되던 삼남지방에 재빨리 전파되었다. 동학교도들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금지시켰다. 교조 최제우는 추종자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1864년 봄, 대구감영에서 혹세무민한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1894년에 시작된 동학농민전쟁이 외세에 힘을 잃고 실패하고,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이 처형되었다. 도통은 손병희(孫秉熙)에게 전수되었다. 손병희는 사태를 수습하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관헌의 추적이 심해지자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했고, 그 해 9월 일시 귀국했다가 ‘세계의 대세’를 깨닫기 위해 1902년 3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일본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망명 중이던 개화파 지식인들과 교유하여 새로운 인식을 얻는 한편, 국내와 연락하면서 교인들을 규합, 동학을 재정비하였다. 손병희의 도일과 일본 체류로 인하여 사상적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탄력성이 증대된 반면,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동학교도들의 민족적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1904년 8월 말부터 전국에 걸쳐 조직되기 시작한 진보회는 원래 동학교도들이 기존 정치체제의 개혁 세력으로서 참여하기 위한 기구였으나, 이용구(李容九)의 주도하에 송병준(宋秉畯)의 일진회(一進會)와 합하고 친일단체화 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교정일치론(敎政一致論)을 철회하고 정치적 관심을 포기, 종교로서의 동학을 고수하는 방침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교명을 바꾸고, 이듬해 1월 귀국하여 교회를 재조직하는데 착수하여 새로운 교단조직을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직의 분열을 불러왔다. 

특히 일본과 손을 맞잡은 이용구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동학에 가입,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최시형(崔時亨)의 제자가 되어 천도교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친일적 노선을 걷게 되자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했다. 천도교에서 나온 뒤 그를 따르는 박형채(朴衡采)·권병덕(權秉悳)·송병준(宋炳畯) 등과 신도들을 모아 1906년 서울 견지동에서 ‘시천교’를 세웠다. 시천교는 초기에는 막강한 일본의 후원 하에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시천교의 교리는 천도교와 크게 다르지 않고, 천도교와 마찬가지로 최제우의 사상에 교리의 맥을 두고 있었다. 

1911년 시천교는 교당을 크게 짓고, 교당 안에 교조인 최제우와 2대 교주인 최시형의 초상을 안치하고자 한다. 시천교는 초상을 그릴 화가를 일본인 화가를 물색한다. 이때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지 1년 밖에 되지 않는 해였고, 이미 창시될 때부터 일본의 도움을 받은 터였기 때문에 이들이 일본인 화가를 물색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한국인 화가 중에서도 초상화를 그릴만한 화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용구 등 시천교 수뇌부의 머리 속에는 한국인에 대한 고려는 이미 없었다. 더욱이 당시는 전통적인 조선조 방식의 초상화는 쇠퇴하고, 사진을 찍어 초상을 그리는 서구식 방식의 초상이 유행하던 때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석지 채용신조차 일본에서 배워온 서양화법으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터였다. 이러한 상황이 고려되어 화사로는 시미즈 도운이 선정되었다.  

시미즈 도운은 정동에 화숙을 열어 그림을 가르쳤고, 사진미술소를 차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또한 교토에서 배운 일본화의 화목인 인물화에 능한 화가였다. 더욱이 한일합방과 함께 관료로서 한국에 들어온 터였기 때문에 이용구 등과 교류가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진기법을 바탕으로 한 초상화를 그린다. 물론 이미 최제우는 처형을 당한 후였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실제 사진을 보고 그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그가 초상화의 도판을 보면 초상의 모습은 조선시대의 전통과 유사한 구도로 되어 있지만, 그리는 기법은 전형적인 사진 기법의 초상화이다. 섬세하게 음영을 넣어 그렸다. 아쉽게도 이 초상화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최제우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던 것을 보면 최시형의 초상화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시미즈 도운 <최제우상>  


10여 년 전까지도 전하던 최제우의 초상화가 전하지 않아 유일하게 남아 있던 시미즈 도운의 인물화의 존재는 사라져 버렸다. 그가 인물화에 능했다 하였는데 이제 그의 솜씨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발굴된 것이 <최제우 참형도>와 <최시형 참형도>이다. 초상화가 사라진 이후 그의 인물화 솜씨를 볼 수 있는 작품이 발견된 것이다.  
<최제우 참형도>는 최제우가 체포되어 대구감영 장대(將臺)에서 처형을 당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장대’는 전쟁 또는 군사훈련 시에 성내의 군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장군이 자리하는 누대이다. 보통 장대는 성 전체의 상황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에 위치하여 대장이 전황을 살펴보면서 임기응변할 수 있도록 하였던 곳이다. 현재 대구감영 장대가 어디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본래 대구감영은 동서남북 사방에 장루가 있었는데, 이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최제우 참형도(慘刑圖)> 


