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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쿠보 사쿠지로(大久保作次郎)의 <의자에 앉은 조선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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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보 사쿠지로(大久保作次郎, 1890-1973)는 일본 근대기의 대표적인 서양화가 중의 한 명이다. 그는 1890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15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본과를 졸업하였다. 도쿄미술학교에서는 일본 근대 서양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 1866-1924)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3세 되던 1913년에 숙부의 집으로 들어가 가문을 이었다. 동급생으로는 나베이 카츠유키(鍋井克之, 1888-1969)가 있다. 졸업 후 같은 학교 연구과에 들어갔으며 1918년 수료하였다. 1916년에 처음 문부성전람회에서 특선을 한 후 1918년까지 3년 연속 특선에 들었다.       


오쿠보 사쿠지로


오쿠보 사쿠지로는 1923년 프랑스로 건너가 미술공부를 하였으며, 1927년에 귀국하여 제8회 제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이 되었다. 1938년에는 괴수사(槐樹社)를 창립하여, 1941년까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주로 관전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9년에 스즈키 치쿠마(鈴木千久馬, 1894-1980)、나카노 카츠타카(中野和高, 1896-1965)、아타카 야스고로(安宅安五郎, 1883-1960) 등과 함께 창원회(創元会)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1942년까지 작품을 출품하였다. 

종전 후 1950년부터 일본미술전람회의 운영위원회에 참여하여 일을 하였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왕현회(旺玄会)라는 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55년에는 와다 산조(和田三造, 1883-1967)、가와시마 리이치로(川島理一郎, 1886-1971)、요시무라 요시마츠(吉村吉松, 1887-1965)、유기 큐타(柚木久太, 1885-1970)와 함께 신세기미술협회(新世紀美術協会)를 결성하였다. 1958년에는 일본미술전람회 평의원이 되었다. 1960년 <시장의 어물전(市場の魚店)>이란 작품으로 일본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3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일본미술전람회 이사가 되었다. 1966년에는 일본미술전람회 고문이 되었다. 1973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주로 풍경화와 인물화를 그렸다. 그의 풍경화는 밝은 실내와 테라스, 나무 밑에 벤치 등 밝은 외광이 비치는 온화한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인물화 또한 햇빛을 받고 있는 인물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부드럽고 선명한 색채, 그리고 섬세함과 어딘가 몹시도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매력적인 면이 있다.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 어딘가에 온화하고 그의 인간미까지 알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많다. 모두 인상파의 기법을 사용한 온건한 화풍을 담고 있다. 일부 작품은 이질적으로 위엄 있는 필치 그린 사실주의적인 작품도 있어 그의 끈기 있는 필치를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의 프랑스 유학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문화와 아름다운 풍경을 접해 온화한 분위기로 그려지는 세계관이 더욱 감미롭게 되고, 더 섬세하게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요소는 오쿠보 사쿠지로라는 화가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작품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그의 예술적 정취에 흔들리고 움직이게 하는 힘이 되었다.
또한 그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재화의 제작에도 참여하는데, 비행기가 폭격하는 장면 을 그린 작품을 1943년 제2회 <대동아전쟁미술전>, 1944년 제8회 <해양미술전> 등 여러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바다 독수리 루비아나섬 공격>과 같은 작품에서는 수많은 전투기가 그려져 있는데, 루비아나섬에 온 적을 폭탄을 내리게 하여 큰 폭발을 일으키고 있다. 이 작에는 작품의 성향 때문인지 특별히 위엄 있는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오쿠보 사쿠지로는 사립학교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워진 학교인 일본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 교수를 지낸다. 그의 일본미술학교 교원 경력은 1934년까지 이어진다. 일본미술학교는 키노 토시오(紀淑雄, 1872-1936)라는 사람이 세운 학교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 교수와 국립박물관 감사관을 역임한 이였는데, 1916년 도쿄에 일본미술연구소(日本美術研究所)를 세운다. 이 연구소는 이듬해인 1917년 일본미술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 미술학교의 길을 걷는다. 이 학교는 미술 교원을 양성하기보다는 전문적인 미술작가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둔 전문 미술학교였다. 미술의 천재 교육을 제창하고, 아시아의 유학생도 많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학교를 다닌 한국인으로는 서양화를 전공한 진환, 유강렬, 임직순, 한상돈 등이 있고, 동양화를 전공한 조복순도 이 학교를 다닌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일본미술학교의 교수로는 유화과에 오쿠보 사쿠지로, 코지마 젠타로(小島善太郎), 가와시마 리이치로, 이노쿠마 제이치로(猪熊弦一郎), 미야모토 사부로(宮本三郎), 하야시 타케(林武) 등이 있었고, 조소과에 한국 풍경을 목판화로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히라쓰카 운이치(平塚運一, 1895-1997)가 있었다.  

오쿠보 사쿠지로는 1935년에 일본미술학교를 떠나 타마제국미술학교(多摩帝国美術学校) 서양화과 교수를 자리를 옮긴다. 타마제국미술학교는 도쿄제국미술학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학교를 새로운 감각의 미술을 가르치는 것을 추구한 명문학교였다.  

