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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한국화단과 시미즈 도운

글/ 황정수

1910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들어온다. 그동안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던 한국의 정세 때문에 이주하는 것을 편치 않게 생각하였던 일본인들도 이제는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쉽게 이주를 결심한다. 이들 중에는 많은 미술인들도 있었는데, 자신의 전공을 식민지가 된 한국에 펼치기 위해서 온 이도 있었고, 다른 사업을 하기 위해서 왔다가 더불어 미술 활동을 한 이도 있었다. 미술만을 위해서 온 이들은 주로 공립학교의 교사로 발령을 받아 온 경우가 많았고, 일부는 개인적인 화숙을 설립하여 그림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일본에서 미술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다른 일을 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들어 왔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시미즈 토운(淸水東雲, 1869년경-1929년경)은 일본에서 그림을 그렸으나,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한국으로 온 후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경우이다. 사실 그는 일제강점 이전부터 한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던 화가였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일본인 화가들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다. 그는 단순히 그림을 그린 화가로서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화가로서의 역할보다는 당시 식민지가 된 한국에 일본 미술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그림을 가르치는 개인 화숙을 열었으며, 같은 곳에 사진미술소를 열어 영업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가 만든 화숙은 근대 미술학교가 없었던 한국에서 매우 특별한 미술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화숙에서는 주로 일본화를 가르쳤는데, 많은 이들이 그림을 배웠다. 물론 대부분이 일본인 관료들이었지만, 전문 화가들도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가토 쇼린(加藤松林, 1898-1983)과 같이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 미술에 많은 공헌을 한 이도 있었다. 

관료로 있었던 그의 집에는 많은 일본인 관료들이 그림을 배우려 드나들었고, 그는 1915년 공진회(共進會)에 참여하는 등 많은 미술 행사에 관여하였다.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될 때에도 그는 총독부의 정책 수립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인 화가들이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는 후원자의 역할도 주저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많은 유명한 화가들은 한국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머무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경성에 머물며 시미즈 도운의 도움을 받았다. 시미즈 도운은 총독부의 힘을 등에 업고 그들을 도왔으며, 이를 통해 미술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구축해 나갔다. 마침 그가 살던 정동 지역은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 같은 영향력 있는 미술인도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 미술인들이 드나드는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일본인 뿐 아니라 당시 한국의 상류사회에 있었던 미술인들도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시미즈 도운


시미즈 도운은 교토(京都)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가 있었다. 그는 당시 교토 화단의 중심인물이었던 시미즈 도요(淸水東陽, 1849-1894)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시미즈 도요는 인물화와 화조화에 능했던 인물인데, 시미즈 도운은 그에게서 주로 인물화를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이후 모리 간사이(森寬齋, 1814-1894)와 기시 치구도(岸竹堂, 1826-1897) 등과도 사숙의 관계를 맺는데, 한국에 와서도 그들과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경성에 머무는 동안 동년배였던 교토 출신의 저명한 화가들인 야마모토 슌코(山元春擧, 1871-1933)· 츠지 카코(都路華香, 1870-1931)와는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시미즈 토운의 화맥과 동년배 벗들은 모두 교토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들로, 시미즈 도운은 한국 근대 화단에 ‘교토파(京都派)’ 화풍을 전한 중요한 작가이다.이러한 학습과 교류는 그의 미술세계가 교토화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미술 공부를 마친 후 히코네(彦根)의 수출용 그림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사하였다고 하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시미즈 도운은 1904년에 통감부 관료와 일한인쇄회사(日韓印刷會社)등의 고문 격으로 내한한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미술을 바탕으로 화숙을 경영하였으며, 인쇄회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성의 정동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당시에 일본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정당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일본은 수많은 홍보용 엽서를 제작하는데, 이러한 이권에도 시미즈 도운은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이마무라 운레이(今村雲嶺)·가토 쇼린 등의 제자들과 함께 엽서의 바탕이 되는 그림을 대부분 맡아 그렸다. 또한 새로운 작가가 필요하면 자신의 출신지인 교토의 화가들을 불러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또한 자신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자신의 인쇄회사에서 엽서를 제작하는 등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이러한 재정적 기반이 그를 당시 미술계의 거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7년에는 경성박람회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한국에서 체재하던 일본 화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미술협회나 여운사(如雲社) 등의 결성에도 깊은 관여를 하였다. 당시는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화가들이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여러 화가들과 그룹을 지어 활동하던 그의 도움 없이 단체 활동은 그리 쉽지 않았다. 1915년에 열린 역사적인 행사인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는 그의 역할이 어떠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행사의 실무를 맡아 일을 하였으며, 함께 치른 미술전람회에는 회화 작품을 출품하여 은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상의 활발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시미즈 도운의 화가로서의 활동 흔적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 모두 5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궁박물관 소장의 작품 <설중웅도(雪中熊圖)>와 <응도(鷹圖)> 두 점과 개인 소장의 <포도>라는 작품이 있어 3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반갑게도 최근에 <최제우 참형도(崔濟愚慘刑圖)>와 <최시형 참형도(崔時亨慘刑圖)> 두 점이 발견되어 모두 5점이 되었다. 이 밖에 1911년에 <최제우상>을 그린 적이 있으나 이작품은 현재 도판으로만 전하고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시미즈 도운 <설중웅도(雪中熊圖)>와 <응도(鷹圖)>


<설중웅도>와 <응도>는 전형적인 일본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비단에 그린 것으로, 두 폭의 가리개 형식 병풍으로 꾸며져 있다. 동물을 세필로 치밀하게 묘사한 사실적인 그림이다. 일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곰과 매를 그리고 있다. 각 폭에 곰과 매를 좌우로 한쪽으로 몰아 그리고 한쪽은 그대로 비워둔 일본 특유의 공간 개념을 보여주는 구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그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소재로 당시 한국인의 눈에는 매우 이색적인 소재이다. 공간 배치 또한 조선시대의 미의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 선뜩 공감이 되지 않는 일면이 있다. 이 작품이 어찌하여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필시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그의 위치로 보아 총독부가 구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으로는 박물관에 작품을 소장하게 할 수 있었던 상황이 당시 시미즈 도운의 위상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시미즈 도운 <포도>


<포도>는 간단하게 포도 한 송이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시미즈 도운이 가토 쇼린 등의 제자들과 함께 그린 화첩 속에 전하는 것으로, 많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그렸다. 잎을 묘사한 부분에서 먹의 농담이 자연스럽고, 포도 알알을 그린 붓질이 자연스럽다. 일본 남화풍의 문인화적 경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세 점의 작품이라도 남아 시미즈 도운의 솜씨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40여년의 말년을 보낸 시미즈 도운임에도 현전하는 이 세 점 모두 한국에서 보낸 경험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고, 한국인들과 많은 교류를 한 것을 생각하면 한국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오래 동안 그러한 작품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2015년 1월 한 미술품 경매에 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처음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그 내용이 심상치 않게 파격적이어서 시간이 흐르며 몇몇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충격적인 작품의 내용은 민족 종교인 동학의 1, 2대 교주 최제우와 최시형의 처형 장면을 그린 섬뜩한 것이었다. 작가는 일본인 화가 바로 ‘시미즈 도운’이었다. 경매 당일이 되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은 당시 상황에 매우 놀라워했다. 출품된 가격의 10배 정도 되는 고가에 낙찰되었기 때문이다. 한 고미술 소장가의 손으로 들어간 이 작품은 작가의 이력과 작품 내용 면에서 한국미술사에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계속)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10.16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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