<최제우 참형도>는 최제우가 처형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원경의 배경으로 서너 봉우리의 산이 쳐져 있다. 그 앞으로 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누각 안에는 고을의 원이 자리에 앉아 형장을 주관하고 있다. 그 앞 양쪽으로 관원들이 16, 6명이 자리 잡고 있다. 다시 그 앞으로 실제 형을 집행하는 관원들 10여명이 좌우로 벌려 있다. 총 20여 명 이상의 관원이 동원된 셈이다. 가장 앞으로 효수대(梟首臺)를 높이 세우고, 그 앞에 최제우가 앉아 있다. 효수대에 끈을 드리워 최제우의 머리에 묶어 놓았다. 

좌우 가장자리로 감영의 고목들이 처형 장면을 내려 보듯 서 있다. 마치 훗날 역사의 한 장면을 증언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망나니는 네 사람이 동원되었다. 망나니 한 사람은 끈을 잡고 있고, 세 사람은 칼을 들고 춤을 추고 있다. 허리에 도롱이 같은 것을 두르고 있는 것은 피가 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망나니의 춤이 극에 이르러 무르익자 한 망나니가 드디어 칼을 내리쳐 마침 목이 잘라지는 순간이다. 목에서 피가 흘러 땅을 적시고 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절한 자염이다. 한국인의 눈으로 보아서는 민중의 영웅이 죽음을 맞이하는 슬픈 장면이다.  

작품의 크기는 세로는 70cm이며, 가로는 57.5cm이다. 그림의 좌측에 ‘1911년 늦은 가을 다시 그리다(四十四年 晩秋 再寫)’라 기록되어 있고, 그 아래 ‘동운(東雲)’이라는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44’라는 것은 ‘명치(明治) 44년’를 의미하는 것이라 1911년에 해당한다. 이 화제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특히 ‘1911년’과 ‘다시 그리다’라는 부분이 이 작품의 모든 속성을 보여준다. 1911년에 그린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시미즈 도운이 초상화를 그린 것과 같은 해에 그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도 초상화와 함께 그려진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다시 그리다’란 한 것은 조선시대의 용어로 ‘이모본(移摹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이모된 것이라면 이 작품이 걸려 있던 곳에 이미 이 전에 그린 작품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내용의 작품이 걸려 있었을 곳이라면 시천교나 천도교의 교당 같은 곳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분명 초상화와 참형도는 같은 곳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추정이 맞는다면 참형도가 이모된 것처럼 초상화도 이모된 것이 분명하다. 


<최제우 참형도(慘刑圖)> 부분

  
<최제우 참형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20여 명 이상의 인물이다. 일본인이 그렸다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인물 묘사나 의복의 묘사가 크게 어색하지 않다. 배경이 되는 산이나 고목들의 묘사가 유연하지 못하고, 누각과 인물과의 비례나 인물들의 동태가 경직된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공적인 의미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속에 중심이 되면서 가장 정성스럽게 그린 부분이 작품의 중심 내용인 근경의 참형 장면이다. 배경이 되는 관원들의 모습이 정적인 반해, 망나니들의 모습과 사형수인 최제우의 처형당하는 모습에서 동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이들의 춤추는 율동감은 목이 잘리는 최제우의 삶의 마지막 장면의 처절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끈에 매달린 최제우의 머리끝의 긴장감, 칼이 목이 지나가는 순간의 포착, 뚝뚝 떨어지는 핏물 등은 당시의 순간을 실감나게 한다. 또한 망나니들의 편치 않은 표정과 최제우의 담담한 표정은 더욱 상황을 극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작품은 시미즈 도운이 교토화파의 화법에 익숙한 화가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교토 출신 화가들이 특장을 보여주는 역사화의 전통을 잘 보여주기도 하고, 그들 특유의 기법인 녹색 톤의 바탕에 채색을 넣는 색감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제자 가토 쇼린이 자신의 스승이 ‘인물화에 능했다’는 증언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미즈 도운이 인물화에 능한 화가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계속)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08.1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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