오쿠보 사쿠지로가 한국을 언제 방문하였는지는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일본인 화가들이 그들의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 만주를 방문하는 정부의 권장에 부흥하여 많은 이들이 섬을 떠나 왔다. 그들은 한국을 방문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만주나 대만을 가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오쿠보 사쿠지로는 1936년과 1938년에 대만미술전람회(臺灣美術展覽會)의 심사위원을 역임한다. 이 때 한국을 방문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어쩌면 이전에 이미 한국을 방문하였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당시 만주나 대만에 심사위원을 역임했던 이들은 대부분 한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주로 맡았기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한국을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식민지의 이국적 정서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사명으로 느낄 만큼 좋아하였다. 더 나아가 그들 예술 세계의 중심을 이룰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어떤 이들은 자청해서 미술전의 심사를 맡기 위해 노력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조선미술전람회, 만주미술전람회, 대만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은 일정한 인맥이나 화맥에 따라서 배치되는 경향을 보였다. 한 번 심사를 맡으면 다음해까지 이어 맡는 연속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소위 ‘한국통’, ‘대만통’, 만주통‘ 화가들이 생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과 인연을 맺었던 일본인 화가들의 대부분이 이 세 전람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방증하기도 한다.

일제강점 36년 동안 수없이 많은 화가들이 한국을 방문하였지만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면 그들이 한국을 방문한 시실을 증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들의 모든 개인적인 기록을 조사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들의 한국 방문을 알기 위해서는 이들이 남긴 작품을 조사하는 길 이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없다.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이 남아 있더라도 꼭 한국에 온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한국을 방문하여 그렸을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오쿠보 사쿠지로 또한 한국을 방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그가 한국을 방문하였는지 소상한 기록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한국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이 남아 있다면 이를 통해서 그가 언제 한국을 방문하였는지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이 그가 그린 작품 한 점이 남아 있어 그의 한국 방문과 미술세계를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발견된 그의 한국 소재 작품은 단 한 점에 불과하다. 


 <의자에 앉은 조선 여인> 


그가 남긴 작품은 <의자에 앉은 조선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것으로 1921년에 그린 작품이다. 세로 45cm, 가로 38cm의 8호 크기의 작품이다. 우측 아래 ‘S. ohkubo'라는 서명이 있고. ‘1921’이라는 제작 연대가 적혀 있다. 후기에 주로 한 서명인 ‘S. okoubo'와는 자모의 차이가 조금 있다. 후기 서명의 필체에 비해서 훨씬 달필의 날렵한 필체이다.  


<의자에 앉은 조선 여인> 부분도


하얀 한복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한 여인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다. 뒷머리에 쪽을 지고, 머리에는 붉은 비녀를 꼽고 있다. 의자를 옆으로 하여 치마를 말아 쥐고 등거리에 팔을 올리고 다소곳이 앉아 있다. 평상시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고, 그리는 대상이 되어 모델로 앉아 있는 품세이다. 여인의 모습으로 보면 어린 소녀는 아니고, 성숙한 여인으로 보인다. 당시 한국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기혼의 중년 부인은 아닌 듯하고, 모델로 섭외한 기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럼에도 작품 속의 여인은 마치 깊은 사색에 든 정숙한 중년 부인처럼 그윽한 분위기로 앉아 있다. 

전체적으로 회색 톤의 색조를 사용하여 사색적이고 그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주로 세로 방향의 빠른 필선을 사용하여 대상의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1923년 프랑스로 유학을 간 이후에는 느린 필선을 사용하여 사생 대상을 다듬어 그려 온화한 화풍을 보이는 경향이 되었지만, 이 작품을 그린 1921년은 유학을 떠나기 전이라 후기 그의 작품들과는 다른 필치를 보인다. 빠른 필치와 그윽한 색조로 그린 이 작품은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붓의 용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요소는 한국인의 감성과도 통하는 일면이 있다. 조선시대 남종문인화의 전통에서 보이는 선묘의 방식을 느끼게 한다. 특히 세련된 선묘로 그린 옷고름이나 치마의 주름은 자연스러운 필치에서 음악적 리듬감마저 느끼게 한다. 내공이 깊은 장인의 세련된 솜씨를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서양화가가 그린 한국인의 모습이기에 야기되는 어색한 면이 드러난다. 특이 얼굴의 콧날에서 미간에 이르는 선과 반월 같은 턱 선과 대각선으로 긴 얼굴의 윤곽은 역동적인 느낌은 주지만 전통적인 한국 여성과는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이는 작가가 유럽식 서양화 기법의 인체 해석 방법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쪽진 머리의 묘사도 단정함을 강조하는 한국인의 의식과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이 작품이 주는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강력한 예술적 정취를 손상시키지는 못한다.  

이 작품의 가장 좋은 미덕은 매우 빠른 단호한 선과 회색과 갈색을 중심으로 조성된 무게감 있는 화면이 주는 강인한 인상이다. 곳곳이 고개를 들고 과묵하게 입을 다문 여인의 얼굴은 세상에 맞서 세파를 견디어 온 여인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같은 색조의 물감을 명도를 달리 하여 처리한 배경을 다루는 솜씨 또한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 배경과 사생 대상의 조화가 잘 된 빼어난 수작이라 할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오쿠보 사쿠지로의 예술가로서의 품격이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그는 유럽에서 연유한 서양화를 배운 화가이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한중일 삼국에서 공통적으로 내려오는 남종문인화의 정신이 배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의 붓을 다루는 솜씨나 자극적이지 않은 중간색의 사용은 그림 속 여인의 모습에 깊은 품격을 만들어낸다. 오쿠보 사쿠지로의 작품 <의자에 앉아 있는 조선 여인>은 빼어난 구상과 뛰어난 기교에 자신의 예술가적인 품격이 만들어 낸 격조 있는 뛰어난 작품이라 할 것이다. 
        
 
글/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7.06.28